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유학생 이민자의 여리고성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수6:20)”


여호수아서에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그곳 거민과 가축까지 진멸하고서, 여리고 땅을 점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놀랍기도 하지만, 때론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서 여리고를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따라 타국에 정착해야 하는 유학생 이민자들은 그곳 거민을 여호수아에서처럼 진멸해야 될 것인가? 물론 그런 말씀은 아니다.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눈앞에 나타나게될 여리고성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무너뜨려야 될 것인지를 본 컬럼을 통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여리고성은 어디에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에서 새삶 일구기는, 새로운 간척지로 이주해간 철거민의 새삶 일구기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 이방 족속과의 수 없는 전투를 감내하며, 새삶의 터전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앞에 둔 두려운 삶이었던 것이다.


10여년전에 나와 함께 공부하던 유학생동료들은 거의 모두가 고국에서 직장을 얻고 돌아가버렸는데, 나만 홀로 미국에 이민자로 남게되었다고 생각이 되었을 때 가졌던 그 불안함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제 갓 학위를 끝내고, 아직 영어로 말하고 듣기도 자유롭지 못한 그때에, 대학의 조교수로서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학부 Senior 강의를 첫강의로 맡았다. 그 첫 강의 시간에 나 자신이 들어도 잘 이해가 안되는 영어로 횡설수설 한시간을 떠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진땀이 난다.


미국이라는 새땅에서 가족과 함께 새 삶의 터전을 잘 일궈야된다고 굳게 다짐하며 나아갈 때마다, 언어의 장벽, 문화와 관습의 이해부족 및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의 결여는 나를 가장 괴롭히던 장벽이요 넘기 힘든 견고한 성처럼 보였다. 뿐만아니라, 결코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이 장벽과 견고한 성들은 틈만나면 나를 공격하여 낙심하게 만들곤 하였다. 오늘날 이민생활을 시작하는 유학생들이 넘고, 극복해야 할 첫 번째의 여리고성이란 바로 새땅에서 새삶을 일굴때에 우리를 낙심케하는 이런 문화와 환경의 장벽이 아니겠는가? 미국땅에서 새 삶의 터전을 일구는데 있어서, 생업 속에서 극복하고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성은 지금도 수없이 존재하는 셈이다.


뿐만아니라, 뉴에이지 운동과 종교의 다원화 현상으로 여리고성에 살던 거민들이 보여주었던 영적 혼탁함이 이민자들이 사는 곳마다 넘쳐나고 있으며,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사회가 불문율처럼 받아드리고 있는 동성연애의 합법화, 이혼의 범람, 마약의 홍수, 성적타락, 종교의 다원화 및 뉴에이지 운동으로부터 우리와 우리의 자녀를 어떻게 지키며, 어떻게 저 혼탁한 것들로부터 이땅을 자유롭게 할 것인가? 이제 우리가 파해야 할 견고한 두 번째 여리고성은 바로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께부터 멀어지게 할 수있는 이런 영적인 혼탁함이다. 신명기 20장 16-18 말씀에서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이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신20:18)”라고 하셨다.


우리의 실제적인 절망감은 이러한 외적인 영적 타락함을 우리가 쉽게 고칠 수도 또 극복할 수도 없다는데 있다. 물론 끊임없이 이 세상이 이러한 타락함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되며, 하나님이 언젠가는 꼭 회복시켜주시리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영적 혼탁함으로부터 우리를 지킨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내면세계를 어떻게 지킬것인가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생각해보면, 첫 번째 여리고성과 달리, 이 두 번째의 여리고성과 그 거민은 결국 우리 안에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의 혼탁함에 물드는 것을 막기 위해, 여리고성의 모든 거민을 진멸하시도록 요구하셨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으로부터 와서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영적 혼탁함과 죄악의 여리고성과 그 거민들을 진멸하기까지 내몰아야 할 것이다.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서 여리고성의 모든 것을 네 손에 붙였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군사는 여리고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세동안 돌았다. 제 칠일에는 성읍을 일곱번 돌고,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불며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도 만반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을 여리고성의 거민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이적이 무엇인지 꿈도 꾸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 크신 권능으로 드러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상식과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여리고성은 무너졌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의 무너짐을 위하여 육체로 싸우지 아니하고, 그들이 싸웠던 병기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었다(고후10:4-5). 즉 모든 이론과 세상의 지식을 파하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승리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새로운 이민생활 속에서 만나게되는 문화와 환경의 외부 변화에서 오는 두려운 여리고성과 외적 영적 혼돈과 혼탁으로부터 와서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리고성은 오직 하나님의 강력으로만 무너뜨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이민생활속에서 참 자유와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강력을 소유하는 길은 오직 유학생활과 이민생활 중에 부단없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에 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면,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갖게되는 문화와 언어의 장벽에 대한 두려움은 곧 무너지게 될 것이며, 주님의 말씀안에서 내면세계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어 질서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 그분이 여리고성의 진을 파하는 우리의 강력이요, 꿈(vision)이시기 때문이다.


아간의 Integrity의 부재


여리고성 함락의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유다 지파의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취하지 말라고 한 여리고성의 함락과 함께 바친 물건을 취하는 범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된다. 이는 곧 쉽게여겼던 아이성의 첫 공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패하고, 삼십육인이 죽는 징벌을 받게된다. 이 패배는 단순한 것 같으나, 앞으로 다가올 수 없는 이방족속의 도전을 생각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심히 낙심케하고 근심스럽게 하기에 족한 돌발적인 사건임이 분명하였다.


아간은 외투한벌과 은과 금덩이를 보고 탐내어서 그 물건을 장막에 가져다 감추었다. 광야를 지나며 입었던 옷들은 비록 헤어지지는 않았지만, 맵시나 모양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멋있게 장식된 아름다운 외투 한벌을 보는 순간 너무도 입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은덩이와 금덩이를 보는 순간에, 가나안 땅이라는 새로운 이민처에서 새 삶을 일구며, 자녀를 길러야될 가장으로서 아간은 새 출발을 좀더 넉넉하게 해보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몰래 가져다가 자신의 장막안에 숨겨둔 그 귀한것들을 누가 알 것인가? 장막에 머물때마다 수없이 가나안 이민생활의 아름다운 모래성을 쌓고 허물면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아간은 하나님의 베푸시는 기적의 역사를 광야를 건너며 몇번 보긴 하였지만, 다 그건 우연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혹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또 멸시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지파를 여호와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나님께 범죄한 지파와 족속을 찾기위하여, 지파를 뽑고 또 족속을 뽑을 때도, 아간은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를 뽑으리라고 끝내 생각지 못하였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지파 뽑기가 시작될 때에 선뜻 내가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자복하고 나섰더라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실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끝내 아간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하였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탐욕의 죄로 양심의 눈이 멀어버린 탓이었을까? 아간은 끝까지 하나님의 실패를 기다렸다. 하나님이 실수하시기를 말이다. 그러나, 결코 실수하거나 실패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결국 아간은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숨겨둔 것들과 그의 아들과 딸 모든 가족 및 그의 장막의 모든 것들과 함께 아골 골짜기로 끌려가서 불사름과 함께 돌무더기 속에 가나안 이민의 꿈을 허망하게 묻어야 했던 것이다.


탐욕은 죄악에 이르는 디딤돌이요, 멸망으로 이르는 지름길이다. 미국 직장생활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정해진 법과 규범을 준수하며,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을 얻는 것이든지 승진이든지,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이루어가야 하는 사회이다. 복권에 당첨됨이 없이는, 누구도 부정한 방법으로는 일확천금을 얻기가 어려운 사회이다. 아무리 능률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역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법칙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동일하다. 특별히, 미국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요구되는 제일 중요한 성품이 있는데 바로 “integrity”이다. Integrity라는 의미에 꼭 부합되는 한국말을 찾기가 어렵지만, 그 의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정직하고 신뢰할만한 성품으로서 지, 정, 의가 조화를 이룬 성품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아마도 미국에서 integrity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이는 미국 땅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과 세상에서의 삶이 일치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틀림없이 그들이 일하는 직장과 사회에서 integrity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아야만 될 것이다.


불법과 편법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권모술수로 살아남고자 하는 자는 분명히 미국직장에서 결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정직하지 않으며, 진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하며, 바닥이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대학에서도 자기이득에 부합하면 어제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검은 것을 희다고 우기는 미국 교수를 여럿 보았다. 모두가 우둔하며 속아주는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integrity가 결여된 사람이라고 주위의 동료들이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된다. 물론 그런 사람은 언젠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쓸리움을 받는 것을 볼 것이다.


아간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삶속에서 신앙의 integrity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뽑힐때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integrity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온 가족과 더불어 죽음을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을 평가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integrity를 통해서이지 결코 크리스천의 신앙심을 통하여서가 아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자는 다짐은, 즉 세상의 삶속에서도 integrity를 갖자는 말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믿지 않는 자들이 크리스천의 integrity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 아니겠는가? Integrity는 미국 직장과 이민생활에서 필요한 크리스천의 빛과 소금이요, 균형있는 예배와 삶의 열매인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에 더하여, 유학생은 학업에 충실해야하고, 이민자는 이민생활에 충실해야 하며, 이민목회자는 이민자의 영혼을 돌보는데 충실해야 할 것이다. 이 integrity의 결여 때문에, 이민사회와 이민교회,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마도 이 시대에 한국이민 크리스천에게 가장 요구되는 삶은 바로 integrity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끝까지 단창을 잡아라


이스라엘의 회개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아이로 올라가라 하시며, 아이성에서의 승리를 보장하여 주신다(수8:1).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이성의 교훈은 아무리 우세한 힘과 전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땅을 그들의 손에 붙이지 않는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우수한 실력과 전문성을 가지고 새로운 이민생활을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이민하는 그 땅을 하나님께서 저들의 손에 붙이지 않는 한 이민생활의 승리는 결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전열을 가다듬고, 또 아이성 정복의 전략을 다시 세운다. 전략은 성공하였고, 이스라엘이 거짓 패하여 광야길로 도망할새, 성문을 열어놓고 모든 아이와 벧엘족속이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키라 내가 이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수8:18)”하신 말씀에 따라, 단창을 든 그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일어나 성읍을 점령하고 불을 놓았다. 이에 놀란 아이성 사람들이 돌이켜 왔으나, “아이 거민을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수8:26)”라고 기록하고 있다.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키라”는 말씀은 복병이 일어나도록 하라는 신호일수 있기에, 여호수아는 그저 한번의 신호로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켰어도 무방할뻔 하였다. 이미 복병은 일어나 아이를 공격 할테이고, 하나님께서 승리는 약속해주신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여호수아는 아이성의 거민을 진멸하기 까지 단창을 잡아든 손을 거두지 않고 아이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출애굽 후에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때와 비슷하다. 그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아말렉과 싸울때에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그래서 아말렉을 쳐서 파할때까지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게 한후, 그 둘이 모세의 손을 들어 올려서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하였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출17:14)”라고 하셨으니, 지금 아이성을 공격하며 여호수아는 그 때 모세에게 보여주었던 “여호와 닛시” 와 끝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모세가 보여주었던 “최선의 노력”의 신앙의 모범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여호수아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말씀에 따라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이 성취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할 것이다. 미국의 이민생활과 직장생활의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며, 여호수아처럼 최후의 승리가 있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에 있다고 하겠다. 육신적으로는 아프게 저려오는 단창을 든 손을 거두고 싶었을 여호수아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결코 편안함과 안일함에 안주할 수 없었던 여호수아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어진 일을 조금만 하다가도 안되면, 하나님의 섭리로 돌려버리며, 쉽게 포기해 버리는 크리스천의 태도는 여호수아가 보여주었던 진지한 삶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여기서 예수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꼭 자신이 원하는 좋은 결과가 보장된다는 식의 “성공의 공식”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크리스천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들의 삶에서도 유익한 결과를 언젠가는 얻는다는 것은 말씀에 의지하여 장담할 수 있다(히11:6).


이민자로서 주어진 직장의 업무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예배생활에만 열정적인 크리스천이 있다면, 균형있는 신앙생활을 해야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의 중심과 최우선의 위치에 주님을 모시고 또 인정하는 것이야 필수적인 크리스천의 기본신앙이다. 어떠한 상황과 여건하에서도 최선을 다한 후에 얻어진 일의 결과와 응답에 대하여는, 만족할 만한 것이든 아니든간에 주님의 결정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이미 선포되었는데도, 이의 성취를 위한 전략도 없고, 최선을 다함이 없이 게으르고, 또 시간을 아낄 줄 모르는 크리스천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그런 실패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돌리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결코 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크리스천은 무슨 일이든 주어진 사명에 끝까지 단창을 잡았던 여호수아처럼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얻어진 결과가 무엇이든간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충고는 아무리 권면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심은대로 거두기


심지 않으면 거둘수가 없다. 생명의 씨앗 뿌리기가 그렇고, 세상의 삶이 그렇다. 미국은 다민족이 함께 모여사는 melting_pot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안에서 누구도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은 유럽의 백인들이 먼저 이민와서 개척정신을 주장하며 기득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흑인은 노예로 팔려온 선조들의 눈물과 회한과 땀으로 얼룩진 곳에서, 끝내는 인권운동을 통하여 쟁취한 자유와 번영을 주장하며 살고 있다. 중국인은 미국의 동서를 잇는 철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예처럼 팔려온 선조들의 기득권 속에서 곳곳에 차이나 타운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거의 모든 미국의 이민자의 삶속에는 그들만이 주장하는 기득권이 있고,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이민자는 무엇을 가지고 미국의 번영을 누리고 나누며 살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기득권이나 권리가 있는가? 백년전의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은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긍지요 자랑일 따름이다. 1960년대 마틴 루터 킹목사 주도하에 일어난 인권운동의 결실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도 유색인종 분리정책은 많은 동양계 이민자를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미국에 사는 minority들이 그 인권운동에 참여하여 자신들을 희생하며 싸울때에, 우리 한국이민자는 거의 참여함이 없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미국땅에서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득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굳건한 신앙외에 별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별로 심은 것이 없는 곳에서 지금 당장 우리가 풍성함으로 거두길 원하는가? 모든 언론은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거의 없다고 쓰고 있으며, 또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관한 극단적인 발언은 어느 곳에서든지 생존을 즉각적으로 위협하는 폭탄과 같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시안계 이민 유학생들이 직장에서,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인종차별의 벽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유학생 이민 가정들이 넘어야하고 정복해야할 여리고성과 아이성이 수없이 산재해 있음을 본다. 진급에 누락되어 분노하고, 열심히 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 너무 쉽게 해고되어서 낙망하는 동양계 유학생 이민자를 지금도 본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여호와로 말미암는 것이지,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여호수아처럼 끝까지 단창을 잡고 최선을 다하여 살기로 한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가는 이민자 가 깊게 생각해야할 선택이다. 심지 않은데서는 결코 거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