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영화 <패션>을 보셨습니까?” 지난 1월 캘리포니아 패사디나에 있는 풀러 신학교에서 존스톤교수가 나를 만나자 마자 건네온 첫마디였다. <영화와 영성> Reel Spirituality라는 책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존스톤은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는 드물게 영화를 비롯한 현대예술과 기독교를 연구해온 사람이다. 그는 영화가 영적 통찰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영화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또 할리우드가 가까운 관계로 자주 영화계 사람들을 만나고 작업을 같이 하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도 편집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 영화에 대해서 “패션” (열정)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내게 건넨 큼지막한 포스터를 말아 쥔 채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체 120여분 중 100분이 넘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영화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상세하게 묘사한 것에 대한 찬사가 핵심이었다. “그것 만으로 영화가 될까요?” 그것이 내가 보인 반응이었다.


그 다음 주일 나는 LA 근교의 잘 알려진 대형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거기서도 영화 <패션>에 대한 “광고”를 10여분에 걸쳐서 들었다. 이 교회는 LA 주변의 상당 수 영화관을 빌려 이 영화를 시중 개봉 이전에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행사를 주최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 행사를 한 미국 전역의 교회 중에서도 선봉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목사가 권할 유일한 R등급의 영화일 겁니다.”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영화를 강력히 권하면서도 피로 얼룩진 작품임을 거듭 경고했다. 만약 그렇게도 폭력적이고 잔혹한 장면이 내내 계속된다면 정말로 교회가 나서서 성도들에게 권할 만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2월에 들어 수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 맞춘 개봉을 몇 주 앞두고 영화는 이미 많은 관심과 비판을 불러일으키며 뉴스 거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이 영화가 유태인을 비하하고 예수를 죽인 사람들로 묘사한다는 논란이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반유태주의”는 그리 절대적인 관심사가 아니므로 그 논쟁에 뛰어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아쉬웠던 것은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을 놓고 번민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 것과 달리 가야바를 비롯한 제사장들을 철저한 악당으로 그린 점이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교활하고 주도 면밀한 음모자요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악마처럼 묘사되었다. 요한복음이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을 유익으로 생각했다는 점(11:50)을 밝혀 그 역시 고민이 없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시각이다. 아마도 이런 다소 치우친 관점이 “반유태주의적”이라는 지적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 한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갔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본래가 개봉 초기부터 뛰어가 보는 것보다 기다려 평을 참고하여 볼 가치를 결정하는 버릇이 있는 터였지만 일부러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 계속되는 평들은 극히 엇갈린 것들이었다. 다른 예술도 그렇지만 영화가 엇갈린 평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있고 실제로 많은 경우 그렇다. 하지만 특히 종교적인 영화가 그렇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경우 거의 그래왔다. 예외가 있다면 50년대의 <왕중왕>이나 <벤허> 정도일 것이다. 마틴 스콜세이지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은 오랫동안 한국서 상영되지 못할 정도의 반대에 봉착했었다. 영화 <패션>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극찬과 혹평이 엇갈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전세계의 기독교인과 일부이지만 비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토론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간의 가치를 인정 받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패션>이라는 주제이다. 멜 깁슨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로 얼룩진 최후의 10여 시간에 그토록 가까이 카메라를 현미경 대듯 들이대지 않았을 것이다. 제작의도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보통 의미의 “오락물”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제작비를 많은 부분을 사재를 들였고 각종 논란과 비난 그리고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작업이었다. 영화산업은 돈이 결정권을 가진다는 것이 상식이므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는 평가도 일리가 있다. 제작 의도가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고 과정도 상당부분 신앙으로 난관을 극복하며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제를 다루는 방식도 극도로 “사실적”이고자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우선 “사실성”을 더하려는 의도에서 인지 언어를 아람어와 라틴어로 했다. 비록 비교적 적은 예산을 들인 영화지만 세트나 의상, 분장도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내용면에서도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한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같은 영화와 달리 성경에 성실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묘사는 지금까지 그 어떤 묘사보다 자세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은혜”나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충격을 받기도 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반면 너무 “사실적”이고자 애쓴 나머지 지나쳤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예를 들어 채찍질 장면이 9분여 계속되는데 많은 의사들은 그런 식의 고통을 건강한 사람도 3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에 앞서 쇠사슬로 내리치는 등의 가해진 구타까지 더하면 지나침은 도를 넘었다고들 한다. 그 후 처형 장소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가야 했던 점을 감안하면 과장에 대한 비판은 옳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인 능력으로 견디셨다고 단순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패션>의 주제를 벗어난 것이다. 그의 수난은 철저히 인성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으시는 처절한 고난과 죽음을 주제로 보여주고자 한 시도 자체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비롯한 모든 예술 작품은 작가의 관점에서 주제를 해석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경우는 그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멀티미디어요 특히 시각에 중점을 둔 영상매체인 영화의 본질이다. 특히 이 영화는 언어조차 자막으로 접해야 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패션>은 고난을 “보여주기” 위해서 극단의 조처를 마다하지 않은 영화이다. 많은 비판가들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극도의 폭력이 한 시간을 훨씬 넘어서 계속되는 끔직한 영화이다. 평론가 로저 에버트(시카고 선타임즈) 는 “자기가 본 영화 중 가장 폭력적인 영화”라고 했다. 뉴요커의 평론가 데이빗 덴비는 이 점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최하위 등급인 별 한 개를 주었다. 상식적인 영화 비판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 선정성과 폭력성인 점을 감안할 때 아무리 주제상 또는 특별한 의도가 있더라도 이처럼 생생하고 나아가 과장이 심할 정도로 길게 폭력적인 장면에 초점을 둔 것은 비판거리가 될 수 있다. 물론 나 자신은 폭력의 묘사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쉰들러스 리스트>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폭력적이었지만 그것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폭력을 묘사하고 “보여주는가”하는 것이다.



영화 <패션>의 의도는 이미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자세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한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보는 것을 믿는” 시대에 살고 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인터넷 등 멀티미디어와 더불어 자라난 세대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보는 것 역시 명백한 한계를 가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고속도로 변의 목장의 송아지처럼 큰 눈망울을 굴리며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을 하루 종일 보아도 아무런 생각이 없을 수 있다는 한 비평가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사람들이 폭력의 묘사에 익숙해져 어지간해서는 아무런 감동이나 시각적 충격도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극단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자신은 이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수난의 장면부터 오히려 긴장을 잃기 시작했고 도가 지나친 폭력의 묘사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었다. 더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나는 그렇질 못했다. 평소에 눈물이 인색하지 않은 자신이 미안할 정도였다. 남들처럼 감동하고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을 굳이 변명하자면 바로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오가는 플래쉬 백으로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영화는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피가 마리아의 얼굴에 까지 튀기는 장면으로도 고난의 의미는 살아나질 못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사고나 상상력이 훨씬 월등하여 그것을 살려내며 감동과 “은혜”를 받았을 것으로 믿는다.



일부에서 이 영화가 역시 제작자 멜 깁슨의 카톨릭적 신앙을 반영한다는 지적은 옳다고 보인다. 특히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어머니 마리아의 관계가 부각되는 여러 장면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서 어머니를 “여인이여”라고 부른 이유를 아들로서보다 메시야로서 대하신 것으로 해석해온 개신교 신학에서는 생소한 모습이 영화 전체에 상당히 있다. 가장 카톨릭적인 면은 주제인 <패션>에 대한 접근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는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하신 것이다.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 신학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한 비참하고 참혹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카톨릭에 강하다. 중세의 성화들 중 <피에타>라고 불리는 그림이 있다. 거기에는 대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를 측은히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한 구석에 등장한다. 마치 너무도 참혹하게 죽은 성자의 모습이 안쓰러워 인류의 죄를 사하신 듯한 인상을 풍긴다.

멜 깁슨이 수난과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전통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생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남미나 필리핀 등지에서 간혹 수난절 행사에 실제로 십자가를 지는 재현행사를 포함해 각종의 고행과 고난이 강조되는 이면에는 이런 전통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신학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카톨릭의 저력은 부러웠다. 그것은 물론 멜 깁슨이라는 한 사람의 비전과 노력의 결실일 수 있다. 하지만 1920년대 영화와 정면 충돌해서 싸웠던 카톨릭은 바티칸 공의회 II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는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는 카톨릭 안에서도 반대와 이견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한 배경이 이 영화의 출현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대중문화가 일상 환경이 된 오늘날 개신교 역시 대중문화와 특히 영화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바로 보고 비판하며 나아가 변혁하려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이런 영화가 주류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고 배급되었을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아가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인해 앞으로도 좋은 “종교영화”가 더 많이 제작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끝으로 이 영화를 과연 볼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앞서 말한 지나친 폭력적 장면으로 인해서 이 영화는 성인등급인 R을 받았다. 하지만 로저 에버트의 말과 같이 “종교 영화”가 아니었더라면 17세 미만 절대 불가인 NC17을 주었어야만 했다는 말에 나도 동의한다. 따라서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어린아이들을 이 영화에 동반하는 것은 전혀 권할만한 일이 아니다. 다른 것은 접어 두더라도 좋은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교회에서 모든 교인을 불러 놓고 상영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지금 한국서 일부 교회가 불법 DVD를 상영한다고 하는데 이는 제작권 존중은 제쳐놓고라도 과연 상식적으로 타당한 일인지를 물어야 할 일이다.



<패션>외에도 모든 가족이 보아서 좋을 영화는 많다. 특히 신앙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들 가운데 많다. 예를 들어 1982년 휴 허드슨이 만든 에릭 리틀이라는 올림픽 달리기 선수의 이야기인 <불의 전차> 같은 것이 그렇다. 이 영화는 좁은 의미의 종교영화는 아니지만 정말 감동적이다. 부디 “종교영화”라는 좁은 장르에만 집착하여 “은혜”를 받으러 영화를 보러 가지 않기를 바래본다. 사실 “은혜”는 눈물만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진정한 “은혜”는 도전을 받아 삶의 변화가 일어날 때 강하게 임한다. 그리스도를 측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우리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아니 조금이나마 그렇게 될 때 진정하게 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눈물보다 훨씬 진하다. 그것은 스크린을 피 빛으로 물들이는 것보다 훨씬 진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을 씻어 새롭게 변화시킨 진정한 은혜의 샘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