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 현장 이야기


시온의 대로(Pilgrimage)


얼마 전 우리는 학교 내에 새로 지어진 교직원 숙사로 이사를 했다. 중국에서 벌써 세 번째 집을 옮긴 셈이다. 아직 건물 주변이 정리가 되지 않아 흙길이고 어수선한 가운데 있지만 집안만은 아내의 억척스런 손 맵시로 단장되어 깔끔하고 아담하게 꾸며졌다. 우리 학교 건축과 교수님들의 설계와 시공으로 직접 지어진 아파트이기에 연길시에서는 보기 드문 세련된 구조가 마음에 든다. 큰 아이 다니엘은 이사 온 날 자기 방을 둘러보며, “아빠, 이 집은 한국 아파트랑 비슷하다. 그지?” 하며 좋아했다. 중국에서 아주 눌러앉게 될까봐 그것이 두려워 이사가는 것을 반대했던 아내도 막상 이사를 하고 보니 새집이 무척 좋은가 보다. 프로판 가스로 온수기를 연결하여 부엌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게 하였더니, 설거지하는 것이 마냥 신나고 즐거워 보인다. 그 동안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드는 찬물에 손을 담그게 하여 거칠어진 손등을 때때로 펴 보이며 “오르간만 치던 손을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어…” 라며 눈을 흘기던 것이 생각난다. 새로 마련한 소파가 너무나 좋은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일부러 앉아보며, “야, 참 좋다. 여보 나 소파 잘 바꾸었지?” 하며 눈치를 보며 내 동의를 구한다.


출장을 다녀오던 날, 연길 공항에 마중 나온 아내가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전전긍긍하더니, 내게 상의도 없이 소파를 바꾸었다고 마침내 실토를 하는 것이었다. 근 10년간 포항서 가지고온 세간사리를 그대로 지니고 살다보니, 여기저기 낡고 고장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냉장고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TV 화면도 찌그러지기 시작하고, 소파는 여기저기 다 떨어져서 보기 싫은 속살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소파를 바꾸자고 그녀가 몇 번 운을 띄웠지만, 아직 앉는데 지장없는 걸 왜 바꾸냐고 일축했었다. 깔끔하기로 유명했던 아내의 눈에 그 소파가 얼마나 보기 힘이 들었을까? 그 동안 참아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집안 정리가 끝난 후, 아내가 아끼는 오디오 세트와 CD들을 마저 정리하고 새로 단장된 거실에서 아내가 틀어주는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스트레오로 듣고 있으니 정말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을 정도로 아늑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10년 전 생각이 떠올랐다.


중국으로 떠나기로 결정한 후, 나는 힘들어하는 아내를 데리고 서둘러 여기저기 중국에 관련된 단기 훈련을 받으러 다녔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강사로 등장한 중국 사역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중국은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나라이니 짐을 많이 가지고 갈 생각을 말고 양손에 가방 두 개만 들고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기가 아끼던 살림들을 모두 버리고 가야한다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 한숨만 쉬고 있었다. 자기의 손때 묻은 가구며 주방기구 오디오 세트 피아노 오르간을 모두 두고 가야 한다니… 그녀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저녁때만 되면 그녀는 가장 센티멘탈한 음악을 골라 틀어놓고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생활과 음악들을 즐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기다가 마침내 엉엉 울음을 터뜨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서 사역을 한다는 어떤 분이 우리가 중국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소문으로 듣고 우리 집을 갑자기 찾아왔다. 아내의 고민을 듣더니, 무슨 말이냐? 가방 두 개만 가지고 가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니 중국을 사랑할 수 없다. 중국을 모르고 그저 허튼 소리들을 하는 사람들이니 신경 쓰지 말고 이 집에 있는 물건은 모두 싸들고 가라. 쓰레기통 하나도 중국에서는 다 쓸모가 있으니 버리지 말고 전부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아내는 힘을 얻어 열심히 이삿짐을 싸게 되었는데, 나중에 중국에 도착해 보니 바쁘게 짐을 싸다가 정말 쓰레기통 안의 쓰레기까지 몽땅 가져왔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의 약한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녀를 위로하시려고 친히 보내신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오랜만에 그 시절을 회상해 본다.



1994년 7 월 11일, 이삿짐 컨테이너가 중국을 향해 떠나갔다. 그 안에는 지난 결혼 10년간 아끼며 가꾸고 쌓아 왔던 우리 가족의 애틋한 살림살이들이 전부 실리어 있었다. 밤 열시나 되어서 끝난 작업 후 차가 막 떠나려고 할 때, 빈집을 한바퀴 둘러보던 우리는 발코니 한구석에 큰 더미로 쌓여진 빈 상자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언젠가 이사갈 때 쓰려고 보관하여 오던 미국서 가져온 온갖 가전 제품들의 오리지널 박스들이었다. 시간에 쫓긴 일꾼들이 미처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모든 이삿짐을 새로 포장하여 실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상자들을 보는 순간 아내는 갑자기 그것들을 모두 싣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중국서 돌아오려면 그 상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삿짐을 가득 실은 차에는 더 이상 짐을 실을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곧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직감했다. 이 빈 상자들이 그녀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 . 떠나려던 차의 문을 도로 열고 나는 이미 실린 물건들 중 몇 박스를 끄집어내리고 빈 상자들을 싣게 하였다. 일꾼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빈 상자 안에 담긴 아내의 울음 섞인 소망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서 우리는 깨어났다. 넓고 환한 사각의 빈 공간 안에 갑자기 남겨진 우리 세 식구는 망연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다니엘이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더니 갑자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것이 배고픔의 울음이 아니라 아이에게 밀어닥친 어떤 불안감의 표출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이를 달랜 후, 주스 한잔을 먹여 학교에 보냈다. 사방을 둘러보던 아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린 이제 몸뚱이 셋과 가방 세 개만 남았군요.”


그날은 다니엘의 마지막 등교일이라 우리는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들고 아이의 학교로 향했다. 포항제철 서 초등학교의 교정은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꾸벅꾸벅 졸며 평화로운 자태로 우리들을 맞이했다. 아름다운 교정과 깨끗한 편의 시설들이 시야로 파고들며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천진 무구한 어린이들이 법석대는 책상 사이를 누비며 과자를 나누어 준 후 작별 인사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교정을 나섰다. 담임 선생이 귀띔하길 다니엘이 줄곧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자기가 4학년이 되면, 서 초등학교로 다시 전학 올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자동차로 아이와 아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사무실로 향하려 하자, 참고 있던 눈물이 사정없이 쏟아지며 운전대의 핸들을 가리우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을 안겨다 준 내 자신이 하염없이 미워졌다.


하루종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 우두커니 책상에 앉아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의 목소리가 의외로 평화스러웠다. 아내는, 오후 내내 심한 상실감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강하게 역사하시며 위로하셨다는 사실을 내게 알리고 싶어 전화를 한 것이었다. 마음의 고통 가운데도 입 속에서 “목마른 사슴”의 찬송이 이상하게 끊이지 않아 그 가사의 귀절이 담긴 성경을 찾아보던 중 시편 42편 5절의 말씀을 주시면서 말할 수 없는 평강으로 채우시더라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도 그 구절을 찾아보고 싶어서 옆에 놓여 있던 성경을 무심코 펼치는 순간, 할렐루야! 어쩌면 이럴 수가—, 바로 시편 42편이 단번에 펼쳐지면서 과거에 줄쳐 놓았던 5절이 내 눈에 튀어 오르듯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나는 눈물이 쏟아지며 하나님의 강한 손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강하고 깊은 위로가 파도처럼 출렁이며 내 영혼 깊숙이 밀어닥쳤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기에 한 순간도 우리를 놓치시지 않으시고 돌보시며 이렇듯 등뒤에서 함께 동행하고 계시지 아니한가? 이런 생각과 함께 그분의 임재하심이 피부 가까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이 구절이 이제 중국을 향해 떠나가는 우리 가족에게 주님께서 친히 주신 위로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다. 앞으로 어떤 고통과 실망의 순간들이 닥쳐오더라도 오직 이 말씀 하나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라는 주님의 애정 어린 당부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날… 포항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 부부는 빈집에서 평화로 가득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의 이삿짐 콘테이너가 학교에 도착하던 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세간에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동역자들이 “아니 M으로 온 사람들이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왔느냐?” 며 나무라듯 말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내는 자기는 필경 이런 곳에 올 사람이 못 되는데 잘못 왔다며 금새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힘들어하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창세기 12장 5절의 말씀을 읽던 중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떠날 때,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났다는 대목을 읽으며 크게 위로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아브라함과 사라가 처했던 어려운 상황과 고민들이 마치 우리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그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 이삿짐이 많다고 반문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대부분 이곳을 떠나고 말았지만 아내와 나는 아직 중국에 남아있다. 아내는 자신이 아끼던 그 살림들이 볼모가 되어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지난 세월을 힘들게 그러나 기특하게(?) 살아내었던 것이다.


처음 정착 당시, 그 동안 살았던 쾌적한 환경을 버리고 조금이나마 열악한 환경 속으로 들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부에게는 행운이었고 좋은 훈련기간이었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히기 쉬운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주님께서 강제로 다스리시며 참 영원한 것을 사모할 수 있는 마음으로 조금씩 변화시켜 주셨던 것이다. 그 시절의 뜨겁고 순수했던 마음이 오히려 그리울 때도 있다. 어떻게 그 시절의 아픔과 어려움을 통과했는지….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일 뿐이다. 중국에서 처음 살던 집과… 94년 겨울을 회상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걸어 내려오면 약 30분쯤 걸리는 ‘뻬이따’라는 곳에 아파트를 얻었다. 연길 시내에서도 가끔 택시 값을 더 달라고 하는 변두리지만, 아파트들이 비교적 새로 지은 곳이 많고 시장도 새로 생기고 집 앞에 버스 종점도 있어서 주거지역으로는 오히려 적당한 곳이다. 저희 학교는 인적이 드문 언덕바지에 우뚝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학교 버스로 학생과 교직원들을 수송하는데, 교통편이 여의치 않을 경우는 걸어서 내려오곤 한다. 저녁 무렵 학교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짙은 안개에 싸인 연길시 전체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다. 연길 시는 맑은 날은 먼지와 바람이 많아 호흡을 곤란케 하고, 비만 오면 온통 진창으로 변하여 보행을 어렵게 한다. 가장 힘든 것은 수도만 틀면 뻘건 흙탕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데, 그나마도 자주 끊어져서 아내를 낙담케 한다. 아내는 지난여름 내내 물과의 전쟁을 치렀다.


이곳의 겨울은 한국에 비하여 한달 가량 빨리 찾아와서 한달 늦게 끝이 난다. 매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운데 단층 벽돌집들마다 달린 굴뚝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다. 겨울만 되면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 연기가 가득 차서 연길시가 ‘연기시’로 바뀌고 만다. 집 근처에 다다르면 길가를 따라가며 시장 바닥의 온갖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양고기 꿰어서 꼬치를 굽는 사람들과 모락모락 향긋한 연기를 뿜는 만두집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조선말을 모르는 한족에게 손짓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하여 만두를 한 봉지 산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퇴근길에 군것질거리를 사 가지고 들어오시던 생각이 난다. 한국서 차를 몰고 다니다 보니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옛 기억들이다. 습관적으로 혹시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뒤를 살핀 후에 아파트 입구로 들어선다. 이곳은 한국서 온 사람들을 전문으로 터는 강도들이 많아서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에는 늘 조심해야만 한다. 현관 앞에 늘어선 자전거 숲을 헤치고 5층까지 칠흑같이 캄캄한 계단을 더듬어 올라간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면 반가운 두 얼굴이 나타난다. 아파트 문이 뒤에서 철컹 닫힐 때 비로소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빛의 세계로 들어선 것을 깨닫고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개화초기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문화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며 편한 생활을 하였던 기록을 읽으며 비판하였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제야 비로소 그들을 이해할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먼저 오신 어떤 분이 이곳에서의 생활은 이론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이곳에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은 자기 집뿐이니 최대한 편안하게 꾸미라고 충고하신 뜻도 이제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맡겨진 직분 때문에 더러는 편안한 생활 공간조차도 가슴속의 찔림이 되어야하는 심령을 우리의 연약함을 내려다보시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새 집에서 첫 날 밤을 지내고자 침대에 누우니, 집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아내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치 집안에 갇혀 지내다가 10년만에 외출을 한 여자의 기분인 듯 싶다. 새 집으로 이사만 와도 이렇게 좋은데 나중에 천국에 가서 우리가 느끼게 될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다. 뒤척이던 아내가 불안한 듯 입을 연다. “여보, 우리 너무 좋은 집에서 사는 것 아니에요?” 아내에게는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안심을 시키며, 비천에 처하든 풍부에 처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이든 일체의 비결을 배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었지만, 내심 어쩌면 아내의 말이 옳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안락함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믿는 자들의 인생을 나그네길이라고 말한다. 크리스천은 이생의 장막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영원히 거할 주의 장막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하신 것이 생각난다. 오직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사셨던 분… 그분에게는 이 세상에는 마음둘 집이 없었다. 어디로 가든 그를 따르겠다고 나서는 제자들마저도 그분의 마음을 위로하여 빼앗지는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나그네길에는 항상 눈물 골짜기가 기다리고 있으며, 그곳을 통과할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고 오직 성령만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 이후에는 반드시 천국의 영광이 따라온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주님, 이 밤에 오직 주의 궁정에 거하기를 사모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저에게도 주시옵소서.(2002.2.2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pilgrimage)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편 8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