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7년 4월호

박사 과정 초반, Qualifying exam 때 있었던 일이다. 전자공학에서 신호처리를 전공하는 내게, 한 교수는 몇가지 시스템에 관한 정의와 예제들을 풀 것을 요구했다. 천만다행으로 그 문제들을 나름대로 잘 풀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한가지 질문이 더 주어졌다. “이 정의들이 모든 시스템에 적용되나?”라는 문제였고, 나는 조금 생각한 후에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qualifying exam을 보기 좋게 떨어졌고, 2차 시험을 기다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문제에 대한 답은 ‘그 정의들은 선형 시스템 (linear system)에만 적용되는 것이지, 비선형 시스템 (nonlinear system)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대단히 기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접하고 있는 ‘입력이 A이면 출력이 B이다.’라는 멋진 공식들은 모두 선형(linear) 시스템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댓가를 톡톡히 치루어야만 했던 것이다.


물질주의를 진리로 여기고, 과학 만능 주의가 지배하는 현 시대의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구조의 한가지 특징이 바로 ‘직선적 사고’이고, ‘수량화’이다. A라는 입력이 있으면, 반드시 B라는 출력을 기대하는 ‘직선적 사고’는 과학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구석 구석에 배어있다. 또한 어떤 상황이라도 수량화하고 분석하려는 경향이 자신도 모르게 우리에게 있음을 보게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고 하자. 학생들 한사람 한사람이 소중하므로, 각각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겠다고 마음먹고 새로운 학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수십명의 학생 각자의 처지를 돌아보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은, 곧 몇가지 기준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공부는 잘하는지, 지각은 하지 않는지, 말썽을 부리지는 않는지…’ 등등. 그리고는, 그 학생이 ‘왜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아니면 왜 공부를 못하는지. 혹은 어떤 특별한 사정에 의해 지각을 하는지, 아니면 관심을 끌기위해 말썽을 부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부 잘하고 지각 않하고 말썽부리지 않으면(A), 좋은 학생이다(B) 라는 직선적 사고를 가지고 학생들을 ‘수량’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좋은 학생’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지 공부 잘하고 지각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학생’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이지만 어쩔 수 없다. 또한, 공부 못하고 지각하고 말썽 부리는 학생을 대하는 선생님은 그 해결책으로 몇 가지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보충수업을 진행하면서, 성적이 올라갈 것을 기대하고, 체벌을 통해 지각하지 않게 독려하며, 반성문을 쓰게 하여 말썽이 줄어들 것을 기대한다. 물론, 이 선생님도 그런 프로그램들이 눈에 띠는 결과는 내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질주의가 팽배한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찬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성들 중의 대표적인 것은 ‘기복주의’일 것이다. 물질적 복과 성경적 복을 구분해 내지 못함으로써, 돈을 많이 벌고 외모가 출중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착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물질주의의 위험성을 한가지 더 생각해 본다면 직선적 사고에 의한 ‘프로그램화’와 ‘수량화’가 아닐까 싶다.


현대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학자 중의 한명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의 미래’라는 저서에서 이런 직선적 사고를 경고한 바 있다. 그는 한 예로, 최근 10년 이상 영국과 미국 교회를 강타했던 Alpha를 예로 들었고, Alpha 코스의 문제점으로 ‘어느 시점에서는 어떠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이후에 미국교회에서 진행하는 Alpha 코스를 수강했는데, 그 과정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맥그래스의 지적처럼 직선적 결과를 기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주 한 과정을 들을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예측하고 있는 듯 했다.


각 지역교회들 역시, 몇가지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직선적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지역교회 성도들이 전도를 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그들이 ‘왜 전도를 하지 않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새생명 축제’같은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한다. 또, 성도들의 가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아버지 학교’ ‘자녀 교육 과정’이니 하는 프로그램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나는 그런 프로그램이 가치가 없다던가 어떤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특정 문제에 대한 근본적 고민없이 프로그램으로 해결하려는 태도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프로그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 문제의 근본에 접근하여 차근히 해결해 나가는 것에 비해 보다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선택한 길은 결국, 물질주의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도구화’ 혹은 ‘비인간화’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즉, 몇가지 프로그램으로 당장은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무릎 꿇고 해결 해야만 하는 ‘다소 복잡하지만 근본적인 과정’을 무시하게 한다. 인격적인 관계는 선형(linear)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에 의한 ‘직선적 사고’의 또 다른 문제점은, 한 개인의 신앙조차 ‘수량화’하려는 경향이다. 내 자신만 살펴보아도 잘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나의 믿음은 몇가지 단순한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열심히하고 기도 시간이 길어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본다. 반면, 짧은 기도 속에 하나님께 나 자신을 의지하는 깊은 신뢰의 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려는 우리 자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이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출석하는지, 봉사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십일조는 하고 있는지, 새벽기도를 참석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점수를 부과하여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려고 한다. 지역교회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곤 한다. 한 지역교회를 참석하여 몇주만 지나면, 그 교회에서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교회의 경우, 새로온 멤버가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지속적으로 참석하고, 십일조를 내며, 선교기도 모임에 참석하여 선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 ‘정말 신앙이 좋다’라고 평가한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는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한채 말이다. QT를 하는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지, 십일조를 하고 봉사를 하는지의 여부로 신앙을 평가하려는 경향은 분명 근,현대의 물질주의의 결과만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인간이 가진 종교성 자체가 어떤 행실로 그 가치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느냐에 따라 신앙을 평가하고 있었고, 그런 경향은 기독교 역사에 늘 있어왔다. 하지만, 그런 율법주의적 종교성이 현대의 물질주의를 만나 그 이론적 기반을 확립하고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신앙은 몇가지 현상만으로 수량화될 수는 없다. 또한 우리가 지닌 문제들이 몇몇 프로그램으로 해결되지도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선형(linear)가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직선적 사고를 진리로 여기고 있고, 그런 흐름에 역행하면 뒤떨진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이런 흐름에서 돌이켜 진리를 향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가시밭 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될 수 없는 일, 그래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쉽지 않은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는 것이기에, 그 길을 함께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