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수5:15).


들어가는 말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라는 연재 칼럼 중, 지난 회까지는 미국에서 직장을 찾고자 하는 경우에 어떻게 준비해야 될 것인가에 관하여 생각하여 보았다. 이번 회에서는 이제 이미 job offer를 받고서, 미국에서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고자 할 때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될 것인가에 관하여 논의하여 보기로 하자.


본 칼럼을 몇회에 걸쳐 연재로 쓰는 중에, 미국에서 직장을 얻기 원하는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몇몇은 본 칼럼에서 도전 받고서 미국에서 직장을 얻게 되었다고 감사를 표명하는 형제자매들도 있다. 감사한 일이나, 본 칼럼을 통하여 내가 분명히 해두고 싶은 점이 있다. 본 칼럼은 미국에 이민을 하거나, 또 직장을 얻은 것이 더 좋다 또는 싫다는 식의 혹자가 말하는 ‘극단적인 친미주의나 반미주의’ 또는 ‘국수적인 민족주의’등에 관한 논쟁은 나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확실히 해두고 싶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거역할 수 없는 새로운 이민 생활과 외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야 되는 고민스럽고 절박한 문제를 신앙의 눈을 통해 조명해 보고 싶을 뿐이다. 새로운 땅을 바라보며, 여호수아가 경험하였던 고뇌를 생각하며, 미국에 유학하는 한국 유학생 형제자매의 현실적인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다. 고국에서 직장을 찾거나, 외국에서 직장을 찾거나 학위취득 후에 직장을 찾는 고민은 마찬가지이며, 직장 찾는 방법은 다르더라도 원론적인 상황과 접근은 같다고 볼 수 있다.


여호수아는 거룩할 수 없는 땅에서 신발을 벗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이방족속이 사는 우상과 죄악이 가득한 땅에서 기꺼이 신발을 벗었다. 하나님의 임재로 거룩해지는 어느 땅에서든지, 겸허하게 주님앞에서 종으로서 신발을 기꺼이 벗고, 주님을 참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자만이 새로운 환경에서 승리할 수 있을것이다.


길갈에 세운 열두돌 기념비


다시 여호수아서의 말씀으로 되돌아 가보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서자마자 요단강은 약속처럼 갈라졌다. 얼마나 기쁘고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이었겠는가.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의 가운데에 굳게 섰고, 백성들은 감사에 벅찬 가슴으로 요단을 건넜을 것이다. 지난날 광야에서 수없이 겪었던 고생이 단번에 보상이 된 듯이, 지난 모든 고통들을 이 순간에 다 잊어버렸을 것이다. 아마도 미지의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생업을 위한 새로운 직장을 얻게된 유학생 이민자와 그 가정의 기쁨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할것이다. 그 어렵게 생각되던 job 인터뷰를 잘마치고 job offer를 받아냈다는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할 것이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는 감사에 눈물을 흘리며 주님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감사도 할 것이다. 지난 수년동안 유학생활을 되돌아보면 감회가 깊어지기도 할 것이다. 힘든 학점이수, 연구, 연주 및 작품발표 준비로 마음 졸이며 밤을 세웠던 수많은 날들이 벌써 언제이었나 싶기도 할 것이다. 다시 유학생활의 광야로 되돌아가라면 자신이 없지만, 그 광야의 훈련을 지난 것을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할 것이다. 첫 열매는 하나님 것이라고 설교하시던 목사님의 말씀에 다소 부담을 느끼면서도, 벌써 전문인으로서 받게 될 첫 봉급을 나누어 쓸 계획에 마음이 분주해 진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감사함은 언제나 오래 지속적이지 못하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저들이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키시며, 만나를 공급하시고 저들의 옷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곧 잊어버릴 것을 말이다. 감격스럽게 마른땅을 건넜던 요단강의 기적을 곧 잊어버릴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열두지파에게 부탁하여 요단강 가운데와 길갈에 요단의 물이 끊어진 표징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고, 저들이 자자손손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와 보호하심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 감격의 순간에는, 무거운 기념비의 돌을 지고 나오는 일조차도 기쁜일이었을 것이다. 요단 가운데에 돌을 세워서 표징을 만들고, 또 길갈에 세울 돌을 들고 나오는 열두지파의 대표들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을 것이다. 길갈에 열두돌로 기념비도 세우고, 요단을 마르게 하신 하나님의 능하심을 되새기며 자손에게 이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를 가르치자고 몇번이고 다짐도 해두었을 것이다. 아무리 다짐을 했어도, 저들은 금방 길갈에서 다짐하였던 감사의 맹세를 잊어버리고 만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하는 죄된 본성은 변하지 않은 탓에, 유학생활의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평지에 이르게되면 너무도 쉽고 빠르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습성이다. 새로운 진로의 두려움 때문에, 요단강만 건너게 해주시면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나 하고싶던 감격도 금방 시들해져 버리기 쉽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 속에 힘겨운 유학생활의 광야를 지나, 길갈까지 이르렀던 수많은 크리스천 유학생 선배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지금 보고 있는가?


저들은 요단강을 건널 때 가져가서 길갈에 세워야 할 기념비의 돌을 잃어버리고 간 연고요, 또는 가지고 갔으되 바른 기념비로 세우지 못한 탓일 것이다. 요단을 건너며 가지고 가야되는 돌은 “주께 감사”의 돌이다. 비록 길갈에 세운 돌에 문비로 쓰진 않았지만, 평생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주께 감사”를 그 돌에 새기고, 때만 되면 길갈의 기념비로 되돌아와서 그 “감사”를 되새기며, 주께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헌신”으로 돌을 닦아야 할 기념비가 아니겠는가?


학위와 직장때문에 얼마나 울고 웃었는가? 하지만 이제 그 학위와 좋은 직장을 얻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광야를 지나서, 학위취득과 새로운 전문직업을 얻은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것을 누가 부당하다고 할것인가? 마음껏 감사함으로 기쁨을 누리자. 그러나, 나는 “누구 때문에” 오늘의 새 길을 얻게 되었으며,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게 되는가? 조용히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얻은 답을 길갈의 기념비에 꼭 새겨두고, 게으름과 교만이 싹틀 때마다 찾아와 읽어야 할 기념비가 바로 길갈에 있는 것이다. 자녀들에게도 그 기념비에 적힌 기적과 감사를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요, 세대를 넘어 변함없이 한결같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길갈의 기념비로 돌아가보리라고 다짐해 두자.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는 기쁨도 잠시였다.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긴 하였지만, 가나안 이방족속과 싸우게 될 일이 벌써 걱정이다. 이미 요단강을 마른땅으로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본 가나안 이방족속들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겁을 먹고 있긴 하지만, 언제 저들이 싸움을 걸어올지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광야에서 출생하여, 거친 생활에 잘 훈련된 젊은 용사들이 몇 만명이나 있지 않은가? 지도력이 출중한 여호수아는 다가올 이방족속과의 전쟁에 승리할 전략을 충분히 세워 놓았을 터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 중 할례를 받을 수 없었던 모든 젊은 남자는 다 할례를 먼저 받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 위급한 상황에서 이 얼마나 부당하신 명령인가? 옛날 야곱 할아버지와 그 자녀들이 막내딸 디나로 인하여 히위족속 에게 수치를 당했을 때, 히위족속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고서, 낫기를 기다리던 저들을 습격하여 진멸시켰던 할례에 얽힌 무서운 이야기도 수없이 들어온 터였다(창34:1-31). 지금 상황은 그보다 더 급박한 상황인데, 싸울 수 있는 젊은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가나안 이방족속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용사가 무장하고 밤낮으로 지켜도 부족한 터에, 거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고 며칠동안 낫기를 기다려야 한다니 참 걱정스러운 일이다. 히위족속의 이야기가 자꾸 마음을 괴롭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묘하신 방법이다. 그 분은 항상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살기 위하여서는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아야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합당한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다짐이 먼저 필요했던 것이다. 세상의 온갖 풍요로움을 다 갖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이방족속이 섬기는 더러운 우상들과 타락된 세상욕망 속에 이스라엘 백성이 동화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아니 저들로부터 성결하게, 썩지 않는 소금처럼 구별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가나안 땅을 축복으로 누리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참 주인”이시라는 고백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할례”가 아니였을까?


광야의 유학생활 시절중에는 연구 및 강의조교로 받았던 적은 장학금이라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직장에서 받게되는 거액의 연봉에 비하면, 그것은 참 쥐꼬리만한 것이었다고 생각이 되기 시작한다. 이제 물론 부모님께 미안하게 마음 조리며 받았던 생활비 보조도 더 필요없게 될터이다. 아니 도리어 지금 이미 연로해지신 부모님을 도와드릴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다. 몇 년간 속을 썩이던 고물차도 이제 새차로 바꾸고, 그 지겨운 아파트 생활도 청산하고 정원이 있는 새집도 사 볼 작정이다. 정원은 몇 에이커 좋을까가 궁금하고, 익히 들어왔던 것처럼 집 앞뒤의 잔디 깎을 일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미 보랏빛 장래가 열린 듯이 보인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아직도 미숙하기만한 새로운 땅에서의 직장생활에서 다가오는 모든 어려운 일들을 잘 처리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얻은 직장인데, 성공적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내가 무엇인가 준비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생활은 자꾸자꾸 숨쉴 틈도 없이 바빠져 가고 있다. 점점 기도하기가 재미없어지고, 예배생활이 다소 느슨해진다.


수많은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직장을 얻자마자,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쉽게 빠져버리 거나, 힘든 세상의 일들에 파묻혀 버리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일이다. 이제 세상 속으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파송을 받아 나간 저들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쉽게 빠져 버린다면 어찌될 것인가? 세상에 살되,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동화되지 않고, 어떤 경우에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구별되어, 인내하며 살고자하는 결단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직장을 찾아 떠나는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의 할례가” 아니겠는가?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에 굳게서서, 이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진실한 크리스천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그러한 크리스천 몇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 세상의 도시와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고자하는 결단의 마음으로 세상 속에서도 구별되게 살고자하는 전문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복음은 빛이나고, 그 사회는 아름다워 질 것이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땅에서 할례를 행하였고, 유월절을 지켰다. 이제 점령해야 될 여리고가 가까워져 가고있는데, 여호수아는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게 된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5:15), 여호수아는 그대로 순종하여 행하였다. 이 말씀과 상황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말씀하셨던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와 비슷한 말씀과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을 여호수아에게 다시 하시면서 그에게 용기를 주려 하셨을 것이다.


가나안 땅은 가나안 이방족속이 사는 우상과 죄악이 가득한 땅이었다. 그런데 그곳이 어떻게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심 때문이다. 새로운 이민 생활을 시작하게될 새땅은 어느곳이든 우상과 죄악이 가득한 거룩할수 없는 땅이다. 그러나 우리가 새롭게 정착하며 살 땅이 어느 곳이든, 하나님이 임재하심이 있으면 거룩한 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처럼 우리 모두도 그 거룩한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신을 벗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벗어야만 되는 것이다.


예수 전도단의 창시자인 로렌 커닝햄은 “네 신을 벗으라”는 말씀을 이렇게 풀고 있다.



“맨 발이 되라고 하는 것은 겸손의 표시로서, 나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맨발로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다시 오실 만왕의 왕, 만유의 주되시는 우리 예수님과 함께 열방을 소유할 뿐아니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권세를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이 모든 것보다 가장 큰 특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세상을 취해 이기는-을 약속하셨다.”


이민 생활과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 세상을 취해 이기기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땅을 거룩하게 여기고, 겸손하게 그 땅에서 신발을 벗고 살아야 할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취득학위로 되는 것이 아니요, 진정한 이민생활의 승리는 주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실 때 얻게 되는 것이다. 이민하여 사는 그 곳이 어느곳이든 거룩한 땅이 되게하고, 겸허하게 주님 앞에 자신의 신발을 벗고, 주님을 내 삶의 진정한 주님으로 섬길 때에 승리가 보장되는 것이다.


맺는 말


성경에서 보면, 실패하는 이민자와 승리하는 이민자가 있다. 미국 이민에서도 승리하는 이민 백성(족속)과 실패하는 이민 족속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곳이 어느 곳이든 거룩한 땅이라고 생각하고, 그 곳이 어느 곳이든 주님의 종으로서 여호수아처럼 주님 앞에서 자신의 신발을 기꺼이 벗는 삶은 승리하는 이민자의 삶이다. 그것은 그 간에 수고하여 얻은 전문인의로써의 전문성을 포기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새롭게 허락된 땅에서 더욱 철저히 전문성을 발휘하고, 또 그 전문성을 통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에 아름답게 기여하며, 더불어 온몸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끝내 두고 온 애굽의 기억들을 계속 그리워하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땅에서 기꺼이 신발을 벗을 수 없는 자는, 언제나 떠도는 이민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떠한 이민자의 삶을 살 것인가는 이민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자의든 타의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있는 한국이민자는 지금 자신들이 사는 곳을 어떻게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미국이나 제3국에 새로운 직장을 찾으며 이민을 고려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이여, 어느곳이든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여호수아처럼 살자. 주님이 승리케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