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1년 2월호

한국교회, 그렇다면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요즘 세간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 이처럼 부끄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밤만 되면 서울상공을 뒤덮는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심정은 이제 그리 편하지 않다. 최근 MBC가 PD수첩에서 방영한 ‘대형교회 세습문제’를 정점으로 불거진 한국교회의 개혁문제. 그렇다면 이제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이다. 한국교회 개혁의 문제는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과제와 직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일찌기 프란시스 쉐퍼가 물었던 질문, “How Should We Then Live”의 문제, 그리고 최근 출판된 척 콜슨의 저서, “How Now Shall We Live”에서 말하는 문제와도 동일하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진정으로 개혁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결국 진정한 교회개혁의 해답은 이 문제의 해답과도 같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넓은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몸을 구성하는 요소는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웅장한 교회건물과 튼튼한 재정, 그리고 교인의 수를 자랑하는 물량주의가 강하게 묻어 있지만 결국 교회를 구성하는 핵심은 사람이다. 사람이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교회도 바뀐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기독교인의 관(觀)이 바뀌어야 한다. 이는 결국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이다.


<목회와 신학>은 지난 10월호에서 ‘한국교회와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이 특집에서 안점식교수는 서구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에 대해서 놀라는 두가지를 지적한다(74쪽). 그 첫번째는 “한국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이고 두번째는 그같은 성장에도 불구하고 “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사회의 각종 분야에 포진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점을 예로 든다. 삼풍백화점 사건이나 옷로비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한국교회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이 질문에서 안점식교수는 교회성장주의가 “상대적으로 성도들에게 성숙과 성화를 강조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겉으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가치체계와 행동양식을 갖도록 했지만 본질적인 부분인 세계관은 변화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교회를 급성장시켰던 요소들이 오히려 앞으로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가로막는” 요소가 될 것임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키워냈던 ‘열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그 ‘잘못된 열심’을 걸러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집 팔고 땅 팔아서 건축헌금 바쳤던 열심. 입시철만 되면 ‘교문에 엿 붙이는’ 수준의 기도의 열심. 목사님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목숨 다해 충성하는 열심. 물론 이러한 열심들 중에서 진정 우리의 신앙을 길러냈던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전통들도 있다. 이는 기도의 열심과 목회자를 섬기기 원하는 마음 등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굳어졌던 이같은 열심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결국 교회개혁을 향한 본질은 우리의 ‘마음(=세계관?)’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내는(롬12:2) 작업이 아니겠는가. 교회개혁을 위한 대안으로서의 쟁점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유교적인 권위주의의 요소가 사라져야 한다.


목사 대신에 당회장이라 불리기 좋아하고,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신’ (막10:45) 주님을 따라 마땅히 ‘종’이라 불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종님’ 또는 ‘위대한 주님의 종’으로 불려야만 만족하는 목회자의 권위의식부터 버려야 한다. 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지도자부터 바뀐다면 강물은 맑아질 수 있다. 유교적인 신분사회가 만들어 낸 서열중심의 구조. 그리고 신분과 직분을 구분하지 못하는 교회의 직분제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야 한다. 교회의 직분은 다만 은사에 따라 주어지는 질서일 뿐이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평신도-집사-안수집사/권사-장로-목사로 이어지는 위계질서를 볼 때 과연 어느 누가 ‘그것은 다만 은사에 따른 배치도일 뿐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질서에 따르자면 평신도는 아직 껍질을 많이 벗어야 할 애벌레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목사의 의견이나 지시에 약간의 이견을 보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같은 교회 내의 ‘신분사회’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한다. ‘만인제사장설’이라는 성경적 관점이 우습게 느껴지지 않는가. 물론 김동호목사가 그의 저서 ‘생사를 건 교회개혁’에서 밝혔듯이 ‘만인목사설’을 주의해야 할 필요는 있다. ‘만인제사장설’은 모두가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목사는 목회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목사에게 주어진 독특한 은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왜곡된 구조로 인해 목사만 성직자이고 평신도는 “속직자”(俗織者)로 인식되는 잘못이 초래되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직자가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가 다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멀고 먼 간극이 분명 존재한다. 진실로 “하나님 다음에 우리 당회장님”인가? (이재록목사와 만민중앙교회만이 아니라 그같이 될 위험이 있는 교회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결국 이같은 문제로 인해 힘있는 목회자를 결정하는 요소가 ‘과연 그가 얼마나 교회재정을 자유롭게 재량껏 사용할 수 있는가’가 척도로 쓰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교회재정관리의 투명성, 그 뿌리는 또한 권위주의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원로목사의 문제와 세습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왜 은퇴했는데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가. 은퇴하고도 계속해서 교회에 남아서 일종의 ‘수렴청정’을 일삼는 모습은 바로 이같은 서열구조의 핵심에서 ‘땀으로 이룩한 교회의 성장을 다른 사람이 와서 망치게 할 수 없다’는 어떤 순교자적인 각오를 낳게 하고, 그것은 결국 우리의 교회를 병들게 했다.


샤머니즘적 요소, 기복신앙을 벗어나야 한다.


한국교회를 병들게 한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샤머니즘이다. 무슨 축복성회 쫓아다니는 열심, 혹은 기도하시는 권사님을 찾아 기도 받고 예언 받으러 다니는 ‘가정제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어떤 면에서 한국교회는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박혀 있는 이 기복적 요소를 십분 활용했다. 삼박자든 사박자든, 이제 축복의 성경적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절실히 요청된다. 성경적인 복의 개념은 풍요와 다산을 골자로 하는 샤머니즘적 복의 요소와 구분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이제 놀라운 경제성장이 가져다 준 일부 한국의 풍요로운 계층에게 기복적 기독교를 들고 찾아갈 때 그들이 뭐라고 응답하겠는가. “난 필요한 게 다 있어요.” 예수 믿고 범사에 잘되고 건강하면 이제 내세의 평안을 위해 준비만 하면 될 것인가? 이같은 샤머니즘적 요소는 목회자들도 병들게 한다. ‘능력의 종’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이는 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닐까. 괜스레 ‘파워’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더 있어 보일 것만 같다. 책에도 ‘파워’라는 말을 넣어야 잘 팔릴 것만 같다. 사람을 끌어 모으는 능력, 병자를 고치는 능력에 따라 ‘큰 종’과 ‘작은 종’이 구분된다. 상대적으로 ‘작은 종’에 해당하는 목회자들은 무력감과 열등의식에 빠지게 된다. 때문에 개업예배를 드려도 담임목회자가 오지 않고 부목사가 와서 기도하면 왠지 교인들은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이 덜할 것만 같아, “목사님, 기도 한번 더해 주세요”라고 부탁해도 부끄럽지 않다. 이제 음식 한상 차려놓고 ‘만배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욕심은 그만 두자.


그렇다면, 이같이 왜곡된 기독교의 모습이 사라지면 교회는 개혁될 것인가. 유교와 불교와 샤머니즘이 뒤섞여 버린 변형된 기독교를 고칠 수 있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암세포가 너무 많이 퍼져버려 갈랐던 배를 다시 덮어 버리고 싶은 심정일 수도 있다. 이같은 개혁을 향한 외침은 진정 ‘남은 자’들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토록 이 말씀에서처럼 느껴지는 적은 없었다. 바로 이사야 6장 13절의 말씀이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소금과 빛의 역할을 온전히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이 땅 한반도에 그루터기로 남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이는 과연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