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5월

미 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교회의 예배 흐름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어느날 한 신문 기사 하나가 눈에 쏙 들어왔다. 그 기사의 제목은 “젊은층 중심의 미국교회에서 유행하는 포스트모던식 예배.” 포스트모던 이라는 단어와 예배라는 단어가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 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는 대신 관자놀이나 가슴에 손을 갖다대는 중세의 명상적 기도를 한다. 이른바 ‘떠오르는(emerging) 교회’로 불리는 포스트모던 세대의 교회들 일각에서 전통적 방식과는 다른 명상적 형태의 기도와 예배방식이 유행하고 있다고 최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이 교회들은 비제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기성교회로부터 ‘젊은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는 찬사와 함께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지 금껏 미국 교회가 윌로우 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의 모델을 따라 교회가 주는 구세대적인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80년대 이후 계속해서 추구했던 모델, 그것을 편의상 구도자 중심의 예배(Seeker-sensitive worship)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런 흐름에서 무엇인가 다른 하나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2,30대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겨우 교회에 데리고 간다고 치면 이들에게서 나오는 첫 반응은 ‘교회가 교회처럼 생기지 않았다. 무슨 교회가 마치 월마트 같다’고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세대가 형식화된 교회의 예배와 종교적인 형상들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가지고 극도로 제도화된 것(established religion)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떠오르는 새로운 세대는 오히려 종교적이고, 영적이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교회로부터 기대하고 나아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7,8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세대에 비해 2000년대에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세대들이 영적인 문제, 초현실적인 문제에 관해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갤럽 조사는 이러한 현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2004년 2월25일 크리스찬 투데이에 실렸던 이 기사를 좀 더 인용해 보면 어떤 미국 교회의 예배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니애폴리스의 젊은 교회 ‘블루어’에서 열린 최근 토요예배. 대부분 20,30대인 교우들은 의자와 촛불로 채워진 공간 주위에 둥글게 둘러앉아 있고 한가운데는 존 뮤직 목사(37) 가 드럼세트 곁에서 3명의 음악목회팀과 함께 앉아 예배를 이끈다. 여기저기 각종 파이프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등불 아래의 벽들엔 옛 돌십자가와 석상들을 담은 슬라이드와 비디오 등이 비쳐진다. 탈색한 티셔츠와 블루진 차림에다 무스를 바른 머리 모양의 뮤직 목사는 설교 대신 회중들을 3대의 ‘임시제단’으로 초청한다. 제단 위엔 기도제목을 적은 카드뭉치가 놓여 있다… 이들의 일부는 교단에 소속돼 있고 전통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 대다수는 복음적이지만, 동방정교회나 중세교회, 수도원 등의 고풍을 답습, 중세기도문, 기도 미로, 렉티오 디비나, 고대 성시, 명상문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브라이언 매클러렌 목사(48세, 시 더리지 커뮤니티 처치)는 아메리카의 광대한 젊은층 인구를 겨냥한 선교적 목회를 “모국어와 모국문화를 사용하는 외국선교”에 비유한다.”

이 를테면 기존 극장 스타일에서 밝은 조명과 현란한 무대장치를 곁들여 현대식 록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젊은이 예배 스타일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신에 우리는 촛불과 향내음을 풍기며 고풍스러운 기도문을 청바지 입은 목사와 함께 명상하며 교회의 주위를 돌며 기도에 열중하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세대가 구세대와 어떻게 다른가, 무엇이 이들을 다르게 하는가 묻는다면 쉽지 않은 답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 예를 들자면 구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극복하고 타도해야 할 정치적 인물의 표상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표되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었다면 이 새로운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는 허황된 패권주의로 똘똘 뭉친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 상징된다고 하는 차이라고나 할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모던주의로 대표되는 모델이라고 한다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포스트모던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차이 정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로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 그리고 록음악과 댄스뮤직에 열광하며 머리에 무스를 바른 젊은이들에서 ‘싸이질’에 열중하며 개인홈페이지 파도타기에 매우 익숙한, 그러면서도 정치인들의 모습을 희화화한 시사합성 갤러리에 들락날락 하면서 낡아빠진 정치를 개탄하는 새로운 젊은이들의 출현을 본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 런데 과연 붉은 악마와 함께 ‘대 한민국’을 외치며 월드컵의 신화를 이루어낸 이 포스트모던 세대의 모습은 한국 교회 어디에 서 있을까? 이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IT 산업의 활황으로 대단히 발달된 문명의 이기를 즐기는 최고의 IT 강국 대한민국의 N세대들이지만 우리의 예배를 볼 때 아직 포스트모던 예배를 논하는 것은 좀 이른 감이 든다. 미국과 서구의 이 새로운 젊은이들처럼 촛불을 켜고 향내음을 맡으며 오래된 기도문을 따라하며 명상하는 예배를 즐기는 세대의 출현은 아직 우리의 현실에서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최선의 방어책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부활주일 예배, 필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는 색다른 시도를 해보았다. 기존의 전통적인 부활주일 성가대 칸타타를 하되 젊은이 중심의 열린 예배 현실에 맞도록 예배를 디자인해서 칸타타 중간에 다양한 차원의 시도를 선보였었다. 이른바 다감각적인 예배(multi-sensory worship)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장면을 성가대가 부르는 사이, 영화 Jesus Film의 한 부분을 편집해서 회중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200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한다. 동시에 음악이 끝날 무렵, 피가 잔뜩 묻은 옷을 입고 가시관을 쓴 예수가 채찍에 맞으며 뒤에서부터 앞으로 십자가를 질질 끌고 나아간다. 살을 에이는 채찍 소리와 함께 회중들은 강렬한 피의 색깔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가슴 아파하는 경험을 한다. 조용한 배경음악과 함께 예수를 군인들에게 넘겨주던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가롯 유다의 처절한 간증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가 들고 있는 오랏줄 하나, 그 줄을 가지고 곧이어 그는 자살하는 비운의 결말을 택하지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 가롯 유다의 말 한마디에 회중은 동질감을 느끼며 눈물을 적신다. 동시에 새롭게 성가대의 찬양은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뭐 그런 진행으로 예배를 구성해 보았다.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예배를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하는 그런 예배의 자그마한 효시(曉示)가 되었다.



앞 으로 우리 이민 교회와 한국 교회의 예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며 단순히 듣는 예배에서 다양한 차원의 감각적인 예배로 변해갈 것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 밖으로만 나가면 이 새로운 세대들은 이러한 다양한 다감각적인 문화에 너무나도 익숙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도 사실상 냄새 맡는 것만 빼고 나머지는 다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플래시를 보면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 한잔을 바라보며 조용한 피아노의 배경음악과 함께 순차적으로 아름다운 시 한줄이 모니터를 가득 채우면서 그와 함께 나지막한 성우의 음성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종합적인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본다. 단순히 종이에 쓰여진 시 한편을 보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 시대를 준비하며 새로운 세대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요한 일서의 말씀은 말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이 외친 세대와도 같이 우리 역시이 말씀대로 우리가 받은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기를 꿈꾸는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