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0년 12월호

지금의 여러분과 같은 학생의 신분으로 처음 코스타에 참석한 때는 내가 35세였을 때이다. 이후로 거의 매년 코스타에 참석하면서 울고 웃고 하는 동안 어느 덧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 참석했던 그때 같이 왔던 큰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지금은 군대를 마치고 복학하여 곧 대학 4학년이 되니 쏜살같은 세월의 흐름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돌아보면, 지난 15년 동안 코스타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 당시 250명 정도의 참석자 수가 지금은 1800명 정도로 불어나 늦게 등록하면 참석도 못하게 되었다. 몇 개 없던 세미나가 이제는 60개를 넘어서서, 무엇을 들어야할지 망설이게 되는 행복한 고민을 할 정도다. 집회의 진행도 어설프고 빈 구석이 많았는데, 지금은 빈틈없으면서도 물 흐르는 듯한 세련됨을 보게 된다. 지난 7월의 코스타를 세상적으로 보자면 하나의 집회가 추구하는 모든 것을 거의 갖춘 셈이니까. 여기서 그 동안 코스타를 축복하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 좋으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정직하고 겸손하게 돌아보는 일이 따라야하지 않을까?


Charles Swindol의 글에서 읽은 내용이다. 그는 하나의 단체가 거치는 4가지 단계를 4M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Man, Movement, Machine, Monument가 그것이다. Vision을 갖는 Man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Movement를 만들고, 그 Movement가 커지면, 그것을 담을 그릇인 조직, 즉 Machine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엔 알맹이와 진국은 다 없어지고 앙상한 Monument(비석)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스타는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자문해 본다. 처음 시작했을 때 코스타가 가졌던 그 끈끈하고 진한 것이 점점 묽어지는 것 같아 아쉬움을 느끼는 한편으로 그 에센스(essence)가 과연 무엇일까 물어본다. 코스타를 코스타되게 했던 원래의 정신(spirit)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보기에 코스타의 핵심정신은 예수님의 사랑을 새로 발견하고 깨닫는데서 오는 감격과 생명력이라고 믿는다. 나는 한 개인이나 한 단체가 이것을 가지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영적인 영향력이 결정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나는 코스타가 바로 이것을 가지고 출발했다고 본다. 나는 코스타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코스타가 누렸던 예수님과의 관계를 다음의 세가지로 나누어 보면 코스타의 정신이 좀 더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코스타는 (1) 예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고 (2) 예수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고, (3) 예수님의 사랑을 밖으로 전하였다는 세가지 관계이다. 이제부터 그것들 하나 하나를 좀더 자세히 나누고 싶다.


말씀드린 대로 코스타의 정신을 결정짓는 첫번째는 그곳이 예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나 믿는 사람들에게나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나는 조장을 하면서 조의 다른 식구들을 잘 관찰할 수 있었는데, 안 믿는 사람들 면면이 한국에서였다면 손톱도 안 들어갈 것 같았다. 그 중에는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없이도 자기는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어 보였다. 그 사람들을 보면 코스타에서 무언가 얻겠다는 기대도 있는 것 같았지만, 대부분은 누군가 목소리 강한 사람에 의해 끌려왔다는 인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겸연쩍어 하기도 하고 약간씩은 화가 나 있는 것도 같았고,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부어있기도 했다. 그런데 배추를 소금에 절이면 숨이 죽듯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독기가 빠져나가더니 나중에는 울면서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감격가운데 지켜보곤 했다. 자기 의를 내세우며 주님을 거부하고 있을 때 모욕과 상처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기다려 주셨던, 그 주님을 만나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믿는 사람들도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영어와 학업 때문에 시달리고, 아내는 남의 아이 기저귀 갈아주면서 살림을 꾸려나가는 어려움을 대부분의 가정이 겪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지역교회에서 말씀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좋은 믿음의 교제가 없다보니 완전히 선인장같이 되어 서로 상처만 주고 받곤 하던 형편이었다. 그들이 코스타에 왔을 때는, 완전히 지치고 영적으로 피폐한 상태에서 만신창이가 된 상태들이었다. 깨지고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무릎들을 꿇었고 그때 낮은 곳에 임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마음껏 체험하게 되었다. 살아있는 말씀 앞에 시간마다 울고, 시간마다 회개하고, 시간마다 주님의 위로를 체험하면서 갈릴리 바다로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신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힘을 얻는 축복을 함께 나누었다.


이렇게 각자가 새롭게 발견한 예수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는 나눔의 장이었다는 것이 코스타 정신의 둘째이다. 주님과의 풍성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풍성한 교제자기 몸을 붓는 섬김이 따른다. 먼저 교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다. 조 모임에서 그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던 문제들을 서로 말하고 들어주면서 우리들은 밤 깊은 줄 모르고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지도교수와의 갈등,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 또 아이들 키우면서 갖는 아내들의 좌절감 등등. 함께 주님 사랑 안에 있다는 든든함과 편안함으로 마음을 열고 나누는 자리였다. 그야말로 주님을 먹고 마시는 자리였다. 코스타라는 집회에 믿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정도가 아니라, 여기 한 아버지를 모신 내 형제자매들이 있고 내 평생의 친구와 동역자들이 있다는 공감대를 갖는 자리였던 것이다.


예수님 사랑 때문에, 풍성한 교제가 있었을 뿐 아니라 자기를 붓는 섬김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한번 모시기도 힘든 강사들이 자비로 미국까지 와서 무보수로 코스타를 섬기는 일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섬김은 더 많았다고 믿는다. 어린이 코스타를 위해 수고하던 귀한 형제자매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고, ‘통곡의 집’이란 별명을 가진 곳에서 아이보기(baby-sitting)를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통곡했던 섬김이 있었다. 15년째 코스타의 모임을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그 중에는 여름학기까지 포기하면서까지), 집회기간에는 밤잠을 설쳐가면서 뛰어다녔던 간사들의 섬김이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교회재정 가운데, 매년 몇 만 불씩 헌금하고도 자기의 지분과 목소리를 주장하지 않았던 몇몇 지역교회들의 헌신적인 섬김이 있었다. 그 교회들에 속한 한 목사님은 설교하겠다 나서시는 대신에 책 광고하는 데만 몇 년째 열중하셨고, 또 한 목사님은 한국에서 시차 바꿔가면서까지 오셔서는, 별로 순서도 맡지 않고 뒤에서만 왔다갔다 자리를 지켜주시곤 했다. 사실 우리들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돈 쓰고, 시간 쓰고, 자존심을 포기한다. 무엇때문에 그런 희생과 헌신이 나왔을까? 바로 주님 사랑을 먼저 깨닫고 그 사랑으로 형제들의 발을 씻어 주는 섬김의 정신 때문이었다. 주님 사랑 안에서 마음을 열어 교제하고, 주님 사랑 때문에 섬기는 그 섬김 – 그것이 바로 코스타를 코스타되게 한 두번째 정신이었다.


이와같이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고 주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었을 때,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굳은 결단과 거룩한 열망으로 채워졌던 것, 이것이 코스타의 세번째 정신이다. 주님의 사랑 가운데 흠뻑 젖어 있는 4박 5일 동안, 서서히 나타난 결과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 사랑과 헌신으로 보답하고 싶은 열망으로 채워지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성령충만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코스타에서 처음으로 충만을 체험했다고 본다.


그 결과로 큰 힘과 사명감을 가지고 돌아가 자기 고장에서 영적인 영향력을 끼친 일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속해 있던 MIT의 Gate Bible Study에서도 코스타에 갔다 온 멤버들의 생명력(vitality)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교에 헌신할 것을 결단했고, 또 자기가 하고 있는 전공분야를 주님과의 관계에서 재조명하고 새로운 시각과 자세로 학문에 임할 것을 다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께 코스타 핵심정신의 세가지 측면을 말씀드렸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을 살리는 일은 언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인가? 물론 코스타 집회기간 동안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지난 코스타들이 이런 정신을 체험하는 축복의 기회가 되었을 것을 간절히 소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은 코스타 기간 동안만 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란 것 다 아실 것이다. 그것은 이 글을 읽는 이 순간에도 우리가 마땅히 누리고 있어야 할 소중한 영적인 원리인 것이다.


지난 코스타의 감격이 다 어디 가고 어느새 이렇게 옛 모습으로 돌아왔는지 안타까워하고 있는 분들이 있지는 않은가? 그런 분들은 이 코스타 정신의 거울에 한번 비추어보면 어떻겠는가?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역동적인 신앙생활의 중요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신앙적 인격의 성장이 더딘 것을 한탄한다면 이 세가지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이 정신이 다름 아닌 개인 신앙성장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교회나 단체가 주님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고 마음이 어두워지는가? 우리부터 먼저 이러한 정신으로 돌아가자. 이러한 코스타의 정신 안에 공동체 부흥의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공간'(Space)을 뛰어넘는 ‘초공간'(Hyperspace)에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코스타가 바로 <이코스타>라고 믿고 있다. 매년 7월초의 위튼칼리지(Wheaton College)를 뛰어넘어, 매일 매일 우리가 선 곳에서 <이코스타>를 통하여, 혹은 또 다른 은혜의 장들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새로운 차원에서 만나고, 나누고, 전하도록 하자. 이런 삶을 살다가 다시 만나는 위튼칼리지의 코스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잔치가 될 것이다. 아니, 더 감격스러울 것은 이런 삶을 살다가 어느날 주님을 얼굴로 만나는 날일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 모두 코스타의 근본(핵심)정신을 매일 매일 누리며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