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7년 2월호


1. 간단하게 자신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정희: 현재 Washington DC에서 행정학 박사 과정에 있습니다. 지역교회와 KBS라는 성경공부를 섬기고 있고요.
정대석: 미시간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콜로다도에서 포스트닥 과정에 있습니다. 지역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있고요.
장선희: 얼마 전에 컨사스에서 박사학위를 마쳤습니다. 저도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고요.
김진태: 저는 김진태라고 합니다. 미국에 온지는 4년 되었구요. 일리노이주에서 3년 남짓한 유학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시애틀 근교의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2. 최근 한국과 미국의 교회를 보면, 복음 자체가 ‘자아’가 중심이 된 채로 왜곡되어 있는 듯 합니다. ‘자아 중심의 왜곡된 복음’을 어떻게 규명하시고 계신지, 그리고 그에 따른 실례가 있으면 들어 주시겠습니까?


이정희: 근래의 교계의 큰 뉴스거리 중 하나가 한국에서의 개신교인의 숫자가 줄어든 데 비해서 카톨릭 신자는 거의 많게는 두 배 정도까지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개인의 구원보다 더 강조되는 카톨릭의 공동체성이 현대인들에게 어필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분위기가 개인의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자아의 문제에 초점을 집중하다보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다른 속성인 공동체성, 교회의 모습 등을 통해서 함께 성장해 나가고 서로 격려하고 힘이 되는 측면이 약화되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장선희: 복음이 왜 자기중심적으로 나타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생활이 풍요로워지고 의식주의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복음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측면에서 받아들이기보다는 교양이나 액세서리로서 혹은 내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방식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여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들어간다면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정대석: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크리스찬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복음 안에서 찾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그것이 우리를 높인다든지 우리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버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자기 중심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결국 그래서 기복주의로 많이 흘러가는 것 같아요. 내가 좀더 행복하고 좀더 잘되고 좀더 좋아지는 모습으로 자꾸 교회의 분위기나 경향이 흘러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음, 즉 나를 죽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습을 내세우는 교회는 신자들이 줄어들게 되고, 그것이 아니라 복받고 형통하는 것을 강조하는 교회는 신자들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합니다. 한국이나 미국 같이 장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런 흐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진태: 자아중심주의(egoism)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자기의 유익/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가장 상위의 목적이 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중심주의에 의해서 왜곡된 복음은 개인이 불편할 만한 요소가 제거되거나 혹은 다른 것으로 대체된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는 흔히들 이야기되는 반쪽짜리 복음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지만 인간의 타락은 강조하지 않는다든지, 죄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지만 죄의 추악함은 강조하지 않는다든지, 십자가의 승리를 강조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은 강조하지 않는다든지, 회복과 축복을 강조하지만 변화와 순종을 강조하지 않는 등의 모습이 그런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석형제님이 언급하신 기복신앙의 흐름에 대해서 동의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세련된 기복신앙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일례로 예수를 믿음으로써 자아가 회복되고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낼 수 있다는 생각은 70년대의 예수믿으면 복받는다는 다소 투박했던 기복신앙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인 것 같습니다.


eKOSTA: 그러면 그런 흐름이 역사 속에서 계속 존재했나요, 아니면 20-21세기 들어서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보시나요?


정대석: 교회 역사나 흐름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을 안해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전혀 없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런 현상이 점점 심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진태: 세상에서 주목받는 사상과 가르침이 교회에 흘러든 예는 역사적으로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구요. 개인주의나 자아중심주의가 최근에 인기있는 사상이기 때문에 현대에 교회에 흘러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그렇다면 그 전에는 개인주의적인 현상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현대의 사조를 개인주의, 물질주의, 상대주의로 규명해서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전에는 개인주의적인 모습이 덜했는지, 아니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궁금하군요.


이정희: 다른 모습으로 많이 나타났지요. 예를 들어 전체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는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교회보다는 편승하는 교회도 많이 있었습니다.


eKOSTA: 편승을 하게 되면 복음이 어떤 식으로 왜곡되나요?


이정희: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나치 정권 하에서의 고백교회라든지 본회퍼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하구요. 사실 그 고백교회가 당시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는 않았고, 나치병들을 축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세속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세속권력이 교회를 지배하려고 강하게 들어왔을 때에 저항했던 교회도 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경우도 많이 있었지요. 지금과는 반대의 경향이긴 했지만.


eKOSTA: 그런 경우에는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왜곡이 가능한가요?


이정희: 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사적인 예도 존재하구요.


3. 그런 ‘자아 중심의 복음’이 미치는 폐해는 얼마나 되며, 그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정희: 폐해는 원론적으로 얘기한다면 복음에서 한발짝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본연의 모습 그리고 신앙인의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인 것 같습니다.


장선희: 자아 중심의 복음이 들어온다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복음이 왜곡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폐해가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알게 하시려는 풍성하신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누릴 수 있기 때문이죠. 자신 외의 폐해라면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폐해도 일어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나 중심이니까 나랑 상관없으면 관여하지 않고, 내게 폐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어도 순종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김진태: 복음을 풍성히 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폐해가 돌아온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런 폐해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느냐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의 교리가 상대적으로 충분히 강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복음에서 이것만큼 개인이 불편해할 만한 요소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두 가지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번째는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이 공허한 행동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말씀묵상이나 기도는 경건생활의 참 중요한 일부이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지는 강조되지 않은 채 행동 자체만이 강조되는 것은 그러한 행동이 율법이나 또는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피상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며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용서를 선포할 수 있을 때에, 그 공동체는 삶의 밑바닥까지 나눌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 때에는 교회의 정체성이 상실된 채 피상적인 친목모임 이상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정대석: 자아 중심의 복음으로 가다보면, 예수님은 빠지게 되고 자기 편한 방식으로 복음을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폐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끈끈한 모습이나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모습보다는 푸석푸석한 모래 같은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eKOSTA: 자아 중심의 왜곡된 복음의 특징으로는 죄성,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복음의 형태, 그것 때문에 나타나는 기복주의적 현상으로 현재까지 정리가 되었구요. 또한 폐해로서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언급되었는데요. 기복주의 신앙이 만연한 상태에서, 극단적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신 것도 내가 너무나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반쪽 복음만을 믿을 때에 정말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장선희: 우리가 아무리 완벽하게 믿는다고 노력해도, 모두 잘못 믿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복음을 100%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어요. 다 어느 정도는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 혹은 왜곡의 가능성을 조금씩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즉 잘못 믿는 부분이 있어도,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eKOSTA: 어떻게 하면 이런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장선희: 개인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이유가 복음을 잘못 알기 때문일수 도 있을 것같아요. 교회만 다니고 복음을 잘 못알고 있는, 하나님과 관계를 제대로 잘 못하고 있는 신자들이 많아서 그런것 같기때문에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세워진다면 현상해결이 될것같습니다.


이정희: 말씀에 기초를 한 신앙, 문화나 생활에서 들어온 세속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신앙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하는 복음이 제대로 세워지도록 해야겠습니다.


김진태: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균형있게 강조하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속을 동일하게 강조함으로써, 우리 각자,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모습을 성경적으로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장선희: 현상들이 나타나는게 복음이 잘못된 건가요? 아니면 복음은 제대로 들어가는데 성령의 열매가 잘 안나타나는 간가요?


eKOSTA: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라는 책에서 하우드 스나이더는, 프랑케, 진센도르프, 웨슬리에 의한 부흥의 특징에 대해서 썼는데요, 결국 복음이 제대로 들어갔다면 올바른 성령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선희: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 사람들은 개인적인 행동을 할수 있지 않나요?


이정희: 웨슬리는 개인적인 성령체험이 신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분의 삶을 보면 공동체를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개인의 영성이 증진되는 과정속에서 공동체의 영성이 증진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둘중에 하나가 떨어지면 불완전해지는 것같습니다.


eKOSTA: 복음주의에서 개인회심의 강조. 세례를 받거나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았으리라고 전제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죄에 대한 지적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겠군요.


4. ‘내적 치유’가 기독교에 미친 좋은 영향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지나치다’는 비판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내적 치유’류의 ‘복음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이 가지는 장점과 단점 (특히 복음을 왜곡하게 될 위험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정희: 내적치유는 한국에서80말, 90년대초에 나와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를 제시하고 분석하는데는 성공했지만 해결책으로 복음의 삶, 공동체의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해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정대석: 예수님이 사역하신 것을 보면 복음을 전하시기 전에 내적뿐만아니라 외적치유의 사역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심적인 문제들을 고침으로 복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다리가 되어야 하는데 복음보다는 치유에 중점을 두고 복음까지 연결되지 못하고 멈추어 버리는 그런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대에 기복주의등과도 연결되는 것같습니다.


장선희: 사람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만지심을 통해 사람들의 내적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장점이지만 단점은 많은 경우 치유가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못하고 내적치유가 반복되어지는 모습만 남아있어서 개인의 복음은 치유의 부수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같습니다. 자기위안을 받는 선에서 그쳐 버리는 것 같습니다.


김진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가지고 있고 고민하고 아파하는데 예수님이 이해하고 치유해 주시는 것이 위로로 다가선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결국은 자기에만 머무르게 되며 치유를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치유를 받는 자신에만 집중이 되어버립니다. 초점이 하나님에게 맞춰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내적 치유가 가지는 장점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상처입은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큰 소망이 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상처입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교회생활을 할수록 더 깊이 깨닫게 되는 점인데요. 이런 분들에게 예수님이 그 아픔을 전적으로 이해하시고 위로해주신다는 사실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망이 될 것입니다.


내적 치유의 단점이 있다면, 치유 자체,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에 초점이 머무를 수 있는 위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Love the giver, not the gift.’라는 말이 있는데요. 치유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초점은 회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복을 허락하시는 주님께 있어야 하고, 주님 안에서 아픔이 치료되고 자아가 회복되었다면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특히 치유의 과정이 드라마틱한 경우, 여전히 초점이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머무르고 있다든지, 혹은 치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치유의 과정이나 방식을 더 의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KOSTA: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상처 그 자체가 상대적으로 미비한 부분이 될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나의 죄성과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어쩌면 상처가 그대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 아닐찌요?


김진태: 죄라는 개념이 상처나 연약함의 개념으로 대체가 되어서 내적치유를 통한 연약함과 상처의 치유가 죄에 대한 회개에 대한 중요성을 놓쳐버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5. 역사 속에 늘 있었던 문제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피로 사신 교회 공동체의 공동체성 붕괴 현상은, 현대에 들어 더 두드러져 보입니다. 만일 교회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한다면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을 위해 우리가 걸어야 할 한걸음은 무엇일까요?


김진태: 교회공동체를 다른 공동체와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피값을 치르고 공동체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각자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감사하며, 그것 자체가 개인과 공동체의 유일한 정체성이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선희: 교회 공동체의 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몸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지체로 부르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각자가 각 지체로서의 역할을 깨닫고, 그런 지체들의 충실한 역할을 다 해 나간다면, 진정한 공동체성이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대석: 지난 주에 빌립보서 2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사랑과 긍휼을 주셨고, 또한 한 성령으로 섬기게 해 주셨는데, 그 중에서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고 나누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내면을 잘 살펴본다면, 공동체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내게 유익이 돌아오지 않으면, 헌신하게 되지 않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고, 다른 사람을 위해 죽기까지 섬길 생각을 한다면, 진정한 공동체성이 회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KOSTA: 예전에 이코스타에서 많이 이야기했던 것 중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몇가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첫째는, 내가 속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가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성 자체를 유지할 수 없는 그런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공동체없는 신약시대의 신앙생활은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또 하나는, 공동체가 그저 만나면 서로가 즐겁고 기쁜 관계를 넘어서,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아파할 수 있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죄를 고백할 수 있다면, 그 가운데서 서로를 진정으로 섬기는 낮은 자리에 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대석: 또 한가지를 생각해 본다면, 일의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현대에는 어떻게 하면 인원을 늘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모임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기 쉽지만, 진정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그런 효율성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을 바라보면서 섬기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말 비효율적으로 보이겠지만요.


6. 지역 교회 공동체와 코스타와 같은 더 넓은 범위의 공동체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있기 마련인데요,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와 관련을 맺고 계신지요?


정대석: 만일 코스타를 섬기는 일이 지역교회를 섬기는 일과 충돌을 일으킨다면 갈등이 생기게 되겠지요. 특히 코스타를 어떤 형태의 지역교회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에 더 갈등이 있을 수 있겠지요. 사실 서로를 견제하고 갈라 가지는 갈등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력관계에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정희: 한국에서는 파라처치와 로컬처치의 갈등이 적잖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편적 교회의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협력한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하는 생각합니다.


정대석: 동질 문화 가운데 있는 한국 교회는 좀 더 공동체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우리만 좋으면 된다는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다른 모습의 사람들에게 좀 더 마음을 열고 다가서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진태: 저는 그동안 지역교회를 넘어선 더 넓은 범위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소속되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갈등과 긴장을 느끼지는 못했구요. 현재는 직장 때문에 이사온지 오래 지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교회 예배와 소그룹에 성실하게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8. 가정교회, 셀모임, 속회 등 소그룹 속에서 공동체성을 깊이 느끼신 경험이 있으신지요. 또 부족했던 점이 있었다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진태: 시애틀로 이사오기 전에 일리노이에서 다녔던 교회에서 공동체성을 깊이 느꼈습니다. 속해있던 소그룹이나 심지어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룸메이트와의 관계에서도 살아있고 역동적인 교제를 느낄 수 있었구요. 삶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서 중보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 아쉬웠던 점이라면 역동적이고 강한 교회의 문화가 주님 안에서 훈련받고 동질성을 느끼기에는 더없이 좋았지만, 반대로 새로운 사람들에게는 약간 높은 장벽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역동성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의 개방성을 병존하는 문제는 제게 아직도 숙제처럼 남아있는 주제입니다.


장선희: 나와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픈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일원끼리는 진정한 한 가족같이 ‘닫혀’ 있지만,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서도 편하게 적응할 수 있는 ‘열린’ 공동체가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