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1년 1월호

낯설고 물설은 미국에서 새내기 대학선생으로 두번째 학기를 맞이하는 심정이 자못 착잡하기만 하다. 잘 안되는 영어로 강의하랴, 학생들 질문에 대답하랴, 수업준비하랴, 시험문제 내랴, 페이퍼 쓰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한 학기가 빨리 지나갔다. 하루 하루 시간에 쫓기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기를 수십 차례. 그러나 역시 준비안된 불안함은 뭐라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부자연스럽기만 하고, 햇병아리 선생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감에 시달리곤 했다. 게다가 기독교인으로서 전문분야에서 스스로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가면서 소화된 그 무엇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심한 고통이었다. 교회에서는 그렇게도 목소리 높여 마치 온 세계를 내 품안에 품을 듯이 외치던 것과는 달리 삶의 무게에 지쳐 끌려가는 왜소한 자신….


예수를 믿고 의식이 들면서 늘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화두가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의 나의 갈등과 고민들, 그리고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어떤 답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가?
나의 전공은 기독교 신앙과 어떤 관계에 있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소화되어야 하는가?


육신의 나이가 사십이 다 되어가고 신앙의 경력마저 이십년이 훌쩍 넘어버렸건만 유아기적 사고와 행동에 익숙해져 더 이상의 진보가 없는 것이 사뭇 죄스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원인없는 결과가 없을 것이니 내내 무엇이 원인일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본다. 그 원인들 중의 하나는 한국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이원론적인 사고인 것 같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의 삶에서 속칭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은 거룩한 것이고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세상적인 것이라고 구분하게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사고체계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관계들을 분리하기도 하고 힘있게 엮어내기도 하는 근본적인 힘으로서 작용한다.


영혼구원, 주의 종으로의 헌신, 전임사역자와 평신도. 이런 말들은 우리에게 흔히 익숙해져 있는 것들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체계가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존재나 일 자체가 그 중요성이 상실된 채 어떤 고상한 목적을 위해 수단화되어가는 상황들이 우리 모든 인간활동에서 아프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 즉 소명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 온다고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내가 대학을 선택하고 전공을 하면서 겪은 웃지못할 일화이다.


내가 대학을 선택할 때는 예수를 믿은 지 채 이 년도 안될 때였다. 처음 신앙을 시작한 교회는 막 개척을 하며 발돋움을 하는 교회였고 교회성장이 그 교회의 최우선 순위에 있었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균형잡힌 세계관을 제공한다거나 꿈을 정돈해 준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어려웠다. 그때 나는 심각한 육신의 병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거의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교회생활에 열심을 냈었다. 마치 그러한 것이 나를 치료해 주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분께 바치는 최선의 보답이라는 생각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거의 교회에서 일주일의 대부분을 보내는 것으로 일관하면서 자연스럽게 장래에 대한 나의 생각도 교회에서 배운 전도위주의, 교회당 중심적인 사고에 한정되어 있었다. 결국 대학을 선택할 때 나는 대부분의 속칭 ‘열심있는’ 젊은이들과 같이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될 것을 생각하고 심각하게 기도했고 그 결과 부모님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었다. 그래서 차선으로 생각된 것이 성적에 맞는 대학교의 건축과를 선택한 것이다. 오로지 교회를 짓겠다는 일념으로…


대학에 입학하고 난 일 년 후, 교회에 대한 바른 정의를 알게 되면서 이런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그 이후의 대학생활은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게 되었다. 80년대의 시대적인 암울한 분위기와 함께, 역사와 시대 앞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느끼면서 나의 방황은 더더욱 그 정도를 더해 갔다. 참 건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은 이 건축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 가에 대한 질문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그저 회의하고 방황하곤 하였다. 이제는 사회의 중견역할을 해야 할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나는 전히 이 방황의 막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짐작컨대 이러한 스토리는 나 뿐 아니라 우리 한국에서 자라난 대부분의 크리스찬에게 흔히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이것은 다분히 우리 한국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극단적 이원론이 빚어내는 뼈아픈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대한 성경적인 재조명을 통해 그 고리를 풀어가야 할 것 같다. 본란에서는 우리가 재조명해야 할 다양한 영역들 중에서 우리 모두를 제사장으로 부르신 ‘부르심’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하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제사장의 활동영역인 지성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본다. 다음은 내가 전에 관계하던 선교단체의 회보에 기고한 내용으로서 조금 가필했지만 역시 잘 정돈되지 않고 격한 느낌이 있다. 그래도-부끄럽지만-나눠보고 싶다.



지성소, 그곳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가 사함을 받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다. 자기 백성이 지은 죄악의 용서를 위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죽음을 무릅쓰고 흠없는 짐승의 피를 뿌리며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길 기도하는 곳이다. 자기 백성의 죄가 심하면 심할수록 대제사장은 더욱 심각하게 지성소를 거닐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던 것이다.


세상이 악하면 악할수록, 타락하면 할수록 선함과 깨끗함은 더욱 더 돋보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세상의 타락은 우리 인간 개개인의 삶의 자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개개인이 위치한 곳곳이 다 그렇게 죄악으로 가득 차 있으니 어느 누구도 그 더러움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건전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거부감과 아픔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사건 이후 구약율법에서 속죄를 위해 사용되던 성전의 지성소는 그 휘장이 찢겨 버린 후 모든 인간들에게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이제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누구도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게 되었고 구원을 위해 피를 흘리는 공덕을 쌓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 이로써 예수가 대신 이루신 속죄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극약처방이 병든 인간에게 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에서 이 사실을 재천명한 후 수세기가 흐른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만인 제사장의 정신들…. 그 참 정신과 내용은 사라지고 교리의 껍데기만 무성한 듯한 우리의 현실이 못내 아쉽다.


무엇보다도 만인에게 개방된 지성소에 초대된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제사장적인 인식의 결여는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있어 다시 중세로의 회귀를 예고하는 듯 하다. 새로이 등장한 종교승려 계급들과 그냥 평범히 믿으려는 평신도들의 소리없는 갈등. 성경에도 없는 평신도라는 말의 남용과 종교적인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지나친 계급화 및 성역화 등. 최근에 보고되는 목사직 세습 및 교회재산의 사유화는 이 문제의 뿌리를 드러내는 아주 중대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제사장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제사를 다시 드려야 할까? 우리는 다시 종교 공동체를 만들어서 수도원으로 들어갈 것인가? 우리의 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놓고 기도하시면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아 세상 속에서 거룩함과 진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1-2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원을 경험한 우리들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산 제사를 드리도록 계획되었다. 이제 우리는 에베소서 1장 8-10절에서 언급하는 선한 일의 범주를 속칭 영혼구원, 복음전도의 영역에서부터 우리의 관계가 맺어지는 삶의 전 영역으로 넓혀야 할 것이다. 산 제사를 드리는 지성소로서.


오직 믿음과 은혜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제이(第二)의 제사장으로서 지성소인 그의 삶의 현장에서 빛으로서의 삶을 눈물나게 살아내야 한다. 스스로에게 소금이 되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마음 중심에 박혀버린 사람은 말 그대로 소금일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그가 가는 곳마다 미꾸라지가 소금을 만난 듯 쓰라린 몸부림이 생겨나고 거기서 사람사는 냄새가 풍겨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죄악이 관영하여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져 버린 듯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거짓 지성소를 꾸며 거짓 구원과 거짓 평안을 팔아 자기 배를 채우는 거짓 선지자들을 향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의의 선전포고를 내려야 한다.


우리는 민족과 사회와 인류의 죄악을 아파함으로 눈물로 식사하고, 주의 긍휼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민족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삶의 현장인 지성소, 즉 학계에서, 노동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종교계에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구약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떨며 기도했던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건전한 상식으로, 더 나아가서는 신앙으로 소화된 충실한 삶의 내용으로, 소리없이 그 십자가의 현장에서 이슬로, 피빛 몸부림으로, 다함 없는 눈물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힘의 근원, 아니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골고다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내고 고개를 떨구시었던 것처럼.


가야한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더 더욱 가야한다. 지성소로, 지성소로-



이제 한 학기가 다시 시작되는 시점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왜 이 미국 땅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심각하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모든 종교는 마루되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우리가 적어도 우리 기독교 신앙을 마루되는 가르침 정도로만 믿고 따른다고 해도 우리의 신앙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오리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기독교는 세상의 종교 이상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물며 우리는 이를 생명이라고 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이 물음 앞에서 ‘매우 자주’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리고 나의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회개의 눈물을 쏟곤 한다.


문제의 장본인으로서,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선생으로서, 다시 한번 나의 전공분야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주의 은혜로 좀더 준비되어 주의 뜻을 잘 분별함으로써 내 삶의 제사의 내용이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영역에까지 스며들기를 또한 기도한다. 그리고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질문하며 우리 주 하나님께 공동의 산 제사를 드려가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이런 점에서 지난 12월에 시작된 티엠코스타(tmKOSTA)라는 사이버 공간이 갖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형제가 함께 연합하여 같은 관심과 전공의 영역을 어떻게 주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릴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대안을 찾아간다는 면에서도 깊은 의미가 있다. 여러 코스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란다.


우리가 함께 하는 코스타, 이코스타, 그리고 티엠코스타를 통해 서로 엮어지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 곧 우리의 지성소에서 드려지는 산 제사에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통치가 풍성히 임하시길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