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영화를 본 후 자꾸 생각이 났던 말씀들이 있어서 잠깐 나눕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랄 것이다. 이것은 그의 모습이 너무 상하여 사람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 52:14, 현대인의 성경)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개역한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22:6)


심해지는 채찍질과 십자가의 못 박히시는 장면들은 눈뜨고 보지 못했고 (그것을 눈뜨고 보지도 못하겠고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기도 힘이 들어서 내 안에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 그대로 정말 사람의 모양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벌레의 모습으로… 도수장에 끌려가시는 잠잠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DC에서 K 자매)



저는 감정이 팍팍한 사람이라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늘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C.S. Lewis가 예로 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고 죽어서 부활할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회의하는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서 예수님의 고난이 장난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리얼하게 느껴지던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나니 -아리러니컬하게도 –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고통을 주는 형벌이라는 식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극대화 시키는 말들을 우리가 많이 들어 왔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를 보고서 굳이 십자가가 가장 지독한 형벌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의 육체가 감당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지독한 고통이 있었다는 (가장 지독하고 아니고는 관계없이) 것으로 인해 그 구체성과 상징성이 다 만족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십자가의 고통이 제게 크게 다가와서 저를 심각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려고 단호히 기도 하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으로 가시려고 하는 장면들이었습니다. 글쎄요, 며칠 갈 지 모르겠지만, 고난받으시려고 기도하고 결심하고 (맨 첫장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끝까지 그 길을 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계속 생각납니다. 피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고통을 정면에서 받으시니까 더욱 그분의 고난이 증폭되어 다가 왔었고, 이제 제 마음을 심각하게 돌아보게 만듭니다.


빌라도가 기회를 줄 때에, 차라리 대답을 잘 해서 그냥 풀려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였는데, 베드로가 똑 같은 제안을 했다가 “사단”이라는 꾸중까지 듣는 것이나 영화 속의 사단의 생각이나 다 한가지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사실은 저 자신에 대한 동정이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의 엄연한 태도가 부각됩니다. 그녀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이 받는 고통이 그대로 그녀에게 느껴지는 장면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인식의 확고함 (믿음)이 그려졌습니다.


(Seattle의 K형제)


작년 초에 멜깁슨이 예수님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기사를 잡지에서 읽으면서 흥분했었습니다. 헐리우드에서 영향력있는 영화배우 중 하나인 멜깁슨이 크리스찬이라는 것도 놀랍고 기뻤고, 그가 자비를 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참 고무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개봉되면 꼭 성경공부 지체들과 함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예정일보다 조금 늦게 그러나 때 맞춰서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개봉되었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때 맞춰”라고 생각한 이유는 마침 성경공부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을 볼 때와는 달리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는 지체들이 본문을 많이 어려워했고 특히 예수님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이 영화가 본문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관람에 대해 광고를 하고 함께 볼 날짜를 정한 후에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져있는지 보지 않았기에, 지체 중에 혹 믿음이 약한 이들이 보다가 감당 못하고 시험에 들게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멜깁슨이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했는지 모르기에 혹 왜곡된 장면이 있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또한 함께 보는 지체들이 이 영화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느껴보고, 지금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을 잘 이해하게 되었으면 하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성경공부 지체들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영화를 보기 전에 뭔가 준비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자매는 마태복음을 읽으며 제게 영화를 보기 전에 성경 어디를 봐야 도움이 되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지체들의 관심과 그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에 감동하며 성경공부 사상 처음으로 터프하게 숙제를 냈습니다. “영화보기 전에 요한 복음 읽어오기.”


영화를 보는 날 저녁 캠퍼스에 모여 출발하기 전에 기도를 했습니다. 여느 때 친구들과 영화보러 갈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과 자세로 가는 길 내내, 또 극장에 들어가면서도 지체들을 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극장에 들어가면서 한 자매가 “난 영화보러 극장에 가면 항상 자거든. 그래서 친구들이 나랑 영화보러 가는 거 싫어했어” 라고 하는 겁니다. 속으로 가슴이 철렁해서 그 자매가 졸지 않기를 또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듣던데로 잔인하고 피흘리는 장면이 많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잔인하고 무서운 장면을 볼 때는 눈을 질끈 감거나 소리가 안들리게 귀를 막으면서 보던 제가 그 날 만은 두 눈 똑똑히 뜨고, “잔인하다, 징그럽다”는 생각 한번 안하고 조용히 눈물만 흘리며 보았습니다. 그 분이 맞으시는 채찍, 바닥에 낭자하던 피, 지고 가시는 크고 무겁게 보이던 십자가, 그 분의 손과 발에 대고 무섭게 때리던 망치소리… 그 모두가 제게 외치고 있었디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옆에서 보던 예의 그 잘 잔다던 자매의 눈이 퉁퉁 부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 옆에 앉았던 지체들이 나오면서 하는 말이 그 자매가 영화 시작하면서 부터 끝날 때 까지 어찌나 엉엉 울며 통곡을 하던지 시끄러워서 영화를 못봤다고 했습니다.


영화의 무거움에 마음이 부담이 된다는 지체들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영화본 걸 나누러 캠퍼스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것 보단 나누면서 서로 느낀 것들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파서 함께 영화보러 가지 못한 어느 자매가 사랑으로 준비해준 스파게티를 먹고나서 돌아가면서 느낀 것들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지체들이 어떻게 봤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부모님이 아직 안 믿으셔서 전도에 관심이 많은 한 자매는 “전도용으론 안 좋은 영화같아.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다루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고난에만 촛점을 둔 것 같아” 라고 했습니다. 다른 한 자매는 “영화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예수님이 정말 저렇게 까지 잔인하게 고난당하신 줄 몰랐어요” 라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조금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또 한 형제는 “인간이 저렇게 까지 잔인할 수 있다는 걸 느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지체들의 나눔을 들으며 감사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지체들의 나눔을 들으며 그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분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 분의 고난을 묵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성공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영화를 본 다음 주에 요한복음 19장을 공부하면서 지체들이 이제는 영화를 보고 나니까 장면이 상상이 되고 이해가 된다며 풍성히 나누는 걸 보면서 또 한 번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영화의 장면들이 지체들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서 세상살이 하다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에 들려고 할 때,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길 소원하며 기도해 보았습니다.


(NY에서 K 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