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 현장 이야기


옛 술과 새 술


(1)


중외합작 대학으로서 중국측 조선족 교직원과 함께 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 학교의 형편상, 대내외적인 행사 때마다 만찬 석상에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그런데 그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술잔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외국에서 건너온 우리 학교의 외방 측 교직원들은 한결 같이 지독한(?) 예수쟁이들이니 술을 입에 댈 리 없고, 추운 지방에서 독한 술을 입에 달고 생활하던 조선족 분들은 으레 끼니 마다 반주를 곁들여야 하는 것으로 풍습을 지키고 있으니 양 진영의 문화적 이질감이 심각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곳 조선족들의 술 습관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예전에 술꾼으로 행세하던 경험이 있는 나에게도 가끔씩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들이 연출되곤 한다. 보통 조선족 사회에서는 대략 점심시간에 식사하러 나가서 얼근히 취한 후에는 집에서 한 두 시간 휴식을 취하고 들어오거나 내키지 않으면 아예 샤발(중국말로 퇴근이라는 뜻)을 해 버린다. 그러니, 우리 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한국식으로 점심시간을 정확히 지켜가며 일을 하는 풍토 자체도 그들에게는 쉽게 받아 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초창기에는 자기들끼리 식사하러 나갔다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들어오던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일과 시간에 술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또한 느끼기에 그 버릇들은 시간이 감에 따라 차차 고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처럼 만에 함께 하는 저녁식사 모임이 있을 때에는, 그 동안 억눌렸던 술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듯 외국인 교직원들에게 술잔을 마구 권해오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녀 평등의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익숙해진 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술잔을 돌려가며 차례로 한 마디씩 인사말을 하는 것을 술자리의 예절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호의에 한사코 거절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얄밉고 도무지 되먹지 못 한 족속들로 비쳤으리라는 것도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일단 한잔을 받기 시작하면 옳다구나 덤벼드는 그 술 세례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외방 측 교직원들은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으려고 모질게 거절하기 일쑤이다. 그러니 개교 초창기에는 술로 말미암아 서로 얼굴 붉히고 좌석이 서먹서먹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별히 중국측 부총장이나 당 서기와 같은 나이 많은 영도급(중국에서는 지도자를 영도자라고 함) 인사들이 건네주는 술잔은 거절하기도 민망하여 속으로는 미안한 감정이 여간 쌓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들을 해소라도 할 요량으로 가끔 집에 초대라도 할라치면 또 걸리는 것이 그놈의 술이었다. 이곳의 풍습을 따르자면 손님을 초대해 놓고 술을 내놓지 않는 것과 주인이 술잔을 비워 대접하지 않는 것은 전혀 예의에 어긋난 것이라 하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중국측 부총장과 더불어 타지에서 온 조선족 교수들을 몇 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는데, 밥상을 앞에 두고 술 내놓으라고 몇 번 고집을 피우더니만 기분이 상하였던지 식사가 끝나자마자 횅하니 가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우여곡절 가운데 몇 년을 지내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들이 들어가며 결국은 우리의 술 안하는 습관을 그들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요즘은 억지로 권하는 일도 기를 쓰고 거절하는 일도 별로 없는 걸 보면 쌍방이 술 문제에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셈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나에게 이렇듯 술을 마시기 싫어할 뿐 아니라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 것이 놀랍고 감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독히도 술을 좋아했던 과거를 가진 나로서는 가끔은 분위기를 맞춰주기 위하여 중방측 영도들이 강권하는 술잔을 받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그들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그들을 대하며 그들 역시 속히 술을 끊을 수 있는 힘을 얻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할 뿐이다.


몇 년 전 결국 고혈압으로 쓰러져 돌아가신 중방 측 부총장 강의석 선생이 생각난다. 고령에다 혈압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지나치게 술을 좋아하던 그 분을 대할 때면 안쓰러운 감정이 몰려오곤 하였는데…. 언젠가 그 분과 함께 상해로 출장간 일이 있었다. 늦은 밤 단 둘이 남게 된 후, 틈을 타서 내가 어떻게 술을 끊을 수 있었는가를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신앙 간증을 하고 만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참 놀라운 것은, 술잔을 기울이며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양반이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술자리에서 내게 대한 태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외부 인사와 더불어 함께 식사를 하게 될 경우, 내가 또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을 미리 알고서는 아예 예비지식이 없는 제 삼자들을 향해 웃으며 “저 친구는 우리가 몇 년 동안이나 먹이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독종이야, 독종—. 그냥 우리끼리 하세” 하며 다른 이들이 나에게 술을 권하지 않도록 방패막이의 역할을 해 주는 따뜻함을 보였던 것이다. 상해에서 그에게 전한 복음이 과연 그의 영혼에 어떻게 비추었는지…. 하나님만 아실 일이다.


(2)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깝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세월들이었지만, 나의 학창 시절을 회상해 보면 텅 빈 강의실의 창가에 서서 데모대의 외침과 최루탄 연기에 휩싸인 교정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다가 어둠이 깔리면 학교 근처의 싸구려 주점에 삼삼오오 몰려 앉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무리들 가운데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어두운 모습만이 떠오른다. 캠퍼스 내에서는 내 삶을 전부 바쳐 외쳐댈 만한 어떤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짙은 안개 속에서 휘날리는 연 꼬리를 바라보듯 진리와 사랑의 끝자락을 찾아 허공을 헤매는 생활을 하며 술잔만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10.26에서 5.18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시국에 대학 생활을 해야했던 사람으로서 술꾼들이 항상 토로하는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시대적 변명거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나의 음주 행각은 그 이상의 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 같다. 선천적으로 아무리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는 체질이라 끝까지 남아서 마지막 술잔까지 다 비우고야 일어나는 습성이 붙다보니 결국 온 몸이 알코올에 깊이 찌들어 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더구나 술이 어느 이상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 속 깊숙이 감추어 놓았던 날카로운 비수들이 내 입술을 통해 쏟아져 나오곤 하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것을 즐기며 찾아오는 술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술좌석에서는 항상 인기가 있었고, 그것이 내가 술을 탐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나의 술 행각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가 ‘선험적 술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마셔도 알코올에는 무감각한 이상체질의 소유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그에게는 자신의 주량을 제대로 측정해 볼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술기운이 가져다 주는 일시적 흥분을 그가 미처 맛보기도 전에, 그의 앞에는 팔방으로 기울이고 엎드린 채 무절제한 쾌락 이후에 들어가야만 하는 침묵과 고통의 세계로 침잠해 버린 시체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하면, 그는 술자리에서 방금 전까지 침 튀기며 오가던 온갖 종류의 사회정의와 철학사상과 민중해방의 부서진 말 부스러기들을 어지러운 탁자에서 쓸어 모아 쓰레기통 속으로 처 넣으며 전우의 시체들을 유가족에게 운구하는 힘겨운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축 늘어진 시체를 어깨에 매고 호송 차량으로 운반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보름달이 휘영청 드리우고 있던 자정 녘의 대문 앞에서 탈춤을 추는 기묘한 자세로 엎드려 취면(醉眠)에 빠진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간신히 집안으로 끌어들인 후, 어머니로부터 어렴풋하게 들었던 한탄 섞인 이야기의 내용을 기억해 내었다.


그의 가계(家系)는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이 나는 그런 족보를 지닌 가계였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는 – 그 이전은 그냥 미루어 짐작토록 하라 – 온 동네가 알아주는 모주꾼으로서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취해서 다니다가 말년에 술기운에 실족하여 동네 다리에서 떨어진 후에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그를 이어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조선말 국운이 기우는 것을 한탄하며 망국 이후에는 일체 문밖 출입을 안하고 술만 퍼 드시다가 마침내 술독에 빠져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는 그 대목을 특히 좋아했는데, 술독에 빠졌다는 표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술을 퍼내기 위해 큰 항아리 속을 거꾸로 더듬다가 처박히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비유적 표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표현이 지니는 이중적 묘미를 상실할까봐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일종의 돌연변이가 발생했는데, 그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나타난 두 분의 형제가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분이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본즉, 그 형제는 어린 시절 당신들의 어머니가 – 그러니 그에게는 증조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 지아비의 술 행각 때문에 너무나 고생하는 것을 뒤에서 눈물겹게 바라보다가, 우리 형제는 평생 입에 술을 대지 말자는 비장한, 일종의 도원결의(桃園結義) 같은 것을 했다는 것이었고, 그 결과 그 두 분은 술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하여 국내외 학계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이 되셨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대목에서 그의 어머니는 그러니 너도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계를 통해 흐르는 술의 계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윗대에서 한 박자 쉬었던 여세를 몰아가며 4형제가 사회 각층에서 알아주는 거포로서 맹활약을 벌이게 된다. 물론 그의 아버지 역시 당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당신이 학자의 길을 포기하면서까지 술꾼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뼈 아픈 시대 상황, 즉 6.25 전쟁과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변명을 술기운이 오름에 따라 벌겋게 늘어 놓곤 하였다. (자전소설 중 발췌)



그 당시에 나는 일주일에 닷새 가량을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되니 거의 체력이 닿는 데까지 마셨던 것 같다. 그나마 며칠씩 건너뛰는 날은 평소에 폭음을 하던 연고로 술병이 나서 쉬었을 따름이다. 그런 동안에도 나는 끊임 없는 술의 예찬가였을 뿐 아니라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내가 그토록 술을 퍼부어 대었던 것은 내 마음 가운데 커다랗게 뚫려있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때 교회 생활을 통해 천국의 안식을 맛보았던 나에게는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의 마음처럼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가슴 속의 텅 빈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한 무렵에도 이미 나는 알코올 중독의 초기적 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매일 저녁 술을 마셔야만 정신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오히려 온몸 구석 구석에 퍼져 있던 알코올 기운이 빠져 나가면 갑자기 찾아 오는 무력감과 초조감이 엄습하였고 손이 떨려서 커피 잔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체력의 소진으로 인한 불면증에까지 시달리게 되었다. 어쩌면 그와 같은 고통이 교만할 때로 교만해져 있던 나를 절망이라는 벼랑 아래로 내몰아 치기 시작하였고, 망각 속에 까마득하게 밀려나 있었던 하나님의 이름을 어슴프레 다시 떠올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도 생각된다. 어찌 되었건 예수 믿는 아내를 만나 내 생활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회복되어가던 무렵, 나는 지독하게 술 권하는 한국 사회를 떠날 수 있는 행운을 잡게 되었고 그것을 아쉬워하는 술꾼들의 마지막 고별주의 세례를 온 몸에 뒤집어 쓰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던 내가 미국 생활 3년 만에 완전히 예수쟁이로 돌변하여 돌아오니, 과거의 추억을 싸 짊어지고 내가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하던 술친구들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때로는 실망을 너머 조롱과 분노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을 떠올리면 곧바로 술을 연상하던 그 친구들이 한결 같이 의아해 했던 것은 어떻게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안 마실 뿐 아니라 아예 마시고 싶은 생각조차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더구나 내가 단순히 술을 마시기가 싫어진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강권함에 못 이겨 조금이라도 마시게 되면 내 몸이 전혀 그것을 받아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 역시 변해버린 내 자신의 모습이 그저 놀랍고 신기하여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술을 안 마시게 된 것이 내가 믿게 된 종교의 계율을 지키기 위하여 마시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금욕적인 생활을 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도 참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도행전을 읽던 중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세례를 받고 거리로 몰려나온 성도들의 갑작스런 변화를 보고 사람들이 새 술(new wine)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장면을 접하고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결국 내가 술을 못 마시는 체질로 바뀌어 버린 것은 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새 술에 취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예수 안에서 성령 세례로 완전히 취한 상태로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과거에 그토록 목 말라 하던 옛 술이 필요치 않을 뿐 아니라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할 수도 없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제 내가 마신 새 술은 취기가 없어질 때 마다 자꾸 마셔야만 하는 옛 술과는 달리 내 뱃 속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솟아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취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보니 문득 다시 한 번 깨달아지는 사실이 있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나는 오직 술 취한 상태에서만 온몸에 열이 날 뿐, 술이 깨고 나면 온몸에 식은 땀을 흘리며 마치 냉혈동물처럼 다시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던 것이 내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온몸의 체온까지도 따뜻하게 바뀌어 버린 것을 늘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그것은 이제 내 안에 오셔서 항상 함께 계신 성령께서 새 술의 기운으로 더운 열기를 늘 발하고 계신다는 물리적인 증거를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장 18절)는 말씀처럼 세상의 좋다하는 어떤 술도 채울 수 없었던 내 영혼의 갈증을 예수라 하는 새 술이 완전히 채워 주었으며, 내 몸 속에 쌓여 있던 옛 술의 온갖 노폐물들을 다 몰아내고 진정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치유해 주셨던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도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던 이방인들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 옳았던 것이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말하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장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