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10월호

종합시험, 종합시험, 종합시험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윤동주, 쉽게 씌어지는 시 중


오늘은 비도 주적주적 오는 것이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식스 스퀘어 방은 남의 나라, 아니 지금 있는 곳은 식스 스퀘어는 더 되는 것같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으랴. 남의 나라인걸. 혼자 좁은 공간에 고립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 괜히 나를 감옥에 있었던 다른 사람으로 등치시켜보곤 한다. 사도 바울이 그랬지. 김교신이 그랬지. 그리고 윤동주가 그랬었지 하면서.
유학생활한지 수 년, 이때까지 온 내가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이것밖에 아닌 내가 한편으로는 한심하다.


오늘은 문득 공부를 한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들어온 미국 동기들은 벌써 패쓰한 종합시험을 한 학기나 미루고 아직고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해보인다.
대학교 다닐 때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라는 걱정이 가장 힘들고, 유학을 준비할 때는 준비과정에 제일 힘든 줄 알았더니 코스워크 과정에서는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것만 지나가면 낫겠지 했더니 종합시험 스트레스는 앞의 것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참 하면 끝이 없이 벌어지는 난관에 인생은 고역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하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언어의 장벽을 실감하고 당황해하던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 하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긴 하다. 과제와 에세이 준비하면서 끙끙대던 기억들, 좋지 않은 성적과 컴멘트로 속상해하던 일, 프레젠테이션하면서 긴장하던 일들 겨우겨우 넘어서 코스워크까지는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 새로운 지경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영어는 왜 이리 안 느는지, 글을 읽다보면 걸리는게 너무 많아서 다시 예전에 공부하던 단어장이나 한번 훑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논문을 쓰기는커녕 남의 논문 이해하는데도 이렇게 장애가 많으니 언제나 그들을 따라가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식인, 잉여인간, 고민


나는 무엇이 힘든가. 육체적으로? 혹은 혼자 사는 삶의 외로움으로? 평소에 공부를 잠을 못자면서까지 하지는 않으므로 몸이 힘든 것은 아닐 것이고, 혼자 사는 외로움이야 삼십년을 따라오던 것이므로 지금 유달리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내가 갖는 심적인 어려움은 가끔은 내가 잉여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나하는 회의 때문일 것이다. 지식인이라는 말이 아직 가당하지 않겠지만 뚜렷한 성과물이 없이 사회에 생산적인 기여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가치물을 소비만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몰려오는 것이다. 대학을 같이 다녔던 친구들은 벌써 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가정도 갖고 안정도 되어 있는데 나는 아직도 사전 뒤적이고 있는 것이 슬며시 부끄러운 것이다.
나는 지식인인가 아니면 잉여인간인가? 이제 지식인도 앞에 신(新)자를 붙여서 보이는 무언가를 생산해내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지식을 도출해내지 못하면 비난받아야 하는 시대에 내가 지금 들여다 보고 있는 이 종이 자락에서 무언가를 건져낼 수 있을까? 아니 이 정도의 글이라도 써낼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을까? 그저 백면 서생(百面書生)으로 남아 남들이 만들어놓은 가치에 얽어 붙어 살아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감상(感傷)이나 연민으로 세상을 향하기에는 삶이 너무 무겁다. 사랑과 땀이 고이 담긴 학비 봉투는 무표정한 나의 얼굴을 비장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른 걱정없이 미국에 와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특수한 시간을 감정의 소회로 보낼 수는 없다.
태어나서 지금처럼 많은 돈을 써본 때는 없다. 또 태어나서 지금처럼 많은 돈을 벌어본 적도 없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한 이후 지금처럼 아끼면서 산 적도 없다. 복사 종이 한장도 돈으로 환산되고 커피 한잔도 절약의 방도를 찾아보게 된다. 집에서 타먹으면 일불이라도 절약할 수 있겠지.
일상의 외관은 철저히 현실주의자가 되어 다른 것을 잊고 전진해야함을 상기시켜준다.


사는데 가난한 것이 마음의 가난함을 불러일으키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물 속에 잠수해있을 때 느끼는 숨막힘이 공기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는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인의 삶, 쉽게 씌어지지 않는 시


로렌스 형제가 터득한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순히 자신의 평범한 일상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는 맡겨진 일과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의 마음으로 감당했으며, 늘 자신의 그 사랑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순결한 것이 되게 하고자 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중


우리의 성화는 우리가 추구하는 생활을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꾸는 데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일상의 활동들을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뜻인 것같다.
신앙과 학문의 조화, 삶과 신앙의 일치는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의 태도를 우리에게 요구한다고 노상 들었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유학생활은 특수하면서도 어느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동일하게 보이는 재물을 위해 살 것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 것인가의 선택의 장인 것같다.
나의 유학생활에서의 성화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합당한 목표와 그에 걸맞는 성실함과 자기 절제로 우리의 삶에 적용될 수 있을까?
헨리 나우엔이 적기를 우리가 지식을 쌓는 이유는 우리의 지식을 자유로이 나누기 위함이고 우리가 절제하는 이유는 주님에게 성실하기 위함이다. 오직 관대하게 우리의 가진 지식을 나누어 줌으로써만 우리는 그 지식이 얼마나 심오한지를 알 수 있다고 했군. (It is only by giving generously from the well of our knowledge that we discover how deep that well is. –Henry Nouwen, Bread for the Journey)
이것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영어 공부가 되었건, 종합시험이 되었건, 학위 논문이 되었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절제하는 것이 신앙의 아름다움의 실체이겠지.
그리스도인에게 Simple Life는 의미없는 단순한 하루가 아니라 절제하는 소박한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좇는 우리에게는 오늘 하루의 책상머리맡은 하나님나라에 하나의 벽돌을 얺는 신성한 삶의 자리인 것이다. 나에게 오늘 하루는 더 이상 그저그런 일상이 아니라 일일 일생(一日一生)으로 의미가 바뀐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결성은 아직 먼 일이지만 오늘 하루가 달라지만 일생이 달라지리라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의식적으로 희망을 주어본다.


학교의 해거름 생량(生凉)한 찬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해준다. 혼자 내 속으로 침전하기 전에 주위를 돌아본다. 삶이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좀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교정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