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살 길은 예배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예배에 실패해서 망했다. 14세기 종교개혁은 그 핵인 예배개혁(returning worship to the people)을 통해 중세 암흑기에서 탈출했다. 19세기 자유주의는 서구교회의 세속화와 더불어 예배의 강단을 무참히 훼파시켰지만 1960년대부터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예배갱신(worship renewal) 운동으로 교회의 생명력을 되찾았다. 한국교회도 지난 20여 년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찬양운동으로 예배갱신의 불이 점화되었다. 덕분에 화석화 된 예배에 생명이 흘러들어 역동성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본질보다 형식과 트렌드에 매몰된 타락의 조짐이 곳곳에서 들린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정작 먹을 수 있는 물을 구하기 힘든 것처럼 요즘 예배는 많지만 정작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의 열정에 불붙는 예배가 부족하다. 예배의 위기는 좋은 악기, 최첨단 멀티미디어 시스템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유창한 설교, 뛰어난 성가대, 실력 있는 찬양팀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의 생명을 경험하며, 성령의 감동이 살아있고, 본질의 변화가 일어나며, 존재의 혁명을 가져오는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결과 우리의 눈과 행동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전쟁과 기근에 고통 받는 나라와 미전도 족속들을 향해 구체적으로 결단하는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본질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급한 때이다. 알렉산더 슈메만이 말한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표현들이 궁극적 ‘준거’를 부여받고 그것들의 최고 깊은 의미가 계시되는 것은 다음 아닌 예배 안에서, 예배를 통해서이다. 예배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규범의 위치이다. 그래서 예배가 무너질 때 다른 모든 것이 무너진다. 지엽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복음에 전율하며, 삶의 관점이 바뀌고, 차가운 지성이 불타오르며, 구체적인 결단이 일어나는 그런 예배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지구촌에는 과거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던 현상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지구 한 쪽에서 부르는 찬양이 지구 반대편에서 동시에 불리고 있다. 한 지역교회의 메시지가 인터넷과 글로벌 위성 시스템, 스마트폰 등과 같은 문명의 이기를 통해 각 나라의 크리스천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누가 지시하지 않았어도 예루살렘 회복의 열망이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이루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로컬(local)과 글로벌(global)의 경계가 사라진 글로컬(glocal)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말세에 일어날 대부흥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인프라일지도 모른다.
세기 마다 일어났던 과거의 부흥과는 차원이 다른 지속적이고 글로벌한 부흥, 역사상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거대한 부흥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것이다. 이 부흥의 쓰나미 현장에 쓰임 받으려면 김종필 목사의 언급처럼 “내가 서있는 그곳이 부흥의 진원지가 되어야 한다.” 대부흥은 바로 그 곳에서 자신을 깨뜨린 영적 거인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부흥을 꿈꾸고 준비하는 교회와 성도들마다 선행될 부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배 본질의 회복’이다.
이것은 전통예배, 현대예배, 열린예배(seeker service), 블렌디드(blended) 예배, 이머징(emerging) 예배와 같은 형식의 논쟁을 불식시킨다. 세대와 문화에 따라 형식이 중요한 매체의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어떤 형식이라도 본질의 중요성에 비하면 사소하다. 이 본질의 회복은 슈메만이 말한 것처럼 예배의 참된 의미와 능력의 재발견이고, 예배의 우주적, 교회론적 차원과 내용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죽은 전통과 관습을 포기하되 그 안에 있는 참된 본질을 시시때때로 바라보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의 예배 회복은 제2의 종교개혁에 해당할 만큼 중요한 무게로 다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