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6년 8월호

KOSTA/USA 2006을 연 jjKOSTA에서 University of Nebraska에서 화학을 가르치시는 최원영 교수의 강의를 편집부에서 요약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은 우리 각자에겐 ‘사전’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가진 사전의 definition이 다르면 대화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세상적 가치는 무엇이 문제인가? 공중부양을 하겠다며 도를 찾던 사람이 ‘내가 떠서 뭐하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혀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와 같이 세상적 가치는 그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세상적 가치의 한계를 짚어보자.


1. 세상적 가치는 영원을 담지 못한다.
볼테르의 말처럼, 몇분을 타고 사라지는 지푸라기 같은 삶의 허무함을 깨닫는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나서 평균수명이 ‘영생’이라는 것으로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를 넘어 하나님의 가치를 가진 우리는 ‘생명을 건지는 일’, 즉 ‘화해자로서의 초대’라는 사명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딜레마가 있는데, 바로 ‘나도 가끔은 주목 받는 인생이고 싶다’라는, 영원한 빛인 별보다 20분 타고 마는 불타는 지푸라기이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런 딜레마를 처리하는 방법은 욕구를 참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을 옮기면 된다. 다시 말해 내 사전을 다시 써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그리스도인이 피곤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을 우스게 소리로 이렇게 답하기도 한다. ‘일요일에 쉬지 못하고 교회에 가니까’라고… 하지만, 이 말을 잘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은 피곤하다’ 혹은 ‘교회는 안식을 주지 못한다’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서글픈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의 전제들이 깔려있는 사전의 정의를 성경의 바른 사전으로 다시 써야 한다는 말이다. 편한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말이 정말 좋은 것일까? 한번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전제들은 ‘이생의 자랑,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에 근거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전을 다시 쓰기 위해서는 성경의 메세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2. 예수님의 베다니 사역
나사로를 살리신 사역이 베다니 사역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나사로의 기적’이라는 표현보다는 ‘예수님의 베다니 사역’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예수님의 사역은 잘 알고 있으리fk 생각한다. 요한복음 본문 1 4절을 읽어보자. 예수님은 나사로의 아픔, 혹은 죽음의 목적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이런 의도를 들은 사람은 제자들, 심부름꾼, 마르다와 마리아, 그곳에 있던 유대인 등이겠다. 각각 그들의 반응을 살펴보자. 4절 이후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들었슴에도 불구하고, 위험하다고 베다니로 들어 가지 말 것을 권한다. 또한 도마의 ‘우리도 같이 죽으러 가자’라고 조금은 과장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잔다’라는 표현을 문자 그래로 잠들어 있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반면, 베다니에 도착해 예수님께서 처음 만난 사람은 마르다인데, 그녀의 반응을 보자. 예수님의 의도를 예전에 들었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자신만의 반응을 보인다. 마리아도 마르다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유대인들 역시 ‘이 사람이 죽은 자들은 살리지 못하는 구나’라고 죽은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듯 하다.


정리해 보자.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라는 것이었고, 구체적인 사역은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였지만, 예수님 주변의 그 누구도 그 의도를 바로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의 사역은 참으로 외로운 사역이었다.


여기서, 예수님의 ‘통분히 여기다’라는 표현을 집중해 보자. 다른 번역을 보면, ‘아픈 마음으로 슬퍼하셨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아파하셨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알 수 있는 베다니 사역의 성격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짝사랑 전문가가 아닌가 싶다. 짝사랑이란 상대편은 관심이 없는데, 당사자만 안타까워 하는 것이니까. 정말 짝사랑은 감동 아닌가? 관심도 없어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쏟아 부어 주시는 사랑은 정말 감동이다. 또한 향유를 붇는 마르다의 사역도 베다니 사역에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예수님의 베다니사역은 정말 쉬운 일이었을까? 하지만, 우리가 진정 물어야 할 것은 ‘편한가’ 혹은 ‘쉬운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그 대신 그 ‘의미’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다른 예를 들어 보자. 결혼할 때 물어야 할 것은 ‘쉬운가, 어려운가’가 아닐 것이다. 정말 이 결혼이 의미가 있는가를 물어야만 한다. 사실, 인생은 의미의 싸움이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을 살펴보면,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이라는 의미를 짚어 주셨다. Steven Jobs은 코카콜라의 사장을 설득하기 위해 ‘설탕물을 팔기에 평생을 바칠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데 쓸 것인가?’라고 했다. 사실 애플 컴퓨터를 많이 판다고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없기에 이 말은 별 의미가 없지만, 우리는 세상을 향해 이 말을 선포해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