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인의 하나 되는 정서는 한 솥 밥을 먹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구한말 보부상들이 다닐 때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더라도 솥만큼은
따로 가지고 다녔고, 손님은 따로 솥에 밥을 지어주었던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빔밥, 그것도 모듬 비빔밥은 이런
하나됨을 한 차원 더 올리게 한다. 어릴 적 자랐던 교회에서는 여름마다 산 집회를 갔었다. 일주일간 천막을 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각 천막 별로 공동식사가 이루어진다. 야외인지라 식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여분의 숟가락만 있으면 걱정하지 않았다.
깊숙하게 파진 큰 양푼 그릇에 남은 밥과 반찬을 넣고 휘 젓 거리면 훌륭한 비빔밥이 만들어졌다. 킬킬거리며 머리들을 맞대고 입
속에 무엇이 들어가는 지도 모를 정도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즉흥 모듬 비빔밥이었다. 이런 모듬 비빔밥이 한 솥 밥을
먹는 식구의 의미를 피부로 미각으로 체감하게 한다. 현란하게 오가던 스텐 숟가락의 공중곡예들, 먹으랴, 말하랴, 튀기던 침과
다시 양푼 속으로 낙하하던 밥알들, 그리고 흔들거리는 머리칼에서 반짝거리며 떨어지던 하얀 가루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다 먹고
소화시켜야 했었다. 한 식구(食口)가 될 때 비로소 한 가족(家族)이 되었다. 그래서 가족이란 모름지기 식구여야 하는 것이다.
요즘 생각하면 B형 간염의 주요 감염경로라고 펄쩍 뛰겠지만, 위생의 이해 득실을 넘어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그 때 이루어
졌다. 물론 디즈니의 만화영화 건달과 숙녀(Lady and Tramp)에도 두 마리의 남녀 개가 달빛과 아코디언의 생음악을
배경으로, 한 가닥의 스파게티를 나누는 진한(?) 장면이 나온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모듬 비빔밥과 스파게티 국수 한 가닥과는 그
농도와 풍성함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분명 한 그릇에서 너와 내가 같이 떠서 먹지만, 한국인의 모듬 비빔밥은 먹을 때마다
숟가락에 무엇이 건져질 지 모른다. 바다에서 낚시하듯, 다양한 종류가 걸려서 올라온다. 친구의 침 속에 무엇이 섞여 있을까
걱정하면 절대로 못 먹을 밥이다. 신뢰의 농도가 진한 만치 다양한 반찬이 섞인 모듬 비빔밥을 먹게 된다. 흩어졌던 다양함이
신뢰로 모일 때, 우리네 삶이 당장 풍성하여 지는 것이 한국인의 잠재적인 비빔밥 파워다. 오늘도 한 양푼에 재료를 넣고 친구끼리
먹는 모듬 비빔밥은 서울의 한 복판에서 버젓이 팔린다.

조화로 먹는 비빔밥; 융화를 부추기는 비빔밥


왕 비빔밥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더 우리의 먹거리 이야기를 하여보자. 서양의 먹거리는, 쪼개고 구별해서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선택을
통해서 음식의 맛을 찾는다. 한국인의 음식은 다른 음식과 융합과 조화의 맛을 느끼게 조리한다. 내친 김에 한식 이야기를 좀
더해보자. 비빔밥이 문헌에서 최초로 언급된 것은 18세기 말엽 시의 전서라고 하며, 골동반(汨董飯)으로도 불린다. 어지러울
골(汨)자에 비빌 동(董)자가 아우러져서 나온 음식이다. 주식에 곁들여 먹는 서양의 샐러드와는 달리, 비빔밥은 주식이다. 그리고
각 재료들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반찬이다. 그렇지만 각각으로 섭취하면 온전한 미각의 기준에 아쉬운 감이 드는 음식이기는 밥과
고추장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함께 섞어지면 모두의 맛이 살아난다. 이런 비빔밥의 유래는 다양하게 설명된다. 임금의 가벼운
점심상으로, 또는 섣달 그믐날 새날을 맞기 전 묵은 음식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시작되었다고도 하며, 그릇이 여의치 못한 야외에서,
편리하게 식사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에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분주한 농번기에 농부들의 식탁에서, 성묘 시 차례를 마치고 제물을
골고루 음복하기 위한 신인공식(神人共食)에서, 심지어는 동학 혁명군의 야전 음식에서, 다양한 출신과 배경을 가진 한국인에게
통일된 미각과 음식을 공유하게 하는 길이 비빔밥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 점심 시간, 자리 지키고 열심히 제 도시락 파먹는 얌전
파와 도시락을 들고 교실 안팎을 방황하는 배회 파가 있었다. 무말랭이 같은 메마른 짠지 종류를 반찬으로 싸오던 급우들도, 교실
한 바퀴 돌면 각 양 고급(?)반찬으로 도시락 통이 채워지고, 그 양철 도시락 통을 들고, 김치 국물 배어 나오기까지 한참
흔들고 나면, 비빔 도시락이 만들어졌다. 당장은 어지럽게 보여도 비비고 부대끼다 보면 함께 어울리는 상생의 길이 열린다.
한국인은 비빔밥으로 이 진리를 체득한다.

찜 닭 속에 계셨던 예수님


와 유사한 음식문화는 중동인 들에게서도 보았다. 세인트루이스에서 공부할 때였다. 이란 유학생들의 초대를 받아서 여러 나라
유학생들, 그리고 지도 교수들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통상적인 식탁은 아예 치워놓았고, 아파트의 거실 중앙에 큰
신문지들이 겹겹이 펼쳐 져있었고, 가운데 큰 대접을 놓은 것이 영 판 소풍 가서 점심 시간 먹는 모양새였다. 향긋하게 찐 쌀밥과
짭짤한 배추절이가 수북하니 담겨져서 나왔다. 그리고 금방 돌아가신 듯, 아직도 눈을 지그시 감은 요염한(?) 자태의 발가벗은
치킨들이 가지런히 대접의 원을 따라서 누워있었다. 우리는 먼저 오른 손을 씻었고, 둥그렇게 앉아서 손바닥에 고기와 야채와 밥을
오므려 싸서 먹었다. 한국인은 그래도 숟가락이라도 쓰지만, 원색적 손가락들! 힘껏 쭉쭉 빨던 그 손가락으로 덥석 고기도 밥도
주물럭거렸다. 미국인 교수들이 엉거주춤하니 당황해 하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왼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먹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손으로 직접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역겨울 정도로 버거운 요구이었음에 분명하다. 대부분이 곧 포크를
요청해서 식사를 마쳤다. 그들은 포크를 사용함으로 자기 침을 남들에게 줄 기회는 놓치고, 남의 침 튀긴 쌀과 고기, 반찬을 먹는
선택을 한 것이다. 제 3세계 국가에 속한 자유로움을 만끽하였다.

비빔밥에서 화목 제물로


래서 중동의 식사 문화는 밀접한 신체적 접촉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한 집단에 소속함을 의미한다.
손을 씻는 결례 (潔禮)의 전통에 무지한 무례한 사람들이나,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타 그룹을 제외하는 용도로 쓰였던 식탁이 예수를 통해서 포용의 자리로 변화되었다. 각 양의 사람들이
초청되고 포용되었다. 예수가 그 당시 기득권자들에게 드러나게 눈 밖에 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식사와 관련된 이슈였음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마태 9:10-11). 그 분이 한국인으로 태어나셨다면 아마도 천민들과 함께 모듬 비빔밥에 숟가락 꽂고
잡수시다가 양반들에게 심한 핀잔과 질책을 받다가 가문의 호적 명부에서 이름이 파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성경의 화목제물을
먹는 장면도 이와 흡사하게 실용적인 의도를 참석자에게 유도한다. 기름은 제단에 불태우고, 갈비 살과 오른쪽 넓적 다리는 성전에
남겨두고, 나머지 고기들은 집으로 가지고 와서 식구들과 친지들을 불러 함께 먹는다 (레위기 3장). 굳이 신학적 이유를 몰라도,
마음이 불편한 사람과, 함께 손에 침 발라가며 같은 밥그릇을 주물럭거리며 먹는 것은 급체의 원인이 될 것이다. 화목제의 밥상
위로 오가던 것은 음식만이 아니었다. 이웃과 마음을 주고받아야 비로소 화목제의 온전한 모습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레위기의
혁명적 시도는 이런 밀접한 만남이 일어나도록 디자인 된 의식이다. 출애굽의 가장 드라마틱 한 모습은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라암셋에서 가나안을 향한 진군을 시작하는 해방의 장면이다. 보행하는 장정만 60만, 무수한 무리 들 가운데, 중대한 잡족이 함께
섞여서 출발한다 (출애굽기 12:37). 다양한 인종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그들을 출애굽의 신민으로 묶어준 상징적인 식사가
유월절 식사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한 솥 밥을 먹는 식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출애굽기 12: 48-9).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도 음식 정서 상은 이런 것이었을 것 같다. 성찬은 중동식 레위기 비빔밥의 완성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손가락
빨아가며 양고기와 반찬을 무교병에 상추 쌈 먹듯이 그렇게 먹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침을 사람이 먹고, 사람의 침을 하나님이
먹었다. 침 한 방울에 우리의 모든 유전자를 다 추적해 낼 수 있는데, B형 간염 같은 죄성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우리로 인해서 거룩하게 망가지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초(超)인이 아니라 초(初)인이다


상이 목말라 기다리는 사람들, 세상이 기대하는 사람은 여기에 있다. 이 육사가 목말라하던 초인은 백마를 타고 인간을 건너뛰는
초(超)인이 아니라 인간의 원래 모습을 회복시켜주느라 너무나 인간다운 모습을 지니고 사는 초(初)인이어야 한다. 천년 후에 오실
기약 없는 바람만 주는 분이 아니라 과거에도 오셨고 현재도 오시면 미래에도 오시는 분이어야 한다. 이 분이 오시면 과거의 원한과
상처로 눈을 흘기고 부라리며 살기가 등등한 얼은 밥상이 한 솥 밥으로 묶어주고 먹게 하는 모듬 비빔밥으로 바꾸어진다.
출신학교도, 소속 교회도, 지방과 풍속도, 억양과 사투리도, 집 평수와 학군도, 세대차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애찬을 먹는
사람은 천국에 사는 사람이다. 꼭 청포를 입고 오지 않아도 된다. 예수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비빔밥이 가진 복음적 가능성을
경험하며 살게 한다. 그래서 세상을 예수께로 이끄는 화평의 한국인은 예수 만난 한국인이 될 때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한국인의 모듬 비빔밥을 예수인이 먹을 때 산나물도 고추장도 화목제물 성찬이 된다. 세상의 화평과 인류의 평화는 구호와 현수막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요란한 선전무대 위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평화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평화가 곧 길이다. 젖은
청포도 몇 알만 있어도 즙 묻은 손 닦을 하얀 모시 수건 준비하는 육사의 정성이라면 예수는 우리 가운데서 섬김을 받는다. 사람과
사람이 살갑게 꾸밈없이 만나는 먹거리의 현장에서부터 예수 보듯이 사람과 만물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