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 현장 이야기


우리들의 사랑으로


지난 12월 15일 저희 대학 모든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함께 모여 찬치를 벌인 YUST 가족 연말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 공연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장장 3시간이나 진행된 공연이 숨죽이며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교직원 자녀들의 깜찍한 중국 경극 춤에서부터 대학생들의 현란한 현대무과 조선무용, 창작극, 합창, 난타, 기악 밴드부, 한국 교환학생들의 감동적인 워십 댄스와 우즈벡-카작-러시아에서 온 고려인 유학생들의 놀라운 스텝 댄스, 영어권 회화 선생들의 기발한 ㅎㄴㄴ 찬미 스킷과 중방 교직원들의 공산당 찬미 혁명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마침내 가장 인기를 끌었던 교직원과 사모님들이 함께 어우러져 연출한 쇼킹한 댄스무대, 등… 국제화 대학의 특색과 21세기의 퓨전 감각을 최대한 살린, 어느 하나도 놓치기 아까운 절목(프로그램)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특별히 이번 공연은 그 동안 매년 진행되던 학생회 주최의 세속 축제와 아내가 주도하는 조금은 성스러운(?) 작은 음악회가 하나로 어울어져 성과 속의 만남을 이루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었습니다. 무대도 학교 강당에서 벗어나 연변 예술극장의 큰 무대로 옮겨서 전체 교직원과 학생들이 한마음으로 만날 수 있도록 계획이 되었습니다.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보이지 않는 많은 영적 어려움들이 숨죽이는 기도 가운데 해결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공연 전체가 아내의 작품(결국은 하나님의 작품이었지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뒤에는 프로그램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고 연출한 그녀의 손길이 닿아있었습니다. 축제의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공연이 끝나고 난 뒤 학생들과 교직원들로부터 격려와 감사가 가득한 연말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신입생 중에서는 그날 밤 자신들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황홀한 분위기 속에서 마치 천국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고 고백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문화의 황무지와 같은 이곳에 찾아와 개간을 시작한 지 8년만에 그 열매들이 이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아내의 남모르는 수고와 눈물들이 서려 있었습니다. 아내의 첫 수업의 충격과 답답함…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아도 묵묵부답… 음표는 한번도 본 일이 없고, 소학교 때 도레미파솔 대신 1,2,3,4,5 숫자로 표기된 노래를 배운 기억밖에는 없다는 아이들… “우리는 골(머리) 속에 음악 세포가 없어서 안돼요.” 라고 고개를 흔들던 그들을 붙들고 도레미를 가르치기 시작한 이래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는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학생들에게 어쩔 수 없이 유행가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의 비참한 심정… 그러나, 바하를 치던 손으로 과거에 한번도 쳐본 일이 없던 찔레꽃, 소양강 처녀 같은 흘러간 유행가를 피아노로 치기 시작했을 때 아이들의 얼굴에서 조금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힘을 얻던 일… 그러다가 문득 생각한 노래가 해바라기라는 가수가 불렀던 “사랑으로”라는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부르다 보니 그 노래의 가사가 마치 연변으로 찾아간 우리들의 상황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아 그 노래를 무슨 복음성가나 되는 것 같은 심정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일…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노래에 감정을 실어서 피아노로 치기 시작하자 닫혀있던 아내가 먼저 마음이 열리면서 감동을 받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네…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이 가사를 부르며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칠 때 아내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감동과 은혜로 결국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마음이 학생들에게 전달이 되자 아이들의 얼굴에서 감정이 일어나고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이 노래는 연변과기대의 모든 학생과 교직원들에게 제 2의 교가처럼 불려지며 모든 행사 때마다 한번은 불러야만 하는 마침의 노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 연말 축제도 마지막에 전 가족이 다함께 일어나 손에 손을 마주잡고 흔들며 “사랑으로”를 부름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던 것입니다. 올 해 2002년에는 개교 10주년을 맞이하는 큰 잔치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제 연변과기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게된 “사랑으로” 노래를 기념하며 해바라기를 초청할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눈물이 서린 지난 8년… 특별히 많이 힘들고 가슴이 아팠던 중국에서의 첫 겨울을 회고해 봅니다.



<중국이라뇨>


중국이라뇨? 나 같은 사람이 중국에 가다니요? 하나님, 세상에 이런 법이 다 있습니까? 우리보다 훨씬 더 믿음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우리가 가야 합니까? 더구나 저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는데… 교회에서 반주 잘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제가 왜 그곳에 가야합니까?


매일 아침 눈물로 외쳐대며 부인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어느새 나는 이곳 중국에 와 있다. 그리고 흰 눈으로 뒤덮인 이 황량한 시골길을 덜컹거리는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몇 시간을 이렇듯 하염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기도로써 그분께 항거하려 했던 내 자신의 모습이 가련하게 떠오른다. 애초부터 승부가 뻔한 게임이었는데…, 그 때는 왜 그렇게 힘겹게 버티려 했는지…, 그분의 내려치심을 당하기까지 고집을 부렸던 얍복강가의 야곱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 그토록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으면, 나 역시 고집을 꺾지 못했으리라. 지금도 힘이 들 때마다 이곳에 오게 한 책임을 물어 남편에게 퍼붓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주님께서는 나를 친히 부르셨다는 사실을… 내가 단지 부르심을 받은 남편을 따라만 와야 했다면, 아마 나는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허물어지고 나서…,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한동안 오히려 후련하였다.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애쓰던 것들을 그분의 힘에 의존해서지만 잠시라도 놓고 보니 홀가분하기까지 하였다. 남들이 놓지 못하는 것을 버렸다는 것 때문에 약간은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놓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순전히 착각에 불과했다. 사역지에서는 조금은 무뎌질 줄 알았던 내 자아가 내 욕심이 내 이기심은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만 같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왜 이리 힘들게 반항하려 하는지?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조금씩 죄여 들어오는 포위망을 느끼면서,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게 주어진 일이며 내가 이곳에 온 까닭임을 알면서도 오히려 나는 제발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정말 가기가 싫었다.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싫었고 더욱이 그렇게 먼 곳으로 혼자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다니엘을 핑계삼아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가지 말게 해 달라고…, 그런데 나는 또 져서 이렇게 떠밀려 가고 있는 것이다. 차창밖에 보이는 눈 덮인 벌판이 너무나 시려서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희뿌연 서리가 시야를 가렸다.


처음 그 곳에 가던 날, 그 전날 하루종일 치마고리를 붙들고 울며 따라다니며 가지 말라고 졸라대던 다니엘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사내 녀석이 왜 그리 눈물을 짜냐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내심으로 불쌍한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아직 이곳에 적응도 채 못한 아이를 두고 하루종일 타지에서 보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히기도 했다. 그런데 웬 주책인가? K부장을 따라 W교회에 들어가자 내 격한 감정은 사정없이 나를 휘몰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나를 기다리고 모여있는 수십 명의 예비 반주자들 앞에 세워지고 누군가가 내 소개를 하는 동안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 없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나님 어쩌자고 이 못난 사람을 이곳까지 부르셔서 사용하시나이까?


동북 3성의 처소 처소에서 교회 반주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그들.., 내가 치는 피아노 건반의 한음 한음에 감격하며 내 말을 경청하는 이들.., 나는 그들로 인하여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내 못된 감정이 비비꼬이며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곳에 와서 이 고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쯤이면 한창 크리스마스 프렐류드 준비로 바쁘고 연말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지낼 때가 아닌가? 힘들었던 교회 성가대의 연말 행사 준비도 마냥 그립기만 하다.


그 무렵이었다. 작년 2월 세종 문화 회관에서 화려한 독주회를 마치고 포항으로 돌아온 직후, 남편을 내게 첫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떠나자고…, 그 때가 아마 내 생애에서 가장 절정의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하필 그때 남편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로 나를 당황케 했었다. 그리고 설마 했던 그의 말이 현실이 되어 나는 지금 피아노의 ‘도’ 음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딩동거리며 목청을 돋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가? 주님! 당신이 진정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나에게 오르간 음악을 배우게 하시고 그토록 자랑스럽게 당신을 위해 봉사하게 하신 후에 왜 나를 이곳까지 끌어내리시는 것입니까? 아마 나는 다시는 옛날 그 자리고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그와 같은 상상이 현실 자체보다도 더욱 나를 무섭게 짓누르며 힘들게 만든다.


교회에서 전도원들과 함께 하는 식사, 불결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식생활에 속으로 눈살을 찌푸려 보지만, 그들의 티 없이 묻어나는 정성과 사랑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움츠러든 나는 얼굴에 헛웃음을 가득 채운 채 감사하게 밥술을 뜬다. 혼자만 깨끗한 체 온갖 깔끔을 떨며 유난을 부리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마 이 장면을 보면 까무러칠는지도 모른다. 구토가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가며 말로만 듣던 그들의 화장실 문화를 체험한 후, 인력거를 타고 논두렁길을 빠져나온다. 사람이 다 채워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온갖 생각들이 오고 간다. 어제 산을 넘는 눈길에서 버스가 낭떠러지로 떨어질뻔 하였던 순간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아찔해진다. 정말 중국이란 곳은 내가 싫어하던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갖추고 있는 곳이다. 평소에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샘통이다 하고 놀려대기 딱 알맞은 곳이다. 누더기를 걸친 냄새나는 남자들이 하나 둘씩 올라타서 옆자리를 빽빽이 채워가더니, 마침내 버스가 떠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곳 사람들은 버스만 떠나면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이 담배를 붙여 물고 꾸역꾸역 매운 연기를 뿜어대는 것이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무릎을 시리게 하는데, 창문은 어떻게 연단 말인가? 아예 눈을 감고 있자니 통곡을 하고픈 심정이다.


침대에 누워 하루의 일을 돌이켜 본다. 이렇게 안락한 침대에 내가 누워 있다는 것이 좀처럼 실감이 가지 않는다. 이곳은 바깥과는 무관한 별세계인 것만 같다. 한국서 쓰던 물건들은 거의 다 싸들고 왔고, 몸살이 날 정도로 오기를 부려가며 한국서 살던 집과 유사하게 꾸미려고 안간힘을 쓴 덕분에 집안에만 있다보면 잠시 잠시는 중국에 와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도 한다. 다 버리고 왔다고 하였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안팎으로 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듯 안식할 수 있는 것은 이 편안한 침대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분께 감사한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의 품에 돌아올 수 있도록 매순간 동행하신 그분의 자애로운 숨결을 비로소 느끼며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져든다. 부활의 새 아침을 고대하면서….(1994.11.30)


중국에서는 아내를 “애인동무”로 부릅니다. 한국이나 미국서 계속 살았다면 아내를 그저 “집사람” 혹은 “wife”로 생각하며 그렇게 살았을 나에게 중국으로 오는 바람에 이제 평생을, 마치 연애할 때 서로 다투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지만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아내를 “애인”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하신 것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내가 돕는 배필에서 이제는 동역자로 함께 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