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린 사람들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쓴 책 두 권















영광의 문(복 있는 사람, 2003), 343, 1만원

엘리자베스 엘리엇 지음, 윤종석 옮김



원제 Through Gates of Splendor

전능자의 그늘(복 있는 사람, 2002), 412, 12천원

원제 Shadow of the Almighty



630일 미국 코스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는 비행기에서 읽은 포켓판 양장본 영광의 문(Through Gates of Splendor)은 느낌이 남달랐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이 책에 나오는 다섯 주인공 중 코스타가 열리는 휘튼 대학 출신들이 있다는 것과, 이 책이 나온 지, 아니 이 책에 나오는 다섯 선교사들이 남미 에콰도르에서 살인부족 아우카 인디언들에게 살해당한 지 어언 50년이 되어 가기 때문이었다.



현대 선교의 고전, 필독서



짐 엘리엇, 피트 플레밍, 에드 맥컬리, 로저 유데리안과 비행(飛行) 선교사 네이트 세인트가 에콰도르 정글 깊숙한 한 강변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접근하던 아우카 부족의 창에 찔려 순교한 것은 19561월의 일이었다. 짐 엘리엇 선교사의 부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같은 해에 남편의 일기와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이 책의 자매편 격으로 좀더 널리 알려진 전능자의 그늘(Shadow of the Almighty, 작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역시 포켓판 양장본으로 역간)을 집필하던 중에 다른 네 미망인 선교사들의 부탁을 받고 이들 다섯 선교사와 주변의 기록을 엮은 이 책을 먼저 냄으로써 전세계에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알리고 그로써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이 속출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두 책은 지난 50년 가까이 현대 선교의 고전, 필독서로 널리 읽혀 왔다. 인터넷 영문서점 아마존(amazon.com)에 들어가 Through Gates of Splendor를 검색하면 18개의 짧은 독자 리뷰를 읽을 수 있는데, 그 중 몇몇 리뷰는 이 책을 20년 전, 30년 전에 읽고 최근 다시 읽었다는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을 정도로 영어권 기독인들에겐 널리 알려진 책이다. 전도유망한 20대 후반의 헌신된 다섯 젊은이들이 살인부족의 창에 찔려 죽었다는 이 비보는 그 후 세계 각지의 각종 선교대회와 수련회 등에서 널리 알려지면서 후배들의 각오와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언론들도 하나같이 호평을 하고 있는데, Christianity Today 같은 잡지는 “엘리자베스 엘리엇의 기록은 감동적 작품 이상이다. 그것은 복음 증거의 심장박동 자체다.”라는 최상의 찬사를 아끼지 않을 정도이다. (실제로 전능자의 그늘 프롤로그 여덟 페이지만 읽어봐도 이 말이 별로 틀린 말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그들은 영웅도 순교자도 아닌 그리스도인이었다



무엇이 전도유망한 다섯 젊은이들을 남미 에콰도르의 이름 없는 한 살인 부족에게 나아가게 만들었을까? 이들은 굳이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처자식을 둔 평범한 보통 선교사로서 할 일이 많지 않았을까? 그들은 명성이나 모험을 즐기며 무슨 큰 일을 찾고 있던 걸까? “사람들은 짐 (엘리엇)과 그와 함께 죽은 이들을 영웅으로, 순교자로 칭송했다. 나는 찬동하지 않는다. 본인들도 찬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그토록 크게 다른 일이란 말인가?(전능자의 그늘 초판 서문에서). 저자의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선교가 무엇인가를 웅변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짐 엘리엇이 1949년 휘튼 대학에 재학중일 때 남긴, 그 후로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의 결단의 순간에 되뇌어지는 이 유명한 말은 그대로 그들의 삶이 되었다.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이들 5인의 개척선교와 선교사로서의 삶과 사역도 감동적이고 도전적이지만, 그걸 묵묵히 그리고 성실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그 기록들을 발로 찾아 다니면서 책으로 묶어내는 장인정신이다. 자신의 삶의 여정, 사역의 순간들, 생각의 편린들을 (누가 보든 안 보든) 그저 일상처럼 적어 내려가는 동안 이들은 또 얼마나 하나님과 살깊은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 묵상의 깊이는 아마존 정글의 깊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 뿐인가.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했듯, 또 그 일기와 메모는 물론, 가족과 친구 등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하면서 옛 기억들을 복원해 내는 동시에 오늘의 독자들이 호기심과 흥미를 잃지 않고 끝가지 읽어 나가도록 붙잡는 성실한 글쓰기는 수작(秀作), 역작(力作)의 견고한 기초를 이룬다. 모르긴 해도 이들이 오늘을 살았다면 니콘이나 캐논 디지털 카메라로 영상 기록을 남기고, 자신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수려한 포토 에세이로 기도편지를 대신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록을 남기고 책으로 묶어내는 장인정신



여기서 우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본격적인 선교를 하기 시작한 지 어언 30년이 되고 있고, 지구촌 곳곳의 미전도종족에 이르기까지 만 명이 넘는 일꾼들이 나가 있고, 1세대 선교사들은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선교지 르뽀나 선교사 전기, 자서전, 회고록으로 내세울만한, 권할만한 책들은 극히 미미한 편이다. 시작은 다들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데, 그 후 어떻게 일했더라는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한 기록들은 아직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선교사들 자신과 단체들, 파송교회들의 일차 자료(기록물)에 대한 인식 부족, 문서 자료에 대한 푸대접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 기도 편지는 물론 사역 기록(spiritual journal)에 대한 훈련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며, 사진 자료로 가면 그 희소성은 더해만 간다. 요르단의 김동문 선교사 표현을 빌자면, 아무 근거 없는 알량한 선교보안 의식만 버려도 크게 달라질텐데 말이다.



이것은 비단 선교 뿐 아니라 내로라하는 쟁쟁한 1세대 목회자들의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는 목회 영역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별로 쓸데없고, 그 얄팍한 울타리만 벗어나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이너서클(inner-circle)의 용비어천가 식 찬하(撰賀)나 무성하지, 그들의 인간적, 사회적, 목회적 고충과 분투를 있는 그대로 리얼하고 균형있게 묘사하고 기록해 비단 그 추종자들 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 널리 읽히면서 인구에 회자되는 당대 유명 목회자, 운동가들의 전기, 자서전, 회고록은 언제쯤 나올 수 있을지 가히 요원하기만 하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남편의 끔찍한 죽음이란 시련을 딛고 쓴 이 두 책은 이런 의미에서 오늘을 사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중의 감동과 도전을 주기에 충분하다. 짐 엘리엇 선교사들처럼 치열하게 살고, 기록을 남기며, 엘리자베스 엘리엇과 같이 그 기록들을 고르고 정리해 책으로 묶어내는 장인정신에 대해 생각할 때이다.



사족 1. 요즘 나오는 책들은 내용 못지 않게 표지도 신경 써 만드는 게 많은데, 영광의 문은 아마존 정글을 드러내는 듯한 청색과 흑색만을 쓰면서 젊은 다섯 선교사들의 50년 된 활짝 웃는 흑백 사진을 앉혔는데, 마치 정글의 새벽을 여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또 이 두 책은 등장인물도 같고 저자도 같지만, 판형과 번역자(윤종석)도 같아서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좋았다.



사족 2. 다섯 선교사가 죽임 당한 후 살인부족 아우카족은 어떻게 됐는지 그 결말이 궁금한가? 두 책 중 하나만 읽어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