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4월호


1. 자발적 고난: 예수님의 고난만을 강조하다보면, 외부에 의한 타율적인 고난으로 비쳐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영화를 접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끝없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자발적인 고난의 관점이 대단히 잘 그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택해서 가시는 고난의 길…


2. 영적인 고난: 고난을 시각화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단점은, 지나치게 육체적인 고난에만 초점이 맞춰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죄로 인해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가는 영적인 고난의 의미도 나름대로 잘 부각되어 있는 듯 싶었습니다. 또한 자발적인 고난의 동참이기는 하지만, 어려움을 피하고픈 인간적인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면서 오는 고난 또한 잘 표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3. 건강한(?) 사탄: 가장 우려한 부분은 사탄의 역할이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그저 그렇게 교회를 통해 들어오던 사탄의 역할,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는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사탄의 모습으로 그려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타난 사탄의 역할은 초지일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막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고, 또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패배에 고뇌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그들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탄… 그 건강한(?) 사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 ^


(Seattle에서 C형제)




Passion of the Christ 가 원 제목인데 여기서의 Passison 이란 ‘열정’이라는 뜻이 아니라 ‘수난’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서양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한 많은 유산들이 있지만 흔히 잘 알려진 것으로는 음악에서의 수난곡을 들 수 있습니다. 독일의 하인리히 쉬츠의 마태수난곡을 위시로 해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이 특히 유명하죠. 물론 핸델의 메시아 2부의 제목도 수난과 죽음이죠. 따라서 이 음악들은 대개가 아주 슬프고 애절합니다. 아마 이 영화의 제목이 Passion으로 정해진 것도 이런 서양의 전통과 무관치 않을리라 생각합니다.


신문지상에서의 설명을 보면 아주 엉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대로 만들었다는 말도 그렇고 모니카 벨루치가 연기한 역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써 놓은 것들도 그렇습니다. 후자를 먼저 언급하면 성경상에는 많은 마리아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에서의 마리아(예수께 향유를 부은 바로 그 여인), 일곱 귀신 들렸다가 풀려난 마리아(눅 11:2),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등등….. 이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일곱 귀신들렸다가 풀려난 그 마리아 입니다. 물론 누가,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돌아가실때도 있었던 것 같고, 또 무덤에 간 여인들 중에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데 영화에서의 모니카 벨루치는 분명 간음하다가 붙잡혀 예수님 앞에 왔던 여인으로 나옵니다, 이 여인은 이름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요 8:1-10) 그냥 간음한 여인일 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간음한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를 일치시키는 인식은 꽤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멜깁슨도 그런 인식을 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임종에 함께 하던 막달라 마리아와 간음한 여인을 동일한 배우로 연기하게 한 모양인데 성경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자연히 이야기가 성경과의 일치로 옮겨졌는데 대개 성경에 근거하긴 했지만 중요한 부분들에서 성경과는 무관한 내용들이 나타났습니다. 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후에 뱀의 머리는 부수는 모습은 매우 상징적인 모습이기에 성경에는 없더라도 꽤 좋은 장면인 것 같습니다. 빌라도의 부인이 피를 닦을 수건을 주는 것도 상상할 수 있고요. 그러나 헤롯에게 넘겨진 후 다시 빌라도 앞에 올때 헤롯은 분명 빛나는 옷을 입혔다고 되어있지만(눅 23:11) 영화에서는 복장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건 뭐 작은 부분이지요.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길에 한 여인이 수건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이 얼굴을 닦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건 전혀 성경에 나오지 않는 허구입니다. 다만 이 장면이 삽입된 이유는 충분히 추측 가능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수건을 드렸고 그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대로 찍혔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전설에 의거하여 베로니카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축일도 만든 모양이지만 성경상의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후 고통속에서 갈증을 호소하시는 장면에서 로마 군병이 해융에 포도주를 적셔서 창에 끼워 예수님의 입에 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상에는 해융을 댄 주체가 누군지 모를 뿐 아니라 창이 아니라 우슬초에 매어 댑니다(요 19:29)


뭐 좀 더 있겠지만 제가 지적할 수 있는 내용은 이 정도입니다. 상당히 성경에 근거해 만들었지만 완벽하다는 말은 할 수 없지요. 이건 제 느낌이지만 성경과 더불어 가톨릭의 전승이 아마도 함께 주요한 원전이 된 인상을 받습니다. 베로니카의 이야기도 그렇고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이 극명하게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예수의 고난 못지 않은 고통을 겪는 것으로 영화에서는 묘사되고 있는데 성경에 근거하기 보다는 가톨릭에서 성모를 존숭하는 상황이 투영된 인상이 짙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내린 후 그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떠오르게 합니다. 주지하듯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임명하에 가톨릭 성화 조각을 그리는 데 평생을 보낸 인물이죠. 그리고 시신의 발아래서 마리아가 불렀다는 노래는 가톨릭 작곡가들에 의해서 ‘스타바트 마테르’ 라는 곡명으로 아주 많이 작곡 되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눈물의 성모’가 되죠. 교황청 공식 인정 성가입니다.


멜깁슨이 아주 보수적인 가톨릭 신도임을 감안한다면 영화의 내용이 이렇게 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Ann Arbor의 H형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 자신이 매우 주관적이고 논리에 약한 typical intuitive thinker 인 관계로 보다 비판적, 분석적인(^^) 평가를 원하신다면, 그것은 다른 분들께 미루고 싶구요. 간략하게 몇 가지만 나눌까요?


영화화 되었다는 것에 대해…
무엇보다도, 영화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간 말씀과 일상 속에서 가져온 ‘강렬하고 가슴 아프긴 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이었던’ 주님의 고통에 대한 느낌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신체적 고통을 드러내는 데에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 하여서 관객의 눈물을 짜낸다는 비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성경말씀에 바탕하여 (난잡하게 말씀을 우롱하듯 이용해온 다른 영화들과 달리)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씀이 다시 한번 대중에게 선포되어지는 효과가 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난받으시는 ‘피가 낭자한’ 장면마다 성경 말씀이 함께 시각화 되었고, 대부분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 마음을 읽어내려가는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속 폭력성에 대해…
또한, 영화 속 장면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too much bloody”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해서는 우리 죄가 바로 그만큼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는 사악한 것이라고 대답해주고 싶습니다. 우리 죄성이 그만큼 끈질기고 추악하기 때문에 주님의 피흘리심도 끝까지 한방울도 남김없이 쏟으셔야만 했던 것 아닌가요? 그런점에서 눈물을 짜내기 위해 피흘림이 과장되었다거나 너무 폭력적이었다는 비판은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자세로 관람하셨는지…


영화를 관람하기 전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극장에 갔는지도 영화의 소감에 상당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한 자매가 있어요. 새벽기도할 때, 지난 2년간 무릎 꿇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영화를 본 다음날로 부터 매일매일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참회하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삼일 동안 이 자매의 전화와 이메일에 채근되어 등떠밀리다시피 극장에 갔습니다. ‘뭔가가 진짜 있나보다!’ 기대가 은근히 되었습니다. 그리고 극장에 가기 전, 공관복음의 말씀을 찬찬히 복습하고 갔습니다. 아예 은혜 받으려고 작정하고 갔는데 왠만한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다해도 크게 영향을 받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객관적 평가가 힘드네요. ^^ 일각에서는 영화에 대해 격찬을 너무 많이 듣고 기대를 하고 가는 바람에 오히려 기대에 못미쳤다는 이야기들도 하더군요.


한 가지 덧 붙인다면…
‘주님의 고난이 바로 내 죄때문’이라는 것을 잘 연결시키지 못할 것 같다는 지적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네요. 곰곰 생각해봤는데, 제 짧은 생각으로는 그 부분은 영화 제작자가 나서서 뭐라 말 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마치 저희 사회학과의 모든 교수님들과 대학원생들이 성경을 적어도 한번 이상 정독했지만, 이들 중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무엇을 본들 무엇을 들은들 믿음과 합하여지지 않았는데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저는 그냥 영화 끝나고 앉은 자리에서 기도하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 자리에 앉을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저 그 사람의 마음이 ‘저 피가 내 죄를 사했다’고 인정하게 하옵소서.”


끝으로…


아래는 메신저에 연결된 친구들, 학우들, 성경공부 지체들에게 물어서 급하게 모아본 후기입니다.


21살 남. 대학생. NY. “파워풀하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준 점이…영화에 대해선 잘 만들었다 못만들었다 등등.. 뭐라 할말은 없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31살 여. 대학원생.MI. “I wasn’t as impressed as the “public”. It made me think about Jesus’ suffering but don’t think it had that much impact other than that. And I thought this as just Mel Gibson’s interpretation… and I feel that reading Bible has much more impact on me than seeing the movie.”


36살 남. 선교사. NY. “성령에 감동된 영화다. 타락해가는 미국 영화 산업에서 하나님의 일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보고 감동 받도록 기도해주십시오.”


27살. 여. 대학원생. NY. “영화 속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29살. 여. 대학원. NY. “잔인하다고만 생각하면 잔인하지만, 그 안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진정한 의미라고나 할까..”


30대 후반. 남. 청년회 담당 목사님. NJ. “가장 성경적인 영화다. 예수님의 고난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초신자보다는 나일론 신자가 보면 좋을 것 같다.”


20대 후반. 남. 직장인. NJ. “일부에선 폭력적이라는 말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기우다. 고난 주간에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적극 추천. 저도 고난주간에 다시 한번 볼 생각입니다. 크리스찬 문화가 세상 문화에 일침을 가했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인 내용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되었으면 한다. 성경적으로 돌아가면 가장 확실히 어필한다는 확신을 준 영화였다.”


27살. 남. 대학원생. (비기독교인) NY. “너무 헤비한 영화다. 진정이 잘 안된다. 왜 그렇게 유대인들은 잔혹하게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난 아직 볼 준비가 안된 영화 같다. 괜히 본 것만 같다.”


28살. 남. 대학원. (비기독교인) NY. “정말 사람들의 잔인함 속에서…그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33살. 남. 대학원. NY. “두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죠.하나는 아마도 실제적상황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제작자의 노력 의도로 본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에 상당한 성공을 한 영화라고 생각하구요,,.두번짼 예수님의 그런 사역의 고통이 제작자들의 영화틀속에 고정화되어 또다른 편견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이를테면 예수님의 육체를 통한 고통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도 있지만 실제로 낮은 곳에서 더 천한 피조물들이 예수님께 가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모멸감과 학대 그것을 능히 감당하셨다는 면이 오히려 더 클수도 있고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그러한 정신적 고통이 더 컸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NY에서 K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