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사역 Q&A


십일조는 꼭 지역 교회에 바쳐야 합니까?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왕에게 자신이 전쟁에서 탈취한 재물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성경 안에서의 십일조의 역사는 시작됩니다(창14:18-24). 야곱도 역시 벧엘에서 돌단을 쌓으면서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언약하는 장면을 창세기에서 볼수 있습니다(창28: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고대 문명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이런 믿음의 조상들의 행동을 통해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유래나 특히 제사와의 관계에 관한 측면에 대하여는 정경 외의 전문 지식이 없으므로 이곳에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십일조에 관한 내용 가운데 핵심적인 부문 몇 가지만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서야 비로소 십일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년 십일조를 바치고, 그 바친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기쁨으로 먹으라고 하십니다 – 희생 제사 식사(신14:22-27). 동시에 함께 유하는 레위인들, 곧 기업을 따로 받지 못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고 하는데, 이런 행위는 하나님 경외함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매 3년마다 각 성에 십일조를 쌓아 두어 레위인이나 고아와 과부들과 같은, 자기 몫을 생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충만히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십니다(신14:28-29). 그러면서 레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나머지 11개 지파가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를 가지고 살라고 하십니다(민18:20-29) . 그것은 그들의 노동, 곧 하나님의 제사를 수행하는 일에 대한 대가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매 3년마다 바쳐야 하는 십일조에 대하여만 언급하고 있습니다(신26:12-15). 그런 후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함과 동시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히스기아왕 때에 잠시나마 다시 부활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총 유동적 재산의 십일조를 드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대하31:2-8).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십일조에 관하여는 두 가지 불확실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십일조를 매년 드리는 것인지, 매 3년마다 드리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히스기아왕 이후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느혜미야는 십일조를 매년 바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봅니다(느10:35-39). 반면 아모스는 3년에 한 번 드리는 십일조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암4:4). 둘째는 십일조의 용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십일조는 확실하게 하나님께 바친 이후 레위인, 과부, 고아 및 체류인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음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십일조를 바친 사람까지도 자신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서 함께 즐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그룹들 간의 분배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무엘상에 보면 이스라엘 왕을 세울 경우 십일조가 왕에게 바쳐지게 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삼상 8:15-2). 오늘날과 비교하면 이는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세금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레위인들에게 주게 되어 있던 십일조의 일부도 그들의 수고에 대한 대가, 즉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한 대가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도 동일한 개념입니다(고전 9:3-5). 십일조는 또한 생활의 부족함이 있는 자들을 위함임도 분명합니다. 단, 이때의 부족함이란 자신의 게으름이나 잘못으로 인한 부족함이 아닌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으로 오면서 십일조의 참된 개념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어지는데, 이는 곧 청지기의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타락한 유대교의 십일조에 대한 관행을 모델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지도층은, 그것이 종교이든 정치이든 관계 없이, 모든 것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해석하고 집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의 중요성 그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율법의 참된 의미에 대한 이해와 그 실천을 강조하시며 십일조를 그런 테두리 안에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23:23-24). 이는 말라기에서 말하는 온전한 십일조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말3:8-12). 십일조는 단순한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올바로 관리해야 하는 “책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그 물질의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지는 물질을 잘 관리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가장 기본적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십분의 일을 바치는 단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청지기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이 많든 적든 자신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만 쓰고 나머지는 주인의 것으로 계속 간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부를 율법적으로 십일조를 제외한 후 다 자신을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상실한, 마치 타락한 유대교의 관례와 같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제외한 나머지도 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과 “하나님을 위하여 쓴다”는 의미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은 또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십분의 일을 의미하기보다는 수익의 십분의 일 “이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십일조가 매년 혹은 매 3년마다 바쳐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이제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복음이 전파되어 제자들이 양육되는 일입니다. 이를 통하여 정의가 실현되고 진실이 인정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사회 안에서도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하여 십일조를 사용한다는 뜻은 구약에서 수 차례 언급된 것처럼 자신의 능력의 부족으로 생활이 되지 않는 사람들(예를 들어 고아와 과부들)과 또 세상적으로 금전적 보수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들(목회자, 선교사, 선교단체의 간사 등)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뜻 입니다.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십일조를 교회에 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결국 십일조를 사용할 가능성이 항상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십일조를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바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선교사를 지원한다든지, 캠퍼스 간사나 주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선교 사업에 사용하는 것도 다 합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 교회의 유지를 위하여도 기본적인 물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기본적 유지도 힘든 경우라면 우선적으로 지역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역 교회는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기본이 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지역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고 그 지역 교회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관계하지 않는다면 이는 무책임한 신앙관입니다. 교회는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교회의 지체 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이시고 우리가 각 “마디 마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