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1월호

사방을 둘러보면, 각 모임마다 공동체성에 대한 관심과 열심이 있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은 요즘이다. 각처에서 열심을 내고 있는 각 소그룹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교회는 순모임, 셀모임, 혹은 가정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가 가진 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점검해 보고,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 ‘공동체’에 대한 왜곡된 인식


성경에서 우리는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고 피로 사신 사람들을 함께 모으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 모임을 나타내는 단어인 ‘교회’혹은 ‘공동체’두 가지 모두 어느 정도 왜곡되어 사용되어 왔기에,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라는 단어를 들으면, 안수 받은 목사를 중심으로 한 지역교회 혹은 조직교회를 바로 떠올리게 되는데, 그런 오해는 ‘성경적인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심각한 오류를 일으키게 된다. 마찬가지로,‘공동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적어도 한국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공동생활을 하며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늘 말썽만 일으키는 이단들을 떠올리거나, 혹은 ‘청년 공동체’, ‘찬양모임 공동체’와 같은 모임을 나타내는 이름 정도로 피상적인 동아리 수준의 모임을 떠올리기도 한다.


2. 공동체의 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


그렇다면, 이런 단어에 대한 왜곡된 개념이 왜 생기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언어는 많은 경우에 사고의 반영이고, 그 근원을 바로 찾을 수 있다면, 문제의 원인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 공동체 자체가 개혁의 대상이었다.
로마 카톨릭을 영적으로 끌어 온 것은 교황이 아니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공동 생활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수도원 자체가 종교 개혁의 직접적 대상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종교 개혁 당시, 수도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공동 생활이라는 원칙을 버리고, 부패의 온상이 되 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한 이익집단이 되어 버렸고, 성적인 타락도 이미 수위를 넘어서 버린 수도원 공동체를 보면서, 종교 개혁자들은 ‘공동체’라는 말을 강조 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마치, 성찬을 행할 때, 사제의 축사로 빵과 포도주가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가르쳤고 (화체설), 또 그 성찬에 참예하지 못하면 죄사함이 없다고 가르쳤던 카톨릭의 의식 때문에, 지금까지도 성찬을 통해 공동체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점을 강조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2) 이단들이 공동체였다.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의 많은 경우가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도, 공동체에 대한 그릇된 의식을 심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정해 놓고 기다린다던가, 집단 자살을 하는 경우, 그들 대부분은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급기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람들 자체를 ‘혹시?’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3) 공동체를 표현하는 단어가 오용되었다.
얼마 전 소천하신 대천덕 신부님께서는, 한국교회에서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사라져 가는 이유로 단어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예를 들면, 에클레시아를 표기할 때, ‘가르칠 교(敎)’를 사용하는 교회(敎會)가 아니라, ‘사귈 교(交)’로 사용하여 교회(交會)라고 쓰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셨다. 물론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성도가 함께 모여 성도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축도 시에 사용하는 ‘교통’이라는 단어의 왜곡이다. 예배 시간 마지막에 행해지는 축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기도 의식이라기 보다는, 그 공동체의 리더가 그 모임의 구성원들을 축복하는 의식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현재 가장 흔히 사용되는 축도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로써,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바랐던 축복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현재 사용되는 축도를 잘 들어보면,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은 대체로 바로 사용되는 반면, 성령님의 ‘교통하심’은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 혹은 ‘성령님의 인도하심’등으로 바뀌어 오용되고 있다. 다일 공동체 교회의 최일도 목사님은 그의 강의(‘아름다운 교회찾기’ 1강)에서, 이 점을 강조하면서, ‘성령이 교통하심이 자주 다른 말로 대체되는 것으로 대변되듯이 한국 교회의 공동체성 상실이 심각하다’고 하신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4) 지나친 가족 중심의 사역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사역 때문에 가족을 소홀히 하셨다는 비난을 받는 권사님 혹은 집사님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가족 중심의 사역의 바람은 ‘아버지 학교’, ‘행복한 가정 세미나’, ‘부부생활 세미나’등의 형태로 불기 시작했고, 이제는 목회자들도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세째는 교회’라고 당당히 외치게 되었다. 이런 가족 중심의 사역들이,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가정의 바른 위치를 찾게 해주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 이제는 더 지나쳐 자기 가족만을 위하는 위험 수위에까지 이르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든다. 더구나 세상에 유행하고 있는 집단 이기주의와 맞물리면서, 가족 때문에 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에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또 그것을 ‘가족 중심 사역’이라는 말로 합리화하고 있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를 조차도, 가족의 사생활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집을 오픈하고 삶을 나누는 것을 꺼려하는 것도 이런 가족 중심 사역의 왜곡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5) 치유사역의 결과로 부딪힘을 두려워 함
가족 중심 사역과 더불어, 20세기말 기독교를 강타한 기독교의 심리학적인 접근, 즉 치유사역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각자가 가진 ‘쓴 뿌리’혹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강조하고, 또 그 손길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더 나아가 사람들과의 더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이 시도는 분명 우리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는 법. 치유 사역이 장기화됨에 따라, 사람들은 이제 ‘쓴 뿌리’를 가지게 되거나,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을 너무도 두려워 하게 되었다. 물론 치유 사역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로 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구성원끼리 교제하고, 부대끼고, 또 그 문제를 통해 상호 성장케 하시는 하나님의 통로인 공동체 자체를 꺼리게까지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괜히 사람들하고 부딪히고 상처 받느니, 적절하게 신앙 생활하는 게 더 나아’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들을 수 있는가.


(6) 공동체를 경험한 참 목자가 드물다.
한 사람이 결심하고, 시험을 통해 학교에 입학한다. 소정의 수업과정을 마치면, 학위를 주고, 그 사람이 한 모임의 리더로 임명된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 모임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이끌어 간다. 우리는 이런 모습에 너무도 익숙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동체에서의 리더는 다른 점이 요구된다. 바로 양을 치는‘목자’라는 것이다. 자신이 기르는 양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참 목자를 요구한다. 조직 교회가 공동체성을 외치면서도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조직교회의 리더인 목회자가, 많은 경우에 있어, 양을 돌보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과정 속에서 성립된 리더십이 아닐 뿐만 아니라 – 즉, 양들도 그들을 목자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 그들 스스로도 양으로써 목자의 돌봄을 받아본 경험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단 조직교회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각 지역 교회 리더들의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경험 부족은, 공동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의 심각한 원인이 되어 왔다. 더구나, 교회의 리더를 배출하는 신학교 자체가 경쟁구도로만 되어 있을 뿐, 공동체를 경험할 수 없게 되어있다는 점도,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을 약화시키는 이유라고 대천덕 신부님은 지적하셨다.


(7) 좌절을 통해 적절한 수준으로 기대치를 낮추어 버렸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누구나,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의 회복에 대해 한번쯤은 고민하고 노력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늘 좌절과 실패만을 맛보게 되고, 또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기대치 자체를 낮추어 버린 듯 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결국 이상이야.’라고 생각하며, 남들 보다 조금 더 잘 모이는 수준의 단체를 ‘공동체’라고 착각하고 만족하고 사는 경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우리의 수준이 안된다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이 바뀌는 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면서도, 우리는 공동체에 관해서는 왜 이리도 넓은 마음을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3. 공동체의 성경적 의미


그렇다면, 성경에서 공동체가 왜 그토록 중요하며,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자체로 공동체셨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어떤 신으로 묘사된 존재도 세분이 완전히 하나되는 공동체성을 지닌 모습은 없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 높고 낮음도 없고, 불일치도 없으며, 분리됨도 없으신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가 공동체이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에게도 동일한 공동체성이 존재하게 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단 한가지 좋지 못하다고 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었다. 완전한 공동체이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혼자 있는 아담의 모습은 당연히 좋지 않게 보이셨고, 그로 인해, 하와를 창조 하심으로써 인간 공동체의 시작인 가정을 시작하셨다.


(2) 하나님은 공동체로 역사를 이끌어 오신다. (신인공동체)
아담과 하와로 대표되는 인간과 하나님은 그 자체로 하나되는 ‘신인(神人) 공동체’였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인간의 원하는 바요, 인간이 바라는 바가 하나님의 마음인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되기를 자처하며 죄를 짐으로써, 그 신인공동체는 깨지게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이 이루는 신인공동체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보여 주시듯이, 하나님은 새하늘과 새땅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함으로 새롭고 영원한 신인공동체가 완성될 것을 약속하셨다 (계21:1-3). 이 완성된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죄가 없고, 또 죄를 지을 내적 요소가 없기에 절대로 파괴될 수 없는, 또 눈물이나 사망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 영원한 신인공동체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깨어졌지만, 종말에 다시 완성하시겠다는 공동체, 즉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는 신인 공동체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시 인간들의 공동체를 사용해 오셨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옛언약을 맺으셔서 이끌어 오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건 이후에는, 그의 피로 사신 공동체를 통해 일하시고 계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공동체 추천 도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3) 예수님의 유언 (요 17장)
지상명령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28:18 20이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주신 유언으로 큰 의미가 있다면,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하신 중보 기도인 실제적인 유언으로써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8).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자신을 믿는 길을,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개개인을 통한 사역을 넘어, 믿는 자들의 연합을 통해 일하시려는 예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4. 공동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


(1) 지금은 공동체의 시대이다.(에클레시아)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은 하나님께서 에클레시아를 통해 일하시는 시대이다. 각자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성이 중요한 만큼이나,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제 또한 너무도 필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2) 공동체는 선택이 아니다. – 내가 공동체를 위해 죽는다.
‘왜 꼭 교회에 나가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대답은, 장작의 비유가 아닌가 싶다. 즉 장작 하나를 따로 떼어 놓으면 곧 꺼질 수 밖에 없으니, 장작 더미인 모임에 참석해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공동체의 모습은 이것보다 훨씬 강하다. 다시 말해, 홀로 있는 장작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는 장작은 그 모습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나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관계성 자체가 공동체를 통하지 않고는 바르게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다.


(3)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공동체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 모임을 통해 받게 될 상처, 간섭, 혹은 후유증 등 때문이리라. 하지만, 본 회퍼의 말대로, 사람에게 철저하게 실망한 바로 그 자리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동체를 시작하신다는 말을 기억 해야겠다. 우리는 죄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이기에, 그 사람들의 만남 속에서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마음을 열면 열 수록 더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서 공동체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너무 연약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해서, 포기해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결코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지면 일어나고 한걸음씩 전진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공동체도, 우리가 쓰러진 그 곳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야만 한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때라도.


5. 공동체에 대한 초보적 대안


(1)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모토는 공동체의 회복을 의미
우리가 그토록 자주 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모토의 참 의미는,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각 그룹의 소유까지 공유했던 실천 공동체인 초대교회!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시간과 물질, 또 공간까지 기꺼이 나누며,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 실천의 삶이, 바른 공동체를 위한 첫 걸음일 것이다.


(2) 제자도를 실천하는 공동체
예전에는 열심이 있었다가, 최근에는 교회만 출석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아직도 자신이 좋은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은 공동체를 통해 일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과의 부딪힘 없이는 내 자신을 바로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른 지체들을 통하지 않고는 바른 훈련을 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각 공동체들도 이 점을 인식하고, 교제만 강조하거나 공부만을 강조하지 않는, 훈련 지향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가야만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가질 수 있으리라.


(3) 열려있지만, 또한 닫힌 공동체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최고의 고민은 공동체의 성격이 아닐까 싶다. 가족같은 공동체를 꿈꾸고 가자니, 외부 사람들에게는 자기들끼리의 모임으로 비춰져 다가가기 어렵게 되고, 또 외부인이 쉽게 접근하는 모임을 갖추자니, 내부의 결속이 떨어지는 점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이 두 가지 특징이 성령 안에서는 가능하리라 믿는다. 물론 그 구체적인 방안들은 계속 논의되고 있고, 또 우리고 계속 고민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열려있지만, 닫힌 공동체’ –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이어야만 한다.


(4) 기능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공동체
한 모임은 그대로 놓아두면, 기능 중심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일 중심으로 사람을 배치하고, 또 일 중심으로 모임을 끌어가다 보면,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모임이 잘 흘러갈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과의 관계성이다. 이 점은 모두 인지하지만, 놓치기 쉽기에 더 가슴에 담고 모임에 임해야만 한다.


(5) 실천적 행동에 의한 선교 중심지
늘 문제가 되는 것 중의 또 한가지는 공동체가 모여서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이다. 이런 모습을 많인 접한 사람의 경우는, 공동체가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고, 세상에 해야 할 우리의 사명만을 강조하기 쉽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른 공동체의 모습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실천적 공동체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공동체의 삶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도 또 사역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흩어 버리는 교회가 아닌 스스로 흩어지는 공동체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6) 작은 씨를 뿌리는 공동체의 개척자
본 적도 없고, 경험해 보지도 못한 일을 처음 시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동체를 경험해 본 리더가 드물다는 것은, 현재 공동체성의 부재 현상을 넘어서, 참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걸림돌이 된다.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혹은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늘 좋은 것으로 주시려고 함께 계시는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태에 적당히 만족하고 지내거나, 혹은 좌절하며 포기하고 있기 보다는, 도대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인지 계속 배워가며, 그 작은 일을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프론티어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겠다.


하고픈 이야기는 많은데, 지면이 넉넉지 않아 아쉽다. 그래서 간략히 요점만 쓰다보니, 글이 딱딱해져 버린 점 양해해 주기 바란다. 이 글은 참고 도서 목록에 있는 글들을 많이 참고해서 쓰여졌다. 또한 부족한 한 유학생의 글이기에 틀린 점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애정 어린 질책과 충고를 기다리는 바이다. 또한 다른 의견도 많이 나누어 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