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의미 있는 사람과의 첫만남은 오랫 동안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그가 어디에서 누구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지금 형편이 어떤지 알게 되면 더욱 관계가 깊어지고 마음에 담게 되며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만난 북한이탈주민과의 첫만남은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온성 아이입니다. 온성 아이를 만난 건 경기도 안성시 하나원이었습니다. 저는 하나원 상담심리사 면접 후 양지바른 곳에서 혼자 앉아 있는 꼬마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 아이는 신문지 안에 끼어 온 광고지를 아주 귀중한 듯 이리 저리 만져보고 곱게 접어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남한의 여느 아이라면 휴지통에 버렸을만한 광고지를 그 아이는 조심스럽게 만져보고 햇빛에 비춰보며 누가 가져갈세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피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너 어디에서 왔니?”라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공손하면서도 경계하듯 “온성에서 왔는데요?”라고 했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아이의 모습과 억양이 낯설기만 했고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기에 다시 물었습니다. “뭐 언성이라고?” 그 아이는 “아니오. 온성이요.” 라고 대답하고 저 대신 광고지에 눈을 돌렸습니다. 
이렇듯, 저는 북한이탈주민과 북녘 땅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저를 선택하셔서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심으신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마음을 북녘 땅을 보면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제가 말씀 드린 온성 땅에서 온 그 아이, 지금은 얼마나 자라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가야 할 그 온성 땅이 어디인지, 북녘의 시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북한이탈주민들은 어디에서 살았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온성군은 함경북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최북단에 있는 동네입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하고 있으며 중국과의 국경선 길이는 105km입니다. 함경북도는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식량 배급이 가장 먼저 중지된 곳이기도 합니다.  90% 이상이 산간으로 이루어져있어서, 식량난 이후 대부분의 산간을 개간하여 김일성 유적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산이 황토 빛 민둥산입니다. 
북녘의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수도는 평양특별시이며 9개 도로 나뉩니다. 평양은 서울에서 육로로 1시간 30분 정도 차를 타고 달리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입니다. 중국 국경과 인접해있는 곳은 함경북도, 양강도, 자강도, 평안북도입니다. 대한민국과 인접한 곳은 강원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입니다. 강원도에 있는 개성직할시는 2005년부터 개성공단이 가동되고 있으며 현재 46,284명의 북녘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즉, 남녘의 산업 기술과 북녘의 인력이 협력하는 장이 되고 있습니다. 황해도는 북녘 땅에서 평야가 가장 많은 곳입니다. 경지율이 북녘에서 가장 높은 약 14%를 차지하고 있어 황해도민을 ‘띵해도’라고 부를 정도로 성품이 느긋하고 인심이 후합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군사분계선을 넘지 않는 한 대한민국으로 올 수 없고 중국 국경으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탈북하는 사례는 5% 정도 수준입니다.  

아래 표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출신 지역과 탈북 동기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이 표를 보면서 그들의 고향과 생활 환경을 위해 중보해주셨으면 합니다. 많은 북녘주민들이 생활고와 가족 해체로 인해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기아로 가족이 죽거나 헤어져야 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헤어진 가족이 다시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간의 삶을 공유할 수 없으며 마음과 몸이 떨어져 있었던 상처로 인해 또 다른 불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북녘 출신지역별 유형(2009.10 기준)

탈북 동기별 유형(2009. 10 기준) 

 

저와 함께 생활한 탈북 소녀의 이야기로 오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 소녀는 8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곡식을 구하기 위해 며칠 있다가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녀는 나이 어린 동생과 이모님댁에 맡겨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살아남기 힘든 ‘고난의 행군’시기이기 때문에 더부살이 하는 입은 천덕꾸러기 자체였습니다. 추운 겨울 그 소녀와 동생은 감자창고에서 잠을 자고 식사 때가 되어야 방어 들어가 풀 죽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늦은 밤 배가 너무 고픈 동생이 누나에게 썩은 감자를 가리키며 ‘누나 나 이거 하나 먹으면 안되나? 배가 너무 고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썩은 감자로 배를 채우려는 동생이 불쌍하지만 자존심이 상해 매몰차게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모가 아침을 먹으라고 소리쳤지만 평소와 달리 동생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의 소녀는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동생에게 썩은 감자라도 실컷 먹일걸, 나 때문에 동생이 죽은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오는 날 그 소녀는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다시 만난 엄마에게도 그날 밤 일을 말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마구 울었습니다. 만약 엄마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속상해하시고 이모와 싸웠을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울었습니다. 지금 그 소녀의 나이는 16살, 한창 엄마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조잘거릴 철모를 소녀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엄마를 먼저 걱정하는 애 어른 소녀입니다.
기도해주십시오. 나이에 어울리는 건강한 사춘기를 경험할 수 있도록, 헤어진 그 시간 동안의 상처가 주님 안에서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도록, 이들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유시은 자매는 연세대에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Johns Hopkins Bloomberg School of Public Health에서 Post-doctor Fellow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