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1년 3월호

‘갈등’이라는 단어 앞의 수식어구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흔히 고부 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여야 간의 갈등, 혹은 얼마 전에 떠들썩했던 의·약분업시 의·약 갈등 등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의 종류를 그 ‘원인’에 따라서가 아니라 갈등구조를 보이는 ‘대상’에 따라 구분한다는 것으로 봐도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공통적으로 쌍방 간의 이권의 대립이라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각 대상에 따라 무엇을 이권이라 정의하는가는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를 대상으로 갈등을 정의한다면 과연 그 대상은 누구이며 문제되고 있는 ‘이권’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세상사 갈등의 주요소인 금전적 이해관계가 이권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없진 않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내의 이권은 뭐니뭐니해도 영적 권위, 곧 ‘영권’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갈등을 일으키는 대상은 초신자들이 아닌 영적관심사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중견급(?) 성도들, 혹은 목회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내에 목회자와 성도, 목회자와 부목회자, 그리고 성도와 성도 간의 갈등은 어느 교회나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하기 마련이고, 여기서 그러한 사례 만을 짚고 넘어가는 것으로 그친다면 또 하나의 가십거리를 제공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약함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갈등에 대해 갈등의 대립구조 선상에 있는 성도들이 기도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쁘게 역사하심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그 안에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제시되는 사례를 통해 서로 대립되는 갈등의 원인에 대해 살펴보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찾아보기로 하자.


미국 A주의 학원도시 B에 위치한 C교회는 한인교인 총 120명 남짓의, 교인의 40%가 유학생인 유학생교회이다. 교회성도의 평균연령이 40세로 비교적 젊은 성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B지역의 영어권 한국학생들 및 2세들의 기독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돕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할 것을 목적으로 영어예배를 한국어예배와 함께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영어예배 담당목회자의 잦은 전출로 장기적 비전수립에 난항을 거듭하던 중, 1995년 인근교회의 외국인 목사님을 영어예배를 담당하시도록 청빙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어예배를 드리던 성도의 자녀들 중 중·고등부에 등록된 아이들은 한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소수였기 때문에, 영어예배 목사님을 청빙하는데 있어서 지역 내의, 특별히 한국계 영어권 유학생과 교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비전에 합당한 청빙인가에 대한 철저한 검증문제가 성도들 간에 주된 관심사로 등장하지 못했고, 은혜 가운데 인사를 단행한다는 명목 아래 공식적인 절차들을 제대로 밟지도 않았다. 그러나 외국인 목사님을 모심으로 말미암아 영어예배의 구성원이 점점 특정 외국인종(人種) 중심으로 변해가고, 목사님이 한국어를 하실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한국어권 중·고등부 학생들이 드릴 수 있는 예배가 부재(不在)케 되었으며, 그 구성원과 사용언어 측면에 있어서 영어예배와 한국어예배가 융화하는데 어려움이 쌓여가는 등, 문제점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성도들의 중·고등부 자녀의 수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게 되었고 그들이 받고 있는 영적 양육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이 비례하면서, 자녀들에게 한인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영어예배가 한국계 영어권 학생들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향으로 영어예배의 기본 취지를 재정립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한국계 목사님의 청빙에 관한 안건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영어예배에서 목회하던 목사님과 성도들의 입지가 도전을 받게 되었고, 외국인 목사님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영어예배 구성원들 사이에서 인종을 초월한 복음 안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한 당위성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두 개의 대립구도 상에 있던 집단에서 각자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했던 하나님의 말씀 중의 하나가 사도행전 1장 8절, “…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이었다. 한국계 교포 중심의 목회비전을 제시하는 그룹은 먼저 ‘예루살렘과 유대’에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한국계 영어권 학생들과 2세들을 복음 안에서 먼저 양육하는 것이 현존하는 한인교회의 우선순위라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기존의 영어예배에서 양육받아 온 그룹들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는 말씀에 기초하여 다국적 성도들에 의한 예배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구조를 악화시킨 것은 두 그룹 모두 말씀과 기도에 근거하여 각기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과 메시지로 인해 인도받았다고 주장하며 모두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영적 분별력과 권위에 대해 서로 도전을 한 것인데, 이는 대립구도를 ‘상대방에 대한 감정’으로 몰고가는 계기가 되었다. 목회자의 목회·설교내용이 서로를 겨냥한 메시지로 해석되고 이로 인해 상처와 도전을 주고 받게 되면서, 영어예배를 시작할 때의 처음 목회비전을 두 그룹이 함께 되짚어 가며 상대방의 의견을 수렴하여 그 해결점을 모색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방어자적 입장이 너무 굳어지게 되었다. 이 사례의 경우 피상적으로는 서로가 공유하지 못한 비전에 대한 갈등의 구도를 보이고 있으나 정작 갈등을 가속화한 것은 기존 구도에서 만족을 얻고 있는 그룹과 변화를 모색하여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영적 이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룹 간의 ‘영권을 둔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하나님 안에서 너무 견고히 서 있음’으로 인해 상대방의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적이고 훈계자적인 태도를 고집했다는 점이다. “…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8:1)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다.


몇 개월 간에 걸친 대립구도 끝에 외국인 목사님께서 섬기시던 영어예배는 거처를 옮겨서 다국적 학생을 복음화한다는 비전으로 새로이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고, 기존의 한인교회는 목회비전에 합한 한인 1.5세 목회자를 1년 여에 걸친 기도 끝에 청빙하여 한국계 영어권 유학생들과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목회를 하고 있다. 이러한 아픔을 수반한 변화구도에서 다행스러웠던 점은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아름답지 못한 이 모든 모습을 합력시키심으로 선을 이루셨다는 것인데, 상황이 악화되어 갈수록 교회 내에 ‘꿇는 무릎’이 증가하고 교회의 위기에 대한 관심과 회개와 중보의 운동에 불을 붙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왔던 교회 내 부서에 대한 무관심을 회개하고,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다른 영혼들과 상처를 주고 받았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치유하심에 대한 간구, 교회의 목회비전에 합한 목회자를 찾는 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기도들, 자신의 신앙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열린 마음, 또 국적을 초월한 외국유학생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목회활동….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어려움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C교회에 이루신 선한 선물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약한 존재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말씀 안에 바로 서 있느냐에 상관없이 자신의 경험에 의해 하나님을 보게 되고 인식하게 된다. 특히나 자신이 하나님의 반석 위에 너무도 든든히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영적 입지를 자신이 서 있는것과 같은 수준의 반석 위에 놓는데 인색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고 성장을 거듭하는 성도로서 특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렇게 강한 영적자아가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된 자들과의 그것과 이견을 두고 대립할 때 “..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라는 말씀을 상고하면서 서로에게 덕이 되는 해결방안(方案)을 사랑 안에서 찾아가야 한다는, 너무도 원론적인, 그러나 행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해결책을 제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