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7년 5월호


며칠 전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어떤 나라에서 일어난 씁쓸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30명이 모이는 어떤 교회의 현지인 목회자가 한국교회의 후원으로 1,000명을 수용하는 교회를 짓게 되었다. 건물뿐만 아니라, 교회에 필요한 물품까지 제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5년이 지나도 교인 수는 변하지 않았고 교회 건물이 들어선 곳이 그 나라에서 가장 큰 회교사원 근처인데다가, 지역적인 문제들을 일으켜 소송에까지 휘말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기자는 이를 교회의 물질주의와 연관을 시켜 이렇게 꼬집는다.


“한국 교회가 여전히 이런 식으로 교회 건물을 지어주려는 근본적인 마음 자세는 바로 이 땅에 커다란 교회 건물이 있으면 교인 수는 자연스럽게 증가한다는 한국적 세속주의 교회 성장론에 근거한다.”(1)


사실 이런 문제는 중국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요즘 한참 열기가 오르고 있는 Back to Jerusalem운동(2)을 비롯해서, 윈 형제가 쓴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이 엄청난 화제가 된 이후로 중국교회에 대한 많은 관심과 기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요지는 이렇다. 이제 세계 선교의 완성은 중국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고, 그리고 한국교회가 잠자는 중국을 깨우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지금 일부 중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보면 물질주의로 오염된 한국교회의 빗나간 열정이 초래한 부작용들로 인해 목회자들이 타락하고, 순수했던 중국교회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실제로 일부 중국교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외국의 대형교회의 영향력 안에 들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소위, 잘만 잡으면 교회 건축은 물론, 평생 사역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란다.


선교가 되었건 목회가 되었건 어떠한 활동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열정을 이끄는 힘이 어떠한 세계관 위에 세워져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반을 두지 않아 물질주의, 성공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오염이 되었다면 그 열정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오히려 복음은 더 가려지고 더 많은 사람이 화를 당하게 되는 법이다.(3) 그렇기에 아무리 큰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인간적인 정욕과 자랑에 근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15 16).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사람들에 대한 평가 기준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만 목숨을 걸고 투자한다. 그렇기에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한다. 헨리 나우엔이 소개했던 장애우 아담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인격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고지순한 절대적 가치는 이미 물질주의의 희생이 된지 오래다. 이런 불균형의 시초는 인류가 범했던 첫 번째 실패의 시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이후 인간들은 아담과 하와가 범했었던 그 열매를 추구하는 일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고, 이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물론 성경의 권위까지도 말이다.


교회 내의 물질주의는 창세기 1장 22절에 나오는 말씀을 이론적 기반으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데, 이 말씀을 가리키며 열매의 당위성만을 주장한다. 결국 이 말씀에 기초(?)하여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그 수단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성공주의로 번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그 폐해들의 증거는 세계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고, 특히 오늘날의 유럽 교회가 말하고 있다. 복음의 근원지였던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은 이미 관광지와 술집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미국 역시 유럽과 마찬가지로 물질이 지배하는 가치관이 용인하는 편안함과 안락함으로 타고 복음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 위기는 한국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인, 한 장로님의 고백을 통해서 절실히 느껴진다. 그 장로님은 미국의 한 유학생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며 이제는 한국이 복음으로 미국을 다시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가 어찌 한 사람의 안타까움에서 나온 고백에 불과하다고 하겠는가? 우리는 어떠한가? 영원을 지켜낼 사명을 가진 우리들이 이 세대를 지배하는 풍조 안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기초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오염시키는 물질주의의 부조리와 그 현상들을 고발하고 성경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 즉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증명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바른 이해이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분이 성취하신 승리에 도취되어 그 권리만을 주장하며, 나아가 우리에게 마땅히 속한 것을 넘겨받는 것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이미 보장된 열매를 보되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신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4)는 마우의 이야기에 절대로 공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경성 최고의 갑부를 따라갔던 심순애를 나무랄 사람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중에는 얼마나 될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2의, 제 3의 김중배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심파극에서조차, 독기를 품고 사채업자가 된 이수일도, 사랑을 뒤로하고 돈을 따른 심순애도 결국 자살한다고 마는 비극을 우리에게 교훈하는데…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아직 답답하다.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권리를 포기했던 사도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본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의 허점을 깨닫고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던 바울처럼, 우리의 생명이 마치고 하나님을 대면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영원하신 말씀들로 건져 올려진 삶(5)이어야하지 않을까?




(1) 뉴스앤조이
(2) http://www.backtojerusalem.com/
(3) 물에 빠져 죽은 오리, 양승훈
(4) 무례한 기독교, 리차드 마우
(5) 참으로 신실하게, 이재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