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행 LA 공항에서 눈을 감으셨다는 전화를 받는 순간 가슴이 무너졌다. 유학 2,3년만 하고 돌아오겠다고 떠난 미국생활이 11년 흐르는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하늘나라로 보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해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다. 평생 한 번도 해드리지 못한 말,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내 가슴속 한켠에 외롭게 남게 되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마음대로 사역지를 옮길 수 없는 목회자 인생… 그래도 집이나 전토를 버리는 것은 견딜 만하다. 하지만 육신의 정을 포기하는 것처럼 힘든 것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 못 지켰던 임종을 아버지에게는 꼭 지켜드리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이 두 손으로 입관, 하관해드려서 다행이다.

산소호흡기를 착용하시고 코에 관을 삽입하여 위까지 음식과 약을 투여하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옆에서 손 한 번 못 잡아드린 생각만 하면 눈물이 흐른다. 지난 목요일 저녁, 아버지와 통화한 기억이 생생하다. 혀가 풀려 정확한 발음을 못하셨지만 의식만은 또렷하셨다. 5분 정도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아무 소리가 안 들렸다. 매제가 ‘너무 힘들어 쉬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기도할 테니 아버지가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부활의 예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할 수만 있거든 생명을 연장해달라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기도 한 문장 한 문장마다 수화기 저편에서 “아멘~아멘~”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찾으셨기에 그 아멘 소리가 더욱 간절하셨나보다.

그토록 복음을 거부하시던 아버지, 60이 훌쩍 넘으셔서 신앙을 회복하시고, 어머니와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시며 기뻐하시던 아버지, 이제 병상에서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힘을 다해 ‘아멘’ 하시는 그 소리가 내 마음을 울렸다. 아버지께 격려해드렸다. “아버지 마음 약해지시면 안 돼요. 아들이 갈 때까지 힘내세요!”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먼저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 가시기 전에 “유정이 오면 당직 서면 되겠네” 우스갯소리로 하신 말씀을 따라 밤새도록 빈소 옆에서 아버지의 천국 길을 지켜드렸다.


장례식장을 찾아오신 지인들 가운데 조용히 다가오셔서 “아버지가 아들 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씀 하셨다.” “엄마가 유정이 가족 보고 싶다며 눈물을 자주 흘렸어.” 하는 말씀을 전해줄 때 가슴이 메었다. 영주권 수속으로 7년 간 묶였던 발이 3년 전에 풀려 매년 1회 한국 땅을 방문했다. 2주 동안 3~4일을 아버지와 한 집에서 지냈다. 그러나 집회와 개인 약속들 때문에 잠깐 씩 대화 나누는 정도였다. 그나마 올 초에 3일 동안 아버지와 함께 자면서 많은 이야기 한 것이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라는 선조의 지혜가 뒤 늦게 뼈에 사무친다.

입관할 때 아버지의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얼굴을 만져보았다. 수의에 싸여있는 수척한 몸을 두 손으로 안아드리며 얼굴을 가슴에 대었다. 살아계실 때 한 번도 안아드리지 못했는데 가시고 나서야 안아드리는 내 마음이 회한의 눈물로 소용돌이 쳤다. 비록 가난하셨지만 평생 사람과 독서를 좋아하셨고, 관대하지만 최선을 추구하는 성격, 뒤 늦게 어머니와 든든한 신앙의 동지가 되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시던 모습 등은 내 인생에 돈보다 중요한 커다란 발자국으로 남아 있다. 자녀, 친지, 지우들은 헤어지는 슬픔으로 가슴 아프지만 뒤 늦게 그토록 챙기시던 먼저가신 어머니 곁으로 가셨으니, 지금 이 순간 천국에서 더 기쁘고 더 행복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바라보고 계실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뒤 늦게야 가슴으로 깨닫는다. ‘진정한 사랑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임을…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