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6년 3월


교역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 거나하게 만나 진중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화요일 아침 교역자회의 시간. 나에게는 일주일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시간이다. 함께 동역하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어린 2세 고등부 전도사님이 진지한 표정과 어투로 내게 질문해 온다.


‘요 즘, 주일 영어고등부 예배에 성가대 가운을 입은 성가대의 찬양시간이 뭔가 어색해서 예배에서 어떻게 순서를 배치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나의 조언을 구하는 눈치이다. 내심 충격적인 말이다. 예배에서 성가대의 위치가 위협을 받는 시대가 드디어 찾아온 것인가?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것이냐고 물어보는 그의 진지한 질문 앞에서, 말은 안하고 표정을 애써서 잠재우고 있었지만 나의 뇌리에서는 쉴 새 없는 질문의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예배담당 목사라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 착각인데… ‘음, 일단 성가대의 역할이 예배에서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나의 질문에 본인도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였는지 쉽게 답변하지 못하는 우리 전도사님… 성가대의 역할이 축소되고 찬송가가 사라진 예배에 이미 익숙해진 세대와 직접 대면하는 일은 무척이나 생경하다.


그 사이에 나의 생각은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샛별성가대’에서 자줏빛 가운을 입고 솔리스트로 어린이 예배에서 활약하던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양떼들아 양떼들아 바람 타고 들려온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내 주는 반석이시니…’ 목청껏 힘껏 부르며 친구들과 어울리며 교회당을 누비던 어린 시절. 어린이 찬송가는 우리들에게 학교 음악시간에 부르는 동요가 줄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장르였다. 동요보다 조금 더 세련된 듯 한 화성에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 어린 시절 주일학교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런데 어린이 딱지를 떼고 중고등부로 올라가면 이야기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린이 찬송가는 그야말로 ‘초딩’들이나 부르는 동요 수준의 찬송가이지 머리 큰 사람이 동요 찬송가를 부를 수 있나? 드디어 부모님이 끼고 다니시는 바로 그 찬송가가 우리 예배의 주요 찬양 목록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558곡의 통일찬송가를 살펴보면 그 많던 어린이 찬송가의 익숙한 멜로디는 다 사라지고 어린이 관련 찬송가는 달랑 4개. 청년에 관한 주제의 찬송가는 더해서 달랑 2개뿐이다. 그나마 청년 헌신예배 같은 때나 부를 수 있는 그런 찬송이다.


아 직은 경배와 찬양 운동이 활성화되기 전에 교회 중고등부 시절을 보냈던 내게 주일예배 시간의 이러한 찬송가들은 그야말로 어색함 그 자체였다. 이제 어른의 세계에 입문하는 듯 그런 마음으로 찬송가를 배우고 부르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복음성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런 찬양들로 주일예배 이외의 다른 예배모임에서 기타 들고 엄청나게 부르면서 위안을 삼던 그런 시절이었다. 최덕신이라는 이름이 세인에게 알려진 ‘주찬양 1집’ 테이프를 물리도록 들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 래서인지 몰라도 이젠 중고등부를 비롯한 모든 젊은 세대의 예배에서 찬송가의 위치는 그야말로 옹색하기가 그지없다. 우후죽순처럼 밀려든 새로운 찬양들이 이젠 ‘복음성가’라는 이름이 아니라 어엿한 예배음악으로 자리를 잡은 지 이미 오래인지라 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너무나 자연스럽고 호흡하기에 편안한 그런 새 찬양들이 이들의 예배를 가득 채우고 있다. 힐송, 호산나, 패션 등등의 외국의 찬양음악들이 나오기가 무섭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서 음반과 악보로 시장에 등장하고 곧바로 교회의 예배음악에도 진입해 오는 시대이다.


그 래서인가?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오 놀라운 구세주 내 주 예수…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여…’ 같은 찬송가들이 완전히 잊혀지는 일을 예감하는 것은 매우 두렵다. 우리 속담에 있는 말이던가?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일이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본인도 이미 기성세대에 진입하기 시작한다는 그런 징조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우 리가 잘 알다시피, 현재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558곡의 찬송가에는 수준이 좀 떨어지는 그런 찬송가들도 꽤 있다. 그래서인지 새롭게 준비되는 찬송가에는 대대적인 찬송가의 개편이 있을 거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데 ‘21세기 찬송가’를 찬송가편찬위원회에서 준비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된 이야기인데 20세기가 훌쩍 지나버린 지금에도 이 새로운 찬송가는 나올 줄을 모른다. 출판에 관한 독점권으로 인한 정치적인 입김이 세서라고는 하는데… 하여간 걱정이다. 어쨌거나 이 찬송가… 그 안에는 1800년대 말의 부흥집회에서 사용된 전형적인 미국식 찬송들도 많지만 교회사의 보석처럼 빛나는 간증과 역사를 가진 그런 고결한 찬양들도 수없이 존재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작사한 시적인 찬양의 가사들과 함께 아름다운 멜로디들로 끝없는 영성의 신선한 자극을 제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찬양들이 있다. 이런 찬양들은 포기하면 안 될 것이다. 모든 새로운 것이 모두 탁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Chris Tomlin이라는 걸출한 예배자가 후렴만 따로 만들어서 편곡한 The Wonderful Cross라는 찬양이 여전히 이 새로운 세대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큰 증거가 아닐까?


The Wonderful Cross (Chris Tomlin 편곡)


When I survey the wondrous cross


On which the Prince of Glory died


My richest gain I count but loss


And pour contempt on all my pride


See from his head, his hands, his feet


Sorrow and love flow mingled down


Did ever such love and sorrow meet


Or thorns compose so rich a crown


“O the wonderful cross, O the wonderful cross


Bids me come and die and find that I may truly live


O the wonderful cross, O the wonderful c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