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예배


조지 바나 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세대, 소위 베이비부머들이 중년의 나이에 들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이들이 다시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한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내세운 가장 큰 이유는, 교회들이 첨단 문화적 장비를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아져야할 복음의 메시지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복음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교회에 나왔지만 강단에서는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삶을 투자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지만 리더십들은 그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었다.


기독교 인구의 이러한 감소는, 비록 양상은 어느 정도 다를 지 몰라도, 이와 거의 비슷한 이유, 즉 강단에서의 복음선포의 약화와 리더십의 질적 저하로 인해 지금의 한국교회 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기독교인구의 감소를 뒤늦게나마 깨닫고 한국교회들은 ‘구도자 품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어쩐지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그 해결의 열쇠인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삶의 갱신보다는 전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문화적인 프로그램을 예배와 접목시켜보려는 피상적인 해결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미 미국인들의 주류 교회에서는 사라지기 시작하고 있는, 멀티미디어 사용이나 연극과 같은 문화적 시도들을 도입하는 일을 전도의 기본수단으로 하려는, 소위 ‘열린 예배’ 바람이 뒤늦게 불고 있다. 불신자(혹은 구도자)들과의 문화적 접촉을 시도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의도로 많은 교회들이 앞을 다투어 이 ‘열린 예배’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열린 예배’는 본래 의도대로 진정한 의미의 성공을 거두어 한국교회들 안에 자리를 잡았다기 보다는 이를 위해 애쓰고 힘쓰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아직도 성장의 정체 가운데에서 고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교회들은,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성장의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교회교인들이 수평이동을 해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신자가 믿게 되어 새 신자로 등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게 보는 현상이 되어버렸다. 이 ‘열린 예배’가 본래의 목적인 불신자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앞서 미국의 베이비부머들이 지적한 대로, 그 예배 속에 생명력 있는 복음의 메시지가 충실히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단 혹은 예배를 섬기는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전달하는 여러 유형의 메시지 속에 복음의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를 준비하는 선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예배의 생명력이 없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 생명력을 인간의 열심과 자의적인 열정으로 창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 생명력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경우에는 ‘개인의 인격을 전격적으로 바꾸신 성령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적으로는,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열린 교회’가 되려는 몸부림이 없기 때문이다. ‘열린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그가 어떠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주고 성장시킬 수 있는 교회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행사와 제도의 껍데기를 벗고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에게 다시 초점을 맞추는 그 회복의 탈바꿈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사실, ‘열린 예배’의 성공의 열쇠는 그 예배의 프로그램을 얼마나 세련되게 만드는 가에 달려있다기보다는 먼저, 그 예배를 준비하고 섬기는 교회가 먼저 ‘열린 교회’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교회가 이렇게 ‘열린 교회’로 거듭나면, 이 ‘열린 교회’의 살아 숨쉬는 복음의 생명력은 교회의 모든 사역 속에서 자연스럽게 넘쳐나, 예배 속에서도 드러나게 되어있다. 이러한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 그 예배가 열린 예배이든 “닫힌 예배”이든 연령과 문화적 배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구도자들은 이 복음의 생명력 앞에 회심하게 되어있다. 예배가 복음전도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건이 되어 그 경배 속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분, 하나님의 임재가 심지어 구도자들에게도 강권적인 은혜로 체험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예배의 일차적 목표는 먼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공동체 예배를 준비하며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는 예배의 프로그램을 세련되게 만들어 가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개개인의 삶이 먼저 복음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 그 삶을 주께 드리는 데에 있다. 이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란 예배에 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포함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나 예배의 프로그램 속에서 섬기는 자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 생명력이 넘쳐나 예배의 모든 순서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흘러 넘칠 때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어진다. 그러므로 감격적인, 하나님의 임재가 체험되는 예배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의 승부는 이미 예배로 나아가기 이전의 우리의 삶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공동체 예배로 나아가는 예배자의 진정한 모습은 다윗의 찬양시, 시편 68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찬양시는 삶의 충만한 은혜의 경험을 갖고 예배로 나아가는 다윗의 모습을 잘 나타내준다. 이 예배하는 삶, 삶 속에서의 예배의 경험은 다윗의 생애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윗은 그가 아직 소년 때에, 사울 왕을 폐하시기로 결정하신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즉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 되기까지 적어도 20년을 많은 위험과 환난을 통해 연단을 받았다. 그를 죽이기 위해 맹렬히 추격하던 사울 왕이 죽은 때에 그의 나이는 이미 30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후에도 약 7년 동안을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려는 세력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해진 때에 그는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던 헤브론 산지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또한 정해진 때가 되어, 새 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게 되었다. 그 때에 그가 이 때의 기쁨과 감격 가운데 노래하는 것이 바로 본문의 찬양시이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그 험난한 세월동안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 대한 감격이 있었다. 처음에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기 위해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격하면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예배자로서 올라가는 다윗은 이미 회중(백성) 가운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찬양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며 올라가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법궤가 그들과 함께 들어간다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다. 신실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께서 허물 많았던 다윗 자신과 백성을 지난 20여 년동안 어떻게 인도하시고 존귀케 하셨는가를 감격하는 기쁨이 담겨있는 고백이다.



18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our burden,
The God who is our salvation. Selah.
19 God is to us a God of deliverances;
And to God the Lord belong escapes from death.
24 They have seen Your procession, O God,
The procession of my God, my King, into the sanctuary.
25 The singers went on, the musicians after them,
In the midst of the maidens beating tambourines.
26 Bless God in the congregations,
Even the Lord, you who are of the fountain of Israel


그러므로 다윗과 백성들은 공동체로서 드리는 예배의 처소로 나아가면서 (in His procession) 이미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감격적인 예배가 되느냐 않느냐의 승부는 이미 예배로 나아가기 이전의 우리의 삶 속에서 결정된다고 하는 귀한 간증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공동체의 예배의 회복은 나 하나의 삶 속에서 내가 붙들고 살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이 감격은 성령님의 폭발적인 능력을 삶 속에서 체험하고, 하루 하루, 순간 순간 순종의 예배를 드린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감격이다. 이러한 삶의 경험을 갖고 모이는 공동체의 예배 가운데에는 반드시 성령님의 폭발적인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회복과 치유와 성결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은혜로 인한 회심이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공동체의 예배갱신을 말하려면 먼저 나의 삶 자체를 돌아보자.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을 예배하는 삶인가를 먼저 돌아보자. 감격적인 예배로의 회복은 나의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로마서 12장에 있는 명령처럼 나의 몸, 나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내가 속한 지역교회, 혹은 공동체의 예배 속에서 감격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체험되는 나의 예배생활이 회복되도록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 드리자. 그리고 주변의 형제들도 같은 예배의 회복을 그 개인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말씀과 기도로 서로 서로를 격려하며 섬기자! 강단의 메신저도 이러한 예배생활의 회복을 그 개인의 삶 가운데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믿음과 인내로서 간구하자!



Therefore, I urge you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worship. (Rom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