이코스타 2003년 11월

讀者前 上書


잘 지내고 계신지요?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그렇듯 늘 만사형통하지는 않아도 세상이 줄 수도 살 수도 없는 그 평강으로 인해 안녕(安寧)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곳 토론토에서 아홉 번째 안편지(內簡)를 드리는군요. 요 몇 달 새 제 영혼 안팎의 풍경들과 어우러진 묵상 몇 점을 그려내 보도록 하지요.


전태일은 과연 자살하였는가?


아, 이 어쩐 일인가. 생활고를 비관한 주부의 투신부터 현대 정몽헌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까지 조국에서 들려오는 도미노 식 자살 소식은 탄식을 절로 나오게 한다. 가히 자살공화국이라 할 만 하다. 혹자는 정몽헌 씨가 자신과 회사 안팎에 얽힌 문제들을 다 끌어안고 간 점 때문에 그 아버지인 정주영 씨로부터 시작된 현대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일종의 영웅비극에 비하기도 하고, 나아가 어떤 이는 우리 사회에 자살이 영웅시된 것으로 전태일의 분신을 예로 거들먹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전태일의 경우는 자살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세상의 무게에 굴복하고 허무에 몸을 내어맡긴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 것에 가깝다. 바울의 예리한 통찰처럼 사랑이 없이 그렇게 하는 이들도 많다. 이를테면 영웅심에서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보다 더 지극한 한국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도 알고 보면, 정신적으로 자식과 미분화된 상태에서 자식을 통해 정체성을 획득하고 자기실현을 해보려는 이상야릇한 심리적 병폐에 기초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태일은 그의 일기나 삶이 증언하듯이 사랑으로 자기 몸을 불사른 경우이다. 그것은 근본/복음주의자들이 쉽게 내뱉듯 조물주가 준 삶을 자기 맘대로 내팽개친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그의 분신(焚身)은 그와 동료 노동자들이 처해 있던 이루 말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 겪어보지 않은 이라면 어림하기도 힘든 극한의 상황에서 보일 수 있는 농담(濃淡)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고 말도 안 되는 불의한 상황을 고발하는 강렬한 몸짓인 것이다. 물론 혹자는 그러한 공의와 사랑에 대한 강렬함을 꺼뜨리지 말고 묵묵히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면서–비록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 일 뿐이고 전혀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애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참한 노예 노릇 중에 부르짖었어도 하나님은 모세가 태어나고 준비되기까지 80년을 그 상태로 두셨듯이 주께서 더디게 역사하시는 것을 오래 참고 기다려야지 인간적으로 너무 서두른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여지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자살을 했으니 당연히 지옥행이라고 입빠르게 단죄하기 보다는, 극한의 상황에서 저지른 방법적 실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를 향한 그의 중심을 헤아리셨을 것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복음주의자들은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반성하기보다는 정죄하기에 재빠른 족속들이라는 점이다. 전태일의 지옥행을 당연시하기 전에 지옥에 있을-만약 그들의 생각대로 됐다면-그와는 견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희박한 소자(이 사회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낱 별 볼 일 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과 공의에 대한 갈증을 참회하는 것이 마땅한 순서가 아닐까?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다면 결단코 천국에 가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놓고 두려워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닐까? 이럴 때에만큼은 전태일은 혁명가가 아니라 기독교인이었다고 발뺌할 것인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목회적, 실천적 외연(外延)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내가 몸담은 종파, 교단에서 아무리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심으셨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속한 종파와 교단의 장점을 자랑스러워하며 그것을 잘 살려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우주적인 차원에서-를 기름지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교회도 완전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다양한 교회를 주셨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준이단이니, 기독교장로회 교회의 목사들은 다 정치꾼이고 심하게는 빨갱이라는 식으로 욕하던 것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도리어 우리가 허약했던 부분인, 영성과 실천을 두 교회가 보완해왔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이제 근본/복음주의는 고개 들어 다른 종파와 교단을 보고 고개 숙여 배우지 안 된다. 알만한 사람은 1200만 성도라는 치수가 잔뜩 부풀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90년 이후로 한국교회 역시 서구교회처럼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는 알고 있다. 이곳 토론토의 아름다운 예배당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교회가 고급 콘도나 도서관으로 개조되는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정통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는’근거 없는 자만에 의한 뿌리 깊은 배타성부터 내려놓고 허리를 동여 다른 자매(혹은 형제) 교회를 향해 가르침을 베풀어 주소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갈가리 찢어진 교회가 하나 되는 길은 그저 나보나 남을 더 낫게 여기라는 단순명료한 말씀을 교회 차원에서 실천하는 것에 있다.


근본/복음주의가 다른 자매 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허다하다. 예를 들어 산업화된 나라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소비문화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없건만 근본/복음주의권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자신이 처한 시대의 영과 싸워야 함을 가르치는 기독교세계관을 논의하면서 이 부분을 다루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복음주의권에서는 로날드 사이더와 리차드 포스터 등이 단순한 삶에 역설하기는 했지만 탁월한 논의는 단연 가톨릭 측이 돋보인다. 소비문화사회에서 그리스도 따라가기(Following Christ in a Consumer Society)를 쓴 존 카바놔(John Kavanaugh)나 장 바니에와 헨리 나웬의 뒤를 이어 토론토의 영성을 지켜가고 있는 메리 조 레디(Mary Jo Leddy)를 읽어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문익환 목사님이 두루마리를 입고 마치 남북을 다 끌어안을 듯 두 팔을 넓게 벌려 강연을 하는 그림이 깔려있다. 오지랖 넓은 해민이는 압바 공부하는 거 간섭하려고 내 곁에 왔다가 문목의 사진을 볼 적마다”압바, 무니칸 목짜님!”하면서 뭘 안다는 듯이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마다 나는 내놓으라 하는 교계 목사님들이 네 살배기 아해보다 속이 좁아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얘기가 잠시 딴 곳으로 샌 것 같다. 토론토의 살림살이로 돌아가도록 하자.


꽃에 얽힌 옛날이야기


전번에 저희가 방갈로(작은 단층 주택)로 이사 왔다는 얘기까지 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집 얘기를 드리는 것에 앞서 옛적에 저희 집에 살았던 사랑스러운 두 사람에 대해 얘기할까 합니다.


옛날 토론토의 한 오두막에 한 남자와 그의 엄마가 정겹게 살았더랬습니다. 그 어머니는 꽃을 무척 사랑해서 그의 정원을 갖은 화초로 에웠습니다. 초춘(初春)부터 만추(晩秋)까지 꽃이 끊어지지 않고 쉬임없이 피도록 살뜰한 배려 하에 갖가지 여러해살이 꽃(perennial)을 정원 곳곳에 심어두었습니다. 그 결과 이른 봄이면 수선화와 튤립으로부터 시작해서 포도 히야신스와 시베리안 스퀼이 차례로 피어나고 늦봄에는 붓꽃이 뒤를 이어줍니다. 여름으로 들어서면 화려하기 그지 없는 작약과 샛노오란 중국 나리가 뜰을 가득 채워주고, 장미와 프록스는 여름 내내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가을로 접어들면 집 옆과 앞을 두른 국화가 추정(秋情)을 돋워줄 겁니다. 새들도 이집 뒤뜰을 좋아해서 모이를 뿌려놓으면 참새와 홍관조(cardinal), 어치(bluejay) 등이 와서 지저귀는데, 한 번은 일흔 두 마리의 참새가 동시에 왔다 간 적도 있다고 하네요. 지렁이와 달팽이 및 민달팽이 등은 정원의 터줏대감들이고, 청설모와 미국너구리 같은 짐승들과 나비, 꿀벌, 무당벌레, 메뚜기, 풍뎅이, 잠자리 따위의 벌레들은 뒷마당에 자주 마을 오는 손님들입니다.


그 남자의 엄마는 오래 전에 하늘나라로 갔고, 그 남자 역시 늙고 병들어 요양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와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우리 옆집의 짐 할아버지가 얼마 전 그 엄마가 심었던 오십 년 된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요양소를 찾아가서 이번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 정원을 잘 가꾸고 있다고 전했더니 아주 좋아했다고 하는군요. 그 얘기를 들으니 왠지 코끝이 찡해지며 그 분을 한 번은 꼭 만나 뵈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그 두 사람이 그토록 정성스레 가꾸어놓은 꽃밭을 더 가멸게 하기 위해 우리는 구석구석 빈 공간에 씨를 더 뿌렸습니다. 눈을 위해서는 나팔꽃과 해바라기, 코스모스, 금송화를 심어 꽃물결을 한결 더 일렁이게 하였고, 코를 위해서는 타임과 민트, 버질 등의 허브를 키워 영혼에 닿도록까지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기도 합니다. 입을 위해서는 세 종류의 토마토와 오이, 상추, 노랑피망을 가꾸어 우리 식탁도 맛나게 하고 이웃들과도 나누어 먹습니다. 참, 그리고 늦가을걷이를 위해 이틀 전 배추와 알타리무도 심었습니다. 이번 참에 뒤뜰에 살고 있는 관목과 꽃, 허브와 채소를 찬찬히 다 세어보니 무려 47가지나 되더군요.


꽃은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도 있듯이 공부는 뒷전에 두고(^^) 꽃밭만을 지성으로 돌보고 살폈더니 이제는 공부를 하다가 뒤뜰로 나와 둘러보자면 오감이 다 흐뭇합니다. 이웃들은 이웃들대로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면서 뒤뜰에 있는 저를 볼 때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뜰을 갖게 되어 행운이라며 이웃 모두의 정원이니 잘 가꾸어달라고 약간은 엄포가 담긴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노오란 해바라기와 보랏빛 나팔꽃이 어우러지는 요즈음에는 옆집 짐 할아버지와 매일 같은 시각에 개를 몰고 나오는 미셸과 켄 부부로부터 이 동네에서 가장 예쁜 정원이란 칭찬을 듣기도 했지요. 이웃들이 우리집을 지나가며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그래서 밭일이 이웃사랑의 한 실천이 될 수 있다면 앞으로도 곱게 가꾸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해민이 역시 농사꾼인 제 아빠(해민 왈, “압바, 또 농사지으러 가?”)를 거들다 보니 지렁이나 민달팽이, 쥐며느리 등을 아무렇기도 않게 손에 올려놓고는 장난을 칠 정도로 흙과 친해졌습니다.


손에 초록물이 들도록 텃밭을 가꾼 다음 땀과 흙으로 버무려진 몸을 뜨거운 욕조에 담그는 것은 제가 이곳에서 누리는 가장 큰 호사입니다. 해민이도 뒤질세라 압바 뒤를 따라 장난감 배를 안고 욕조에 텀벙 뛰어듭니다. 둘은 물고기 배에 들어간 요나, 바다 위를 건너신 예수님, 폭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 등의 성경 이야기를 구현하며 그렇게 놉니다.



죽음의 소식이 두 번 나를 두드렸을 때


지 난 오월 초부터 유월 초까지 한 달간 나는 아끼는 세 사람을 잃었다. 날벼락 같던 두 건의 사고 소식은 내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오월 초에는 한국에서 같은 교회의 절친한 지체였다가 캘거리 근교로 이민 간지 정확히 1년 만에 송문규 형과 그 아들 시온이가 맞은편에서 중앙선을 침범한 차량에 의해 소천(召天)했고, 한국에서 개척교회 시절 아끼는 제자였던 기한이는 유월 초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홀아버지와 누나만을 남겨 놓고 우리 곁을 떠났다.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흐느끼다가 눈물을 씻기 위해 겨우 캘거리에는 다녀왔지만 한국에는 다녀올 수가 없었다. 이름 있는 백댄서였던 기한이를 위해 평소 절친했던 가수 채리나 양이 강타를 비롯한 여러 후배 가수들을 모아 추모공연을 열어 수익금을 가난한 기한이네 가족에게 건넸다고 하는 소식을 들으니 연예인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누가 죽음에 대한 슬픔은 겪을수록 익숙해진다고 했던가! 죽음의 소식은 결코 낯익을 수 없는 존재이며, 그것이 내 영혼을 자주 두드릴수록 놀람과 아픔의 파동도 강렬해진다. 해민이가 내 곁에 앉아 장난을 치며 얄밉도록 사랑스럽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시온이를 잃은 경아 누나의 아픔을 조금은 가늠해볼 수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런 자식을 말도 안 되는 사고로 잃어버린 가슴은 대체 얼마나 갈가리 피눈물로 엉겨 있을까!


이번 일로 너무 놀랐던 것일까. 이제까지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접하면서 오로지 연민만을 느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공포가 느껴졌다. 연민과 공포는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감정일 것 같지만 고전적인 미학범주론에 의하면 그것은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비극 관람 중에 극중 타자의 불행을 접하면서 도출되는 감정인 점에서는 양자가 공히 일치하지만 그러한 재앙이 내게는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면 연민이, 내게도 그런 일이 덤벼들 수 있다고 느끼게 되면 공포의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사실 이번 일을 겪지 전까지는 하나님이 나를 그런 식으로 데려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이 있었다. 안해와의 연애시절, 걸핏하면 헤어지자고 하는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안해가 보는 앞에서 자동차가 질주하는 6차선 도로를 눈 딱 감고 지나가는 호기를 부린 것도 다 그런 믿음 아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닫는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나를 그런 방식으로 불러올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조금은 나이를 먹은 것일까. 몇 년 전부터는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시나브로 내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실까 물으신다면 흔쾌히 “예”할 수 있다. 그것은 삶이 유난히 힘겹거나 유학생활이 고달파서가 아니다. 내남이 인정하듯이 나처럼 삶을 즐기면서 사는 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의 무게감, 즉 내가 지고가고 있는 이 십자가의 중량을 차차 실감해가면서 그만큼 더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남은 가족의 슬픔을 생각하면, 더구나 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안해의 말을 떠올리면 지금 죽어서는 안 되겠다 싶지만, 인지상정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일 수도 있겠다 싶다.


문규형을 생각하면 축구를 좋아해서 그 긴 다리로 즐거이 축구장을 누비던 모습. 내가 골을 넣을 수 있게 패스해주고는 “어시스트 멋졌지!” 하며 해맑게 웃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서로의 집이 수원과 성남으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가끔 마실가서 밤늦도록 놀면서 얘기꽃 피우던 일들도 모락모락 피어난다. 이 둔한 사람이 지금에서야 깨닫는 것이지만 한국에 있을 때부터 문규형이 나를 얼마나 아꼈던가! 병상에 누워 있는 경아 누나의 첫마디가 “우리 문규씨가 총이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지?”였으니 말이다. 형은 캘거리 근교에서 학업을 하면서도 틈틈이 가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을 생활비에 보태라며 내게 보내주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자주 “총이보다 더 잘 살질 못하는 것 같다”고 하며 늘 자신을 채찍질했다고 하니 그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하물며 형과 함께 하늘나라에 간 시온이, 해민이에게 친구의 대명사였던 그 아이에 대해서는 지금 무슨 말을 더 쓸 수 있으랴.


기한이의 경우도 나를 한없이 가라앉게 한다. 기한이는 홀아버지 아래에서 사랑에 주리며 자라나 조금만 잘해줘도 곧잘 감동을 받고 하던 녀석이었다. 단비교회에 발을 들이고 지체들과 더불어 지내면서 진한 사랑을 맛보았으리라. 특히 녀석은 춤꾼이 되고 싶어했지만 기존 교회에서 곱게 보지 않는 점을 늘 부담스러워했었다. 나는 기한이에게 사람들의 갈채 앞에서 춤추더라도 그 중심만큼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춤추면 된다고 격려하면서 낮은울타리의 성준형에게 부탁해 당시 랩과 댄스를 곁들인 CCM으로 인기를 모으던 dc Talk(현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얼터너티브 락 밴드로 활동 중)의 뮤직비디오를 보여주기도 하고 춤과 음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전통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제이, 유승준 등의 백댄서로서 제법 인기를 모으기도 하며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춤을 추던 녀석은 오토바이 사고로 우리를 두고 떠났다. 지금 그 누나로부터 기한이가 단비교회에 다니던 시절을 제일 행복했었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미어진다.


이제는 두 사람과의 별리(別離)를 인정해야 한다. 영겁을 살 우리이기에 이별이 비록 찰나라 하더라도 분명 두 사람은 내 곁에 없다. 문득 볼프강 보르헤르트가 이 시대의 우리를 ‘이별 없는 세대'(Generation ohne Abschied)라고 했던 것이 떠오른다. 참된 ‘만남’이 없으므로 ‘이별’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말이지 이별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문규형, 기한이와 이별할 만한 ‘해후’를 가졌었는가? 다행히 그렇다.


작별을 맛본지 두세 달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간혹 슬픔이 토할 듯이 울컥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에라도 시온이와 문규형이 지금 이 시각 낙원에서, 우리집 냉장고에 붙어 있는 사진에서처럼 환히 웃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이없는 위로가 된다. “예수는 몸소 하나님 나라”라고 한 초대 교부 오리게네스로부터 게할더스 보스, 헤르만 리델보스, 조지 래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나라에 대한 수다한 논의를 접해왔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살아왔지만, 그 모든 신학적 논의에 앞서 그저 천국이 있다는 ‘그토록’ 단순한 사실에 대한 해민이 차원의 믿음이 ‘이토록’ 큰 의미가 된다는 것을 이번 일을 겪기 전까지는 잘 몰랐다. 반대로 제자였던 기한이에게 분명한 회심의 체험이 없었다는 점과 단비교회가 없어진 뒤로는 교회와 떨어져 생활했던 것을 감안해볼 때 그가 구원받았을까 하는 불안감은 계속 내 영혼의 평안을 갉아먹는다. 부디 이 불안감이라는 것이 내가 회심의 체험 및 중생의 확신을 강조하는 근본주의/복음주의의 구원관에만 익숙한 연유이기를 바랄 뿐이다.


성인력(聖引力)


뒤 뜰 얘기로 시작했으니 수미상관법에 따라 뒤뜰에서 바람 쐬는 얘기로 글을 맺을까 한다. 가끔 저녁을 먹고 뒤뜰에 펴놓은 의자에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아 느긋하게 시원한 저녁 바람을 쐬며 편안한 웃음을 나누곤 하는데 그 시간이 참 좋다. 살랑살랑 이는 바람을 맞고 있으면 이 바람이 어디서부터 왔을까 생각해본다. 북경 시내를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서는 거대한 폭풍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바람이 한국에서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일본의 호시노 도미히로 선생의 글에 홍순관 님이 곡을 붙인 노래가 생각난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무에 일면 녹색바람이 되고, 꽃을 보듬고 가면 꽃바람이 되건만 방금 나를 지나간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라는 노래다. 나 역시 예수에게 생명을 받았으니 적어도 주를 만나기 전 죽은 사람이었을 때 마냥 시체 썩는 냄새는 나지 않을 것이다. 그치만 샤론의 꽃내음이 나야 할 텐데 여전히 죄 냄새나 풍기고 다니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물도 매한가지다. 물은 무형(無形), 무색(無色), 무취(無臭)하지만 물이 풀에 들면 풀물이 되고 꽃에 들면 꽃물이 되고 시내에 들면 시냇물이 된다. 예수님에게 들면 생명을 담뿍 머금은 목마르지 않게 할 생명수가 되련만 내게 들면 ‘속물’이 되지는 않는지, 죄 썩은 물이 고인 고약한 침전수가 되는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래도 요즘 뒤뜰에 퇴비를 만들면서 기쁨으로 깨달아가고 있는 것은, 지금은 악취가 나고 파리가 들끓는 썩은 잡초, 음식 쓰레기 등도 시간이 지나면 기름진 두엄으로 변하듯이 한 때 냄새가 나서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나 같은 사람도 나중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가멸찬 두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뒤뜰에 앉아 모여드는 새와 나비를 보자면 중세 가톨릭의 영성가인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of Bingen)의 명구(名句)가 생각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의 글에 곡을 부친 사뭇 신비적인 음반을 듣고 있는데, 그가 한 번은 “거룩한 사람은 땅의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는 정말 인상적인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리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도 인력이 작용해서 거룩함이 남다른 이는 다른 존재들을 흡입하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나는 그것을 성인력(聖引力)이라 부른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받음직하게 살았던 때에는 사람들이 내 얼굴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이 세상에서 대체 누가 나를 미워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때에는 나와 사귐을 갖는 이들이 내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안의 주님께로 이끌리는 것을 나부터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이 조금은 남아 있어서인가. 지금도 많은 경우 사람들은 나와 우리 가족을 가까이 할뿐더러 선대하고 귀히 여기며 아낌없이 자기의 것을 베풀어주기까지 한다.


성인력은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성 프란체스코에게 새들이 친근하게 날아든 것처럼 사람을 두려워하는 피조물조차도 거룩한 사람은 알아보고 모여든다. 내가 정말 하나님께서 보암직하게 살았던 때에는 나비와 잠자리까지도 나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디에선가 날아온 곱디고운 나비의 날개를 가까이 보고 싶어서 주님께 달아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아무리 바싹 얼굴을 들이밀고 보아도 나비는 미동도 하지 않고 풀잎 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자리와 입맞추고 싶어서 묘목을 지탱하는 말뚝 위에서 내려앉은 한 마리에게 다가가 입술을 내밀면 그 잠자리는 내가 뽀뽀하는 동안에는 물론, 입맞춤을 받고도 한참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초록으로 보이는 듯 여치나 무당벌레 등이 날아와 내 몸에 앉은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내가 예전처럼 임재의 우산 속에 그 분과 나란히 걷지 않기 때문일까? 뒤뜰에 이만큼 모이를 자주 주었으면 동네 새들이 타성에 젖어서라도 느긋해질 법 한데, 내가 인기척만 내면 소스라치듯 놀라 달아난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토론토에서는 좀처럼 나무들과 얘기를 하지 못해서 나무들이 나를 꺼려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조금은 우울해지곤 한다. 더욱이 뒤뜰에서 일하다가 토마토 열매를 크게 보기 위해 아래에 붙은 잔잎을 따주거나 주위에 돋은 성가신 잡초를 뽑거나 하면 여전히 팔 안쪽으로 풀독이 올라 가려운 것도 속상한 대목이다. 물론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를 적으로 보고 독을 내뿜는 것이야 풀들에게 있어서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마는 아무튼 이런 일들이 바로 요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나의 이러한 경험에서도 확인되듯이 땅이 악인을 토해낸다는 성경의 말마따나 거룩하지 않은 이는 확실히 피조물과 평화롭게 살 수 없는 법인가 보다. “잠시 산이 나로 꽉 차 있다”고 한 신대철 시인처럼 내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꽉 차 있을 뿐 아니라 바람과 흙과 나비와 새도 나로 꽉 차 있는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순 없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요즘 내게 회복에 대한 세 가지 간구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을 썼던 로렌스 형제처럼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선명한 임재 의식 속에서 그 분과 행복하기 이를 데 없던 사귐을 나누었던, 도무지 말로는 표현할 길 없는 예전의 그 기쁨과 평안을 회복하고자 하는 기도이다. 그때에는 이 죄 많은 세상을 보며 근심하시던 주님께서 얼마나 내 안에서 쉬시기를 즐거워하셨으며 그로 인해 노을빛 물결이 내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출렁였었던가! 하나님이 가장 머물기 좋아하는 장소는 사람의 가슴속이란 말을 그때처럼 체휼한 적도 없었다. 둘째는 우리 안해를 하루라도 기쁘게 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밀월일기 시절처럼 안해를 철없이 눈멀게 사랑하고자 하는 기원이다. 내가 안해를 그토록 살갑고도 애틋하게 사랑했을 때 내 영혼이 얼마나 날아갈 듯 사뿐했던가. 길가의 꽃들조차 순순히 내 손에 꺾이기를 다투어 바라고 안해에게 안겨지기를 사모하지 않았던가! 셋째는 어떤 경우에라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잊지 않고 내가 스쳐 지나치는 모든 이웃을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전철을 타면 건너편에 앉아 졸고 있는 이이도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 날카로운 눈매가 좀체 가까이 하기 어려워 보이는 저이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 이유 없이 나를 무시하는 듯한 얼굴로 쳐다봤던 그 사람도 내가 품고 사랑해야 할 사람임을 되새겼던 그 때의 그 눈길을 회복하고 싶다. 주위의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화나게 해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떠올렸던 그때의 그 마음을 되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