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사역 Q&A


자유의지와 예정론의 대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의 인식의 폭이 넓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크게 두 가지 장벽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마음의 우둔함”입니다. 이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원죄에 가려져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죄성에 이끌려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거나 감소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진리에 대한 명암(brightness) 을 감지할 수 있는 인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구원받은 자들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의 경우 이 감지 능력은 전적으로 마음의 순수성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하여 결정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생각의 폭이 좁은” 결과입니다. “생각의 폭”은 어떤 현상의 넓이와 깊이를 보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생각의 넓이”는 한 현상의 원인에 대한 이해와 또 그 현상의 파장에 대한 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생각의 깊이”란 그 현상을 원칙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의 폭은 세상적 공부를 통해서만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많은 생각/묵상을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만의 세상을 넘어설 때야 비로소 진리를 진리로 볼 수 있게 되지만 이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의 폭을 확장하는 데 있어서는 물론 외부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이는 결국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끊임 없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 즉 묵상과 기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고정관념이 너무 깊게, 또 오래 간직되어질 때 점점 더 생각의 폭이 제한을 받게 됩니다.


진리는 유일하며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각기 다르다고 해서 진리가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의 우둔함과 생각의 폭의 차이 때문에 성경을 여러 가지로 풀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적인 생각이라고 해서 꼭 진리에 더 가까워지거나 생각의 폭이 넓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생각 없이 사상의 유행을 따라가는 자들의 생각을 진보적인 생각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릴 때 일찍 받아들여 자신의 생각이 형성되는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며 습득하는 것이 한 사람의 생각이 올바로 정립되는데 가장 귀중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동물들의 이름을 물어보신 하나님의 모습은 아담과 참된 인격적 교제를 원하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궁금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인격적 교제는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미리 정해 놓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능케 하는 동시에 타락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으로 모든 구원 얻을 자들을 “예정”해 두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30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구원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의 표현인 “예정론”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은 위 두 가지 가르침이 다 “진리”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잠시 살펴본 것과 같이 성경은 자유의지와 예정론 두 가지를 다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하지 않게 생각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의 폭”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문제의 해결은 인간의 생각이 시간에 대하여 자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십니다. 시간에 대하여 논하기 전에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모든 것, 모든 상황을 활용하십니다.


Optimum Combination of Sequences of Human Decisions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시간에 구속받으며 계속되는 흐름으로 보지 않고 “짧은 토막의 시간들의 종합체”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짧은 토막의 시간들 안에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하여 결정을 한다고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자유의지의 온전한 표현을 위해서는 각 토막까지 이르는 모든 과거의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토막의 시간에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모든 토막 안에 있는 인간의 지식이 동시에 바뀌게 됩니다. 또한 한 인생의 토막 토막이 이와 같이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토막도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게 됩니다. 바로 이런 토막의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외부적 요소의 자극을 최대한 가하므로 그 토막의 시간의 종합체인 한 인간이 매 토막마다 올바른 판단하기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combination 이후 가장 최고의 combination이 결정될 경우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역사로 굳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외부적 가능한 방법들과 토막들의 최고의 combination 을 통해서도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없도록 예정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바로 이런 굳어진 역사의 토막 토막을 연결하여 통과하는 “의식”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대한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예정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전도서 11장9절에서 청년들에게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모든 일을 하되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판단은 올바른 이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가 심판 받을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매 순간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달려 있고 바로 그 결정에 따르는 행동에 의하여 우리가 심판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매 토막 토막마다 긴장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돌이킬 수 없는 역사로 굳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