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1년 3월호


미국서부의 어느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는 B집사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국에 처음 이민 와서부터 줄곧 다니던 이 교회를 이제는 떠나야 할지 아니면 그저 묵묵히 남아있어야 할지 누가 좀 시원하게 이야기라도 해주었으면 싶은 게 요즘이다. 예배를 드려도 설교말씀은 들어오지도 않고 자꾸 시계만 쳐다보는 버릇이 언젠가부터 생겼다. 8년 이상 섬겨오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점점 ‘맛이 가고’ 계시다는 확신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교회선교부에서 총무로 일했던 그는 지난 여름의 단기선교 재정보고서를 훑어보던 중,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지원금에 대한 지출보고서가 어딘가 허술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 연말의 공동회의 때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은 전혀 없었음이 생각났고, 몇다리를 걸친 수소문의 결과, 교회 재정부장과 단기선교 인솔자였던 담임목사님과의 은밀한 공조행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사실 사라진 돈의 액수가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으나 문제의 장본인이 교회의 핵심인물인 담임목사님과 재정부장이라는데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정보를 제공해 준 교인 몇몇은 ‘큰 액수도 아닌데 기도하면서 은혜롭게 넘어가자’는 분위기였다. 자, 이제 그는 어찌 해야 하는가? 정보제공자들은 그저 ‘은혜로운’ 교회생활을 위해 물밑에 남아있기를 원하고, 진상규명을 시작해야 한다면 이제 서있는 사람은 B집사 혼자다. 그 역시 ‘비판하지 말라’는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되뇌이며 묵묵히 기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저, “내가 여깄소”(Here I stand)하고 나서야 하는가?


위의 내용이 충격이었다면 근심하시지 말기 바란다. 상상력을 동원한 픽션이었으니. 하지만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불행히도 우리가 섬기는 교회공동체에는 별로 아름답지 못한 일로 인해 다양한 송사와 분쟁, 쥐어잡는 멱살과 삿대질을 목격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세상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은 그저 고리타분한 설교처럼 들리기만 하는 요즘 세상이다. 우리의 고민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비판하고 바로잡아야 할 문제거리가 생겼을 때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와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예를 들자면 예배마치고 술집과 노래방으로 향하는 청년들에게 리더인 내가 해줄 말은 무엇인가? 혹은 같은 교회집사님들이 사업상의 이유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고 소송이 걸릴 판인데 담임목사는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처럼 산적한 문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때 우리는 어떻게 이를 성경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하는가. 이러한 내용을 잘 정리한 글이 있어 함께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아래의 내용은 송인규목사의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IVP, 1995)라는 책의 일부를 발췌해서 정리한 것이다.


송인규목사는 비판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 (1)비판자로서의 자격, (2)비판력의 발휘, (3)비판의 초점, (4)비판의 목적, (5)비판 내용의 표현 방식의 다섯가지로 요약한다. 그는 이들 요소를 살펴봄으로 “비판자의 행위가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나는 비판자로서의 자격을 구비하였는가, 아니면 미비한가? 저자는 ‘외식'(外飾)(마7:1-5)이나 ‘간섭권부재'(롬14:4; 약4:11-12)의 경우, 비판자의 자격미달로 인해 바람직한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즉, 비판자 자신도 할 수 없거나 스스로도 몰래 행하고 있는 행위에 대하여 공격하는 것은 외식에 해당되므로, 야고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이러한 비판이 아닌 ‘비방'(誹謗)의 문제는 이미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비방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자신의 행동이 남에 대한 간섭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돌이켜 보아야 한다.


둘째, 내가 발휘하는 비판력은 건전한가, 아니면 왜곡되었는가? 저자는 ‘판단력방해'(요7:24; 8:15; 약2:2-4)나 ‘판단근거 불가측'(不可測)(고전4:5)과 같은 경우에는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판단의 근거가 되는 자료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비판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내리는 판단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기가 쉬우며 이는 흔히 우리가 범하는 실수가 된다. 또 우리가 남을 평가할 때 비판자 본인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은밀한 내용에 대하여는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판결하실 때까지 유보해야 한다고 바울은 권면한다.


셋째, 비판의 초점이 행위에 있는가, 아니면 인격에 있는가? 저자는 비판의 초점이 그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그의 행위나 특질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우리는 사람의 행위를 비판해야지 그 사람 자신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비판자는 흔히 비판대상에 대한 그릇된 태도(롬14:1,3)를 갖기 쉬운데, 그 이유를 두고 로마서 14장은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사실상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비판자는 비판이 부당한 항목(롬14:1; 골 2:16)에 대해 비판하기가 십상인데, “사순절 기간인데 어떻게 보신탕을 먹을 수 있니?”라고 비판하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비판하고 있는 항목이 때론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요소가 아닌지 비판자는 확인해야만 한다.


넷째, 비판의 목적이 형제의 유익을 위함인가, 아니면 자기 만족을 위함인가? 저자는 비판의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비판의 동기와 목적이 그릇되면 부당한 비판이 된다고 말한다. 비판은 궁극적으로 상대의 유익을 위하여(히 12:10) 그를 바로잡고(갈 6:1) 세우는 것(고후 14:10)이지 결코 상대방을 파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저자는 John Alexander의 “건설적 비판”이라는 책을 인용하며 비판하고자 할 때는 먼저 스스로에게 다음 사항을 질문할 것을 강조한다. 즉, 나는 왜 부정적인 비판을 표명하고 있는가? 나의 자아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어느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함인가? 보복을 위해서인가, 나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함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사람들을 돕고 우리의 기독교 공동체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인가? 이상의 질문들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비판은 정당한 것이 되겠다.


다섯째, 비판내용을 표현할 때 이를 지혜롭게 전달하는가, 아니면 파괴적으로 임하는가? 저자는 비판에 있어서 또한 중요한 것이 우리가 비판할 때 올바른 표현방식을 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판은 당사자에게 직접(直接) 사적(私的)으로 전달되어야 하고(마18:15), 그의 감정 상태를 가장 덜 건드리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엡4:15). 따라서 당사자의 뒤에서 불만을 토로하고 다른 사람에게 소문을 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비열한 행위이다. 우리는 비판의 대상자에게 사적, 직접적, 동정적인 전달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아니면 공개적, 우회적, 파괴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저자는 건전한 비판력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숙과 발전에 꼭 필요한 것임을 강조하면서도 ‘비판가'(Critic)와 ‘예언자'(Prophet)을 대조하면서 온전한 사랑의 눈으로 형제를 긍휼히 여기며 그의 행복과 성숙에 대한 사랑의 관심 속에서 비판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저자는 아래의 표를 통해 명확하게 그 대조점을 정리하고 있다.


























비판가 (눅18:9-14)

예언자 (단9:3-19)

타인에 대한 자세
남의 약점을 지적하고 자기는 남다르다는 것을 부각시키며 (11-12절), 남을 멸시함(9절) 남보다 옳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며(11-12), 남과 자신을 ‘우리’라고 칭하여 함께 죄인됨을 고백함(15-16절)

활동의 초점
남의 잘못을 지적함 (11절) 상대방이 오류에서 벗어나 변화되고 회복되기를 하나님께 바람(17-19절)

관심의 방향
자신의 번영에만 관심을 가짐 (9,11절) 공동체의 유익과 발전에 관심을 가짐 (16-19절)

마음의 상태
자기 의(義)에(9절) 흐뭇해 함 (11절) 남의 과실을 슬퍼하고 안타까워 함 (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