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사랑


‘사랑’이라는 말처럼 남용되고 오용되는 말이 없다. 그 혼란스러운 사용의 결과로, 현대인들은 모두가 다 사랑에 대한 각자의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숭고한 사랑을 이야기 할 때에도 사람들은 각자 다른 그림들을 머리에 그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처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것이 없기에 그 옛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희랍인들은 현대인들이 그저 뭉뚱그려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개념을 굳이 여러 가지로 구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동물들의 본능적인 행위에서도 볼 수 있는, 부모의 자식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때 쓰는 동사, stergo(성경에 쓰이지 않음), 남녀간의 주로 이기적이고도 육체적인 감정을 말하는 erao (성경에 쓰이지 않음), 지식에 대한 열망이나 친구간의 우정, 형제간의 친밀감을 말하는 phileo (성경에 24번 등장), 그리고 흔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쓰이는, 자기 희생적이며 책임감을 동반하는 agapao (성경에 125번 등장), 이렇게 희랍인들은 다른 종류의 사랑들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눈 높이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자주 예로 등장하는 본문, 요한 복음 21장에서 이 두 가지 다른 동사, agapao와 phileo의 개념 차이를 더 확실히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에 첫 두 번은 agapao로 물으셨고 베드로가 계속 수준 낮은 사랑, phileo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두 번 대답했을 때에 세 번째 질문에서 주님께서는 agapao대신 phileo의 동사를 써서 다시 물으신 사건이다.


그런데 사실 현대인들은 이 사랑의 다른 모습들을 굳이 구별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굳이 구별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기 희생적이거나 책임감을 동반하는 사랑은 이미 현대인들의 삶과는 무관한 추상적인 사랑의 개념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온통 말초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야기나 노래 따위들로 범람하고 있다. 심지어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을 보면 동물의 원초적인 보호본능들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그 이야기들을 감동으로 채색해버린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어린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개의 이야기라든지, 가난한 주인을 위해 금조각들을 날라주다가 지쳐서 죽어버린 제비라든지… 사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이 험한 인간세상에서 사랑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동물들의 원초적인 본능에서 그 사랑을 보는 것이 희망적이라고 하는 인간 스스로의 절망적인 절규일 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혼돈스러운 인식은 비단 세상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현대의 그리스도인가운데에서도 만연되어있다. 우리가 흔히 아가페의 사랑을 산다고 생각하고, 조금 선하게 그리고 자기만족의 감동을 느끼면서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사노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해주시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첫 번째 비유는 ‘잃은 양의 비유’이다. 한 목자가 백 마리의 양을 넓은 들판에서 먹이다가 해질녘에 자기 양들의 숫자를 세어보다가 매우 당황하게 된다. 자기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새끼 양 한 마리가 안 보이는 것이다. 자식같이 애지중지하던 정말 소중한 새끼 양 하나가 사라졌다! 너무나도 자식같이 소중한 양이기에 앞이 캄캄해지면서 제정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그냥 들에 팽개쳐두고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험한 계곡이나 산지를 뛰어다닌다. 사랑하는 새끼 양에 대한 거대한 상실감은 그 목자가 다른 아홉 마리의, 역시 소중한 양들을 그냥 팽개쳐버리는 그 비합리적인 행동에 너무나 잘 표현되어있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감동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들, 특히 나에게 주신 육신의 자식들이나 혹은 말씀으로 섬길 수 있는 영적인 “자녀”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비록 때로는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내가 이들을 잘 돌보고 사랑할 수 있는 나의 이 마음에 스스로 감동하고 이런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를 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수년 전, 나는 내 아들이 한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어느 밤길에서 이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을 한 후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 밤, 나와 내 아내는 정신없이 헤매며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다녔다. 우리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둘째 아이를 마치 팽개치는 심정으로 어느 누구에게 맡기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온 마을을 헤매며 다녔다. 그리고는 극적으로 아이를 다시 찾았다! 이 잃은 양의 비유를 떠올리며,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목자,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 후 이 본문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한 구절의 말씀이 내 마음을 찌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What man among you, if he has a hundred sheep and lost one of them, does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open pasture and go after the one which is lost until he finds it?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그렇다!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 때에 그 자식을 찾아 헤매는 것은 바리세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얼어붙은 가슴을 가진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아니, 가슴에 주님의 사랑이 없는 나도 그렇게 할 수는 지극히 본능적인 사랑의 표현이었다. 나는 분명히 아가페의 사랑이 없는 사람임을 말씀 속에서 깨달았다. 그 수많은, 자식을 잃어버리고, 그 상실감으로 울부짖는 부모들을 향해 무관심하게 살아왔지만 내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 때에는 정신을 잃고 헤매는 나의 이기적인 사랑…


두 번째 비유에서 주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비록 자식과 같이, 목숨같이 소중한 새끼 양은 아닐지라도 여인의 생명을 건 명예와도 같은, 정말 소중한 열 드라크마중의 하나를 찾는 여인의 심정을 말씀하신다. 온 집안을 쓸고 닦은 후에, 혼신의 노력 후에 찾아진, 그 소중한 한 드라크마를 들고는 기뻐 뛰며 즐거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고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주님은 분명 우리가 이 기쁨을 맛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잃어버린 영혼 하나를 찾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이 일이야말로 우리의 삶 전체를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정말 귀중한 일이다.


그러나 세 번 째 비유, 소위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에서 우리는 앞의 두 비유에서 느낄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먼저 느끼게 된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기쁨이며 자랑인 두 아들 중 둘째가 그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살인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느 날, 자기 재산의 분배를 찾기 위해 찾아온 아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아비는 그 아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죽어있는 존재였다. 그 아들은 마음속으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내 재산을 좀 빨리 갖고 싶은데 당신은 왜 이 나이가 들도록 아직까지 살아있는 지 모르겠어…” 이 둘째 아들의 요청을 듣고는, 아버지는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재산을 받은 그 둘째는 재빨리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떠나버린다. 사실 인간이란 본래 이렇게, 나를 창조하시고 나와 함께 있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죽이고 내 자신만을 위한 욕심으로 인생의 길을 스스로 가는 사람이 아닌가… 이 인간의 실존이란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배반자이며 그러므로 소중히 여김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 비유는 계속, 파멸의 길로 들어서서 추락해 가는 아들과 그 배반자이며 살인자인 아들이 그래도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다가 그 돌아온 아들을 다시 기쁘게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죄인과 세리들, 그리고 바로 나를 향한 주님의, 아가페의 사랑이었다.


소중함의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을 사랑하는 사랑,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부으신 아가페의 사랑,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듣고 그리고 나도 이 사랑의 사람의 되려고 몸부림치며 살고있는가? 십자가에서 아직도 주님을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 몸을 아낌없이 내 주시고 고난 당하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 나도 그 사랑으로 살고 싶은 열망이 생기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열망이 강하면 강해질수록 내 꿈틀거리는 자아의 자존심과 이기적인 모습에 날마다 좌절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해야 쓰러지지 않는다.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을 이야기해야 살 수 있다. 내가 삶 속에서 사랑을 보여줄 기회가 주어질 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나의 본능적이며 감상적인 사랑과 얼마나 다른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자! 나의 마음을 찢는,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 감동적인 사랑을 부을 수 있는 자리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자! 나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가 죽음으로써 주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고백하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자아를 죽이는 순종을 통하여 온전히 회복될 수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자! 전도자는 삶을 섬기는 사랑으로 살아야 하지만 자신의 섬기는 사랑으로 세상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십자가 뒤에 숨어야 한다. 주님의 그 사랑만이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