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9월


최 근의 경배와 찬양의 물결의 특징 중에 하나는, 하나님 중심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사람들 중심이라는 것이다. 즉, 지나친 “우리”와 “나”의 강조로 말미암아 찬양 본래의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상대적으로 취약해졌다는 것이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부분 중에 하나가 찬양에 쓰여지는 가사들이 너무나 자극적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지는 단어들로서는 부적합한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비추소서(Shine, Jesus shine)외에 우리가 많이 부르는 찬양을 작곡한 그레함 켄드릭은 자신의 강의 중에 이러한 말을 하였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서 적극 권유하고 있다. 하지만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현대의 경배와 찬양은 너무나 대중을 위한 곡들을 남발하고 있다. 때로는 노래 안의 가사에서 전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편의상 나누는 CCM과 경배와 찬양의 개념이 이미 미국 내에서는 무너진 지 오래이다. 90년대의 호산나 뮤직의 탐 브룩밴드는 기존의 경배와 찬양을 넘어서 일반 음악가들도 놀라워하는 앨범들을 만들어 내 놓았다. 수많은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사운드, 거기에다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즈 뮤지션들이 만들어 낸 앨범들은 보통 사람들은 따라 하기에는 엄두도 못 내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일반 콘서트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이들의 앨범을 들으면서 감탄을 자아내곤 하였다.


허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뮤지션을 동원하는 경배와 찬양 스타일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일단, 실제적으로 웬만한 교회에서 따라 부를 수가 없고, 같이 한다고 해도 일단 사람들에게 매스미디어, 즉 비디오와 음반을 통해 확산된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보통 사람들은 따라 할 수 없는 너무나 훌륭한 경배와 찬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미국 역시, 아직 지역 교회의 현실은 성가대의 전통 클레식과 경배와 찬양이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숙제로 남아있는 교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례로 탐 브룩같이 클레식 배경에 재즈연주를 하면서, 오케스트라 편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미국 내에서도 몇 사람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크리스챤 음악이라는 장르에서는 말이다.


결국 이러한 “우리” 중심의 기성 세대의 찬양에 새로운 찬양의 방식이 접근되었는데, 90년도 후반에 젊은이와 youth그룹으로 확산된 모던 락의 예배 스타일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이 모던 락의 음악적 색깔들은 기존의 호산나의 경배와 찬양 스타일과는 다른 양상을 나타내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음악적 감상을 많이 추구하던 스타일에서 같이 노래하고 따라부르는 젊은 세대의 절대적인 호감을 얻었다. 밴드와 악기 역시, 일렉기타, 드럼, 베이스, 키보드 이 4명만 구성된다면 바로 할 수 있는 이러한 모던 락은 패션(passion)이라는 모임을 통해서 확산되어져 갔다. 모던 락은 “우리”중심에서 “나”중심의 예배로 바뀌어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존에 찬양들이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개념에서 모던 락은 “우리”보다는 “내”가 하나님께라는 개념을 가진 찬양들을 많이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 모던 락 스타일의 경배와 찬양은 지금까지도 젊은 층에는 폭발적인 반응이 있어서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앨범들은 모던 락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 허나, 모두가 알다시피 이 모던 락 음악의 경배와 찬양은 처음 지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 쉽게 쓰여진 가사들,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강조한 나머지 실제로 하나님을 위한 찬양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적인 요소를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때는 이것이 과연 찬양일까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이게 찬양이구나 하는 곡들도 있다. 그 전까지는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혹은 연인들끼리 서로 노래하는 러브송으로 생각할 정도로, 착각할 수 있게 하는 가사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곡의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지나친 자신의 표현은 상대적으로 ‘거룩’이라든지 ‘순결’ 혹은 ‘신령’과 ‘진정’ 이런 단어들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는 반응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가 찬양을 드림에 있어서 더욱 하나님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변함없는 단순한 사실이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오고 가고 있는 것이다. 찬양이 예배의 전부가 아니지만, 프로그램화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사람들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Donald Gee라는 오순절 교파의 교사가 1929년에 쓴 논설에 있는 글을 잠깐 소개하고 글을 마치겠다.
“우리가 찬송가(Hymn)나 복음송을 부름에 있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단점은 자신이 경험한 느낌과 소망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나타낸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께’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또는 ‘우리’끼리 노래하기 쉽다. 성경에 언급한 꿀이 약속의 땅에서 한가지 실제적 양식이 되듯이, 찬송하는 것은 아름다운 기독교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완벽하고 정당한 방법이다. 그러나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에는 ‘꿀’이 없어야 하며, 우리는 부흥적 즐거움의 감정과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참된 예배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경우에든 꿀은 절제되어야 한다. 달콤한 형태의 찬송가나 노래를 너무 많이 부르는 것은 나중에는 영적인 구토 증세를 일으킨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와 찬양은 결코 실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