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7년 5월


또 다른 회개의 첫 단추…


왠 지 잠이 오질 않아 PC를 켰는데 한 사이트에서 “뉴욕의 아픔”이라는 글을 접했다. 뉴욕의 N교회 A목사의 “제7계명을 어기고 간음했다는 고백” 기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해당교회의 한 성도가 아픈 마음을 진솔하게 드러낸 글을 읽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어떻게 대형교회 목사가 이런 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에 집중했지만, 오히려 A 목사의 자발적인 고백은 필자에겐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이 미 년 초에 당회에서는 거론이 되었고, 올해 말 사임하기로 했던 A 목사가 3월 18일 주일예배 강단에 갑자기 선 것은 당회와 상관없는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일단 이 고백은 A 목사님의 자발적인 용기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점, 그리고 “지난 2개월 이상 죽음 같은 시간을 보내며 참 지옥이 무엇인가를 실감하고 주님의 심정이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느끼며 지내왔다”는 통한의 고백을 주일 예배 시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라 본다.


그 동기의 진실 여부도 지난 22일 교회를 사임하고 뉴욕을 떠나시겠다고 공식 발언한 것을 보면 담임 목사직을 사임하지 않고 교회 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공개회개라는 극적 반전을 노렸다는 일부 분석은 오판인 듯싶다.


박 용규 교수님의 ‘1907 평양 대부흥’에 의하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에서 600여 명이 새벽 2시까지 남아서 기도하는 도중 길선주 목사는 자신이 은혜를 막는 성령의 임재를 막는 아간이라며 많은 회중 들 앞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숨은 죄를 고백했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당시 100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을 착복한 것을 성령께서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이 고백은 마치 뇌관에 불을 붙인 것처럼 그날 모인 성도들의 회개가 이어졌고 그날 그곳에 모인 이들은 말씀 앞에 부복하여 자신들 안에 은밀하게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다 토로하였다고 한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들이 그날 공개적으로 고백되었다. 이러한 회개와 부흥의 물결은 선교사들은 물론 평양시 전역에 교파를 초월하여 흘러갔다. 평양의 남산현 감리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직접 목도한 노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미 선교본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 우리에게는 한국교회에 내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 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이다. 매 집회에서 주님의 권능 (the slain)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 임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 했다.”


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경험한 길선주, 헌트, 블레어, 이길함, 스왈른, 편하설은 부흥의 불을 가지고 한반도 전역으로 흩어 졌고, 성령께서는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한반도 전역에 부흥의 불을 지피셨다. 서울, 대구, 대전, 공주, 신의주, 선천 등 전역에서 부흥의 불길이 솟아올랐고, 이 부흥의 불길은 다시 만주와 중국으로 놀랍게 번져나갔다.


“1907 년 평양 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해에 교계에서 어느 때보다 회개와 기도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 이 같은 일이 터져 더욱 큰 충격을 주고 있다”는 일부 기사는 오히려 평양 대부흥의 실체를 오해한 소치 아닐까? 충격이 아니라 부흥의 전조로 볼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조명해본다.


우 리의 시각을 어떻게 대형교회 목사가 “그런 죄를…”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 죄를 드러내었는지….”에 둘 때 용기 있는 A 목사님의 고백은 또 다른 회개와 부흥의 첫 단추가 될 수도 있다. 곪은 상처를 드러내는 용기는 살아계신 성령의 역사이며 부흥의 시작이다.


한인교회 치부를 빛 가운데 드러낼 기회


처 음 뉴욕 N 교회의 A 목사님의 소식을 접했을 때 충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진 않은 세월 살아오면서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목회자들, 찬양 사역자들이 아류의 죄 가운데 실추되거나, 쓰러지는 경우를 여러 번 접했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땐 나도 “어떻게 그럴 수가!!”와 같이 ‘비난자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흘러가면서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한 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철저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엔 죄로 여기지 않았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일까. 나 자신도 그러한 죄를 실행만 못했을 뿐이지 언제 쓰러질지 모를 똑같은 연약한 존재이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7장 고백은 인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잘 표현해준다.


『만 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0-24)


목 회자라고 다르지 않다. 위대한 영적 지도자인 바울 사도의 처절한 고백처럼 우리 인간은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단지 목회자는 문제가 터졌을 때 사람들에게 더 큰 비난과 더 큰 충격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크게 다를 뿐이다.


그 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경고 했다. A 목사는 바로 이 차원에서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 수많은 영혼을 실망시켰고, 그 부정적인 영향력이 너무 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간은 죄 문제에 대해 결코 희망이 없을까? NO! 명백하게 있다. 사도 바울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인류의 죄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대 선언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롬 8:1-2) 이것이 복음이다.


문 제는 이 복음을 한 번 듣고 또 죄에 빠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법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고백한 것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는 자세로 주님께 달려 나가며,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빌 1:19) 바울의 고백처럼 성령께 순간순간 인도하심을 구하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 제는 이러한 문제가 터졌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있다. 여기에는 명백한 성경의 질서가 있다. 첫째로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사 도 바울도 로마서 2:1-10에서 동일한 지적 한다.『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둘 째로, 그럼 이 목사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가? 아니다. 성경은 강도 높게 징계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징계는 질서가 있다. 해당교회, 노회, 교단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할 뿐이다. 그 이상의 비판적 여론은 자제해야 한다. 때때로 인터넷은 우리의 위치를 하나님의 위치로 올려놓는다. 인터넷 언어의 특징이 얼굴 없는 글이기에 글에 아무런 인격도 없이 하고 싶은 말, 평소에 싸였던 불만 등이 아무런 제지나 여과 없이 그냥 올라온다. 책임질 수 없는 언어들이 난무하다. 그 결과 우리가 원래 목표했던 타겟과 방향을 잃어버린다. 적어도 책임 질 선의 이야기만 해야 한다. 그런데 인터넷이나 언론을 보면 이 목사님의 공개 고백 진의를 의심하는 무책임한 논의들이 많아 보인다.


적 어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를 삼가 해야 한다. 우리는 L목사의 삶을 비난하고 그의 죄를 시인 받아 내야 할 권위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그런 힘과 권력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L목사를 위해 중보 해야 한다. 엄청난 충격에 빠진 뉴욕교회 교인들이 빠른 시일 내에 이 문제를 주님의 방법 대로 해결할 수 있도록 중보해야 한다. 이미 당회와 노회, 교단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해당교회 교인이 아닌 분들이 L목사를 규탄하는 것은 언론이나 인터넷의 특성을 무기 삼은 명백한 월권 이다. 자신의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정도 이상은 칼을 휘두르는 언어폭력이요, 무언의 살인이다.


마 지막으로 적어도 이 목사님은 용기 있는 분이다. 그 동안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이 도덕적인 죄를 짓고 나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시인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앎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부에서도 쉬쉬하고, 외부로도 굳이 긁어서 부스럼 낼 것 없는 것처럼, 교회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이 상례이다. 목회자만 그런가? 교회의 평신도 리더십들도 이중적인 죄 된 삶이 드러난 경우가 허다하지 않았는가! 사회에서 터지는 대형사고 마다 기독교인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썩어 문드러졌다. 죄가 눈에 보여도 말을 못하는 수준까지 몰락했다. 결국 기독교가 일반사회의 도덕적 잣대로 마구 도마질 당하는 양상까지 왔다. 일차적인 죄는 교회 지도자에게 있음을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인정한다.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있다. 종교의 도덕성이 일반 사회의 도덕 수준보다 떨어질 때 그 사회는 위험하다. 기독교의 도덕성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면 교회는 최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지금이 바로 회개의 때이다. 뼈를 깎는 회개와 부흥이 필요하다.


그 래서 더더욱 N교회의 치부가 드러난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를 사인으로 한인교계의 회개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평양 대부흥 때 성령께서 지도자들의 치부를 드러나게 하실 때 그들이 순종함으로 드러냈다. 솔직하게 회개했다. 이번 기회에 한인교회 목회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죄악을 회개했으면 좋겠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더러운 치부를 드러냈으면 좋겠다. 뉴욕의 아픔을 통해 동부 부흥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L목사의 진실여하를 떠나서 ‘뉴욕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공개회개’라는 기독교 환부의 가시화가 오히려 서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우리 한인교회 들과 목회자들의 죄악과 치부를 빛 가운데 드러내어 성령의 강력한 치유의 광선, 골고다 십자가 보혈의 강력한 용서의 능력을 통한 회복과 부흥을 향한 하나의 작은 사인이 될 수도 있을지 조심스럽게 조명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