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KOSTA/USA 시카고 집회에서 있었던, 소명을 주제로 한 김동록 박사의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김동록 박사로부터 최근 근황과 세미나 후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제 소개부터 하죠. 이름은 김동록이구요, 시애틀에서 영상처리 소프트웨어 일을 하는 공돌이입니다. 신앙경력은 30년, 취미는 성경공부입니다. 미국 온 지는 20년 되구요. 89년에 University of Washington으로 전기공학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코스타는 2003년부터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1. 들어가기 : 미래를 생각하다
비전과 소명은 같은가? 비전과 소명이란 말은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비전이나 환상은 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계시는 미래일 수도 있고, 현재일 수도 있고, 과거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역사적인 사건, 구속적인 사건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하십니다. 소명은 비전 이후에 일어나는 구체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초청을 자신의 삶에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그 환상(비전)을 보여주셨을 때 그것에 응답하는 것이죠. 비전과 소명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주로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와 세계관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명이 미래에 대한 것이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의 개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성경에서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인간의 죄로 인해 타락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구속, 다시 회복시킨다)은 세상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자는 것인데 여기에서 기독교인의 소명이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너무 기울이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라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자는 맥락에서 소명을 생각할 때, 과연 이 세상이 마지막에 없어질 것인가, 마지막에 없어질 세상이라면 굳이 회복시킬 이유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함께 정리해봅시다.
‘소록도에 가고싶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수용되어 치료를 받는 소록도에 한 집사님이 새벽기도를 가는 길에 취재기자가 질문을 합니다. “집사님,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합니까?” 저는 당연히 그분이 당신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떨어져 있는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기도요? 당연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하지요”라는 대답이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제 죽으면 천국가서 예수님 곁에서 살아야지’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분들의 소망은 죽으면 천국가서 예수님하고 사는 것 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줄 수 있는 소망이 과연 이것 밖에 안되는가 하고 생각하니 답답해졌습니다. 이 이상한 천국은 과연 가는 곳인가인요?  ‘돌 아갈 내고향 하늘나라’,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죄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저 천국에서 날 기다리네’ 등 찬송가의 가사도 우리가 죽어서 가야 할 곳으로 천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등의 말들도 천국을 죽으면 가야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우리 삶에서 끊어지고 내세에 이루어지는 불연속적인 모습으로 생각했을 때 심각한 오류들이 생깁니다. 기독교의 주된 목적이 과연 천국행일까요? 오히려, 기독교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에 도달한다라는 것은 부활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죽었다는 의미죠.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해봤을 때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얘기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보다는 영지주의의 부활같은 느낌을 줍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종말이 결국은 창조질서의 궁극적인 소멸이겠습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렇게 좋아하셨던 하나님이신데, 이 세상을 소멸시키실 것일까요? 뭔가 맞지 않습니다. 이런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천국을 상상할 때 너무 영적인 내세를 상상하게 되고, 기독교의 가치관은 영적일 따름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이원론적으로 기울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반대도 있습니다. 부활에 반대했던 사두개인 같은 경우, 너무나 현실적이 되어버려서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불연속성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근거없는 것이 됩니다. 저는 이 강의를 통해 미래에 대한, 천국에 대한 기초를 쌓고 소명으로 넘어가려 합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 나라’, ‘하늘’, ‘땅’, ‘하늘과 땅의 겹침’ 등의 개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톰 라이트가 쓴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IVP)’를 참고해 주세요.
천국, 하나님 나라
‘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다른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로 천국(Kingdom of Heaven)으로 다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다른 것 같지만 사실상 같은 표현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먼저 이해해 봅시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풀린 지 400년이 되었고, 예루살렘도 지리적으로 회복되었지만, 그들이 갈구했던 통치권은 여전히 이방인들에게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그리스, 이집트, 앗수르, 로마를 거쳐 계속 이방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 통치하심의 개념은 굉장히 중요한데, 성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출애굽때 구름기둥, 불기둥과 함께 성막 위에서 이스라엘이 봤던 하나님의 영광과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나타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포로기 이후에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에 다시 나타날 여호와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으로 메시아가 오셔서 (마치 다윗과 같은 성군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독립적인 왕권을 회복되고, 이방 나라가 징벌되고,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이 땅에 충만하게 되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종말)은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로 오셔서 직접 통치하시고, 메시야가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서 왕권을 회복하신다는 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에는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마지막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던 마르다의 고백을 보면 마르다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불연속성이 있지만, 역사가 진행되는 면에서는 연속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오는 천국’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그런 연속성을 어떤 방법으로 보여주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겉으로 보기엔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메시야의 도래,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심, 공의와 평화가 충만함)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와 비슷했지만,  사실 그 내용은 달랐습니다. 산상보훈에서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성품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시고 하나님 백성을 다시 규정(define)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셨을 때 벌어진 성전 청결사건은 상징적으로 예수님의 예언자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약에서도 많은 예언자들이 행위를 통해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1년 넘게 왼쪽, 오른쪽, 옆으로 누워서 쇠똥을 구워 먹어야 했음)과 에레미야(멍에를 메어야 했음)의 예를 통해서도 상징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전제사를 금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율법의 마침을 나타냅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성찬을 하시며 내 피와 살을 언급하시는 모습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define)것을 상징합니다. 성령을 받은 교회가 연약한 가운데 섬김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무력적이고 폭력적이었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으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 권세에 대적해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늘 세상의 방식과 달랐습니다. 에세네파는 은신했고, 바리새파는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종교적으로 몰입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꿨지만,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개입하셔서(병고침, 죄인과 함께 하심)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이나 헤롯당처럼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당국자들 (authority)의 마음을 들끓게 만드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의도하였다기 보다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있는그대로 표현했을 때 이 세상 권세가 견딜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하셨습니다. 하지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한 열심당원과는 달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 세상 권세와 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 죄의 용서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 권세를 파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할 수밖에 없는 ‘악’을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악’을 해결하는 예수님의 방법은, 그 악을 눈 앞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도 사랑하셨고, 악을 악으로 대적하여 또 다른 악을 만드는 결박을 용서라는 은혜로 끊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적용해보면, 우리가 상대방을 용서하면 나와 상대방을 얽매고 있는 악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2) 부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기 직전에 마르다가 한 고백 (“마지막 날 부활때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처럼, 1세기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 메시아가 오실 때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에 대해서도 연속성(육체의 부활)과 불연속성(육체의 변화)의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부활이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거라고 생각을 했고, 예수님은 역사의 중간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 (소멸이 아닌 마지막날입니다)에 일어나리라고 믿었던 부활이 그 중간에 예수라는 사람에게 일어났음을 다메섹 도상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고민하며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already but not yet). 앞당겨진/이미 시작된 종말이었습니다. 유대교배경을 가진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은 결코 단절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날 이뤄질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의 부활로 이미 시작한 것(Here and now)을 의미했습니다. 역사의 진행은 계속되는 연속적인 것입니다. 역사의 진행은 계속되지만 (연속성), 메시아는 오셨고 (세상 권세를 이기셨고), 현재는 궁극적인 종말, 하나님 나라의 도래 (비연속성)를 향해 역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빈무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무덤이 비어 있었는데, 이것은 실제로 육체로 살아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영으로만 부활하셨으면 죽음을 완전히 이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중에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는 장면이나, 마지막에 하늘로 올라가신 장면에서 예수님이 가지신 transphysical한 모습이 보이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에서는 비연속성이 보입니다. 여기에서 하늘과 땅에 대한 유대인의 개념을 알아보겠습니다. 유대교/기독교에서 얘기하는 하늘과 땅은 범신론(하늘과 땅은 처음부터 하나고 모든 물질/사물에 신이 있다)과 이신론(하늘과 땅은 별개고 창조주는 만들고 난 후 관심없이 내버려 둔다)에서 말하는 하늘과 땅과 다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같이 존재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이야기하시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상징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야곱의 사다리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이 땅과 접해있고 존재하는 하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성막에 나타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율법을 주신 일 가운데서 우리는 하늘과 땅 모두에 존재하시며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됩니다. 구약의 모델로서 ‘성전’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그 하나됨의 상징입니다. 신약 전반에 나타나는 ‘교회와 성령의 거하심’이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내려온다’는 표현은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이 땅을 비우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이 여전히 맞물려 겹쳐있고, 그분이 여전히 다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올라가신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오류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 이원론(현재의 시대와 다시올 시대의 구분)이지, 존재론적 이원론 (악한 땅과 선한 천국)이 아닙니다. 영광된 미래를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롬 8:18, 빌립보서3:21). 영광된 미래를 현재에 옮겨 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히11장). 기독교에서의 종말은 이 세상의 페기나 소멸이 아니라 세상이 부패와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완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가 이런 연속성을 이야기 하는 거라면, 우리는 현재 처한 상황에서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이 새로운 미래 세계를 앞당기는 일에 참여할 강한 동기을 부여받게 됩니다.
2. 방황하는 소명
우리가 들어온 소명에 관한 이야기는 유감스럽게도 현재에 뿌리박고 연속성이 결여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청년집회에서 “비전/소명을 가지라”고 강조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소명을 가지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큰 꿈을 꾸라”고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 잘 해서 교수, 의사, 판사, 부자가 되야 한다는 목표주도형(goal-driven) 인생이 우리 삶의 표준이 되었고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적이고 성경적으로 장려된 삶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탁월하거나 튀어야 하고,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이 우리의 목적이며 성경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라, 충성하라는 이야기는 성경에 있지만, 탁월함은 내가 삶에 충성을 할 때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세상 가치관에 물든 우리는 탁월하지 않을때 우리 자신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간주합니다. 마냥 성실한 삶이 성경적인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하시는가 하는 관점에서 나 자신을 드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성실함을 성경은 원합니다. 또, 비전으로 포장한 무기력함도 연속성이 결여된 모습입니다. “저는 아직 비전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함부로 비전을 가지면 야망이 될 것 같아서, 하나님이 저에게 비전을 주실 때까지 저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교회 청년부나 교회 community에 참여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무기력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비전으로 포장한 변명입니다.
다른 하나는 좀 민감한 주제인데, 학문, 직업이 소명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보통 학문, 직업을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은 소명이다’라고 말한 캘빈 이후로 이 생각이 우리에게 주입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직업이 소명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직업이든지 우리가 열심히 하면 소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상적으로 생각하지만, 어그러진 세상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직업에 대한 관점은 원래 창조질서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신성한 축복이었습니다. 작은 일을 축복과 은혜로 여기고 충성히 해야하는 근거와 의미를 제공해주기도 했지만, 죄로 왜곡된 세상에서 노동과 일이 필연적으로 세상권세와 접촉하게 될 때 더 이상 낭만적으로 해석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직업이 선택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닌데다 우리의 생존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직업과 진로를 선택할 때 취향, 성품, 적성을 따지게 될 선택의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그럴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하신다면 큰 축복을 받은 거지요). 제 생각에는, 직업이 주는 세상권세와의 struggle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서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살아가는 가에 소명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두 가지 질문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벌을 받아 마땅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 나 대신 벌을 받으셨기 때문 (대속설)이라는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온 세상을 구출하시고 획복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반항으로 생긴 타락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반항하는 인간을 노예로 삼아 계속 타락된 상태로 있게 하는 악의 세력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정복하셨기 때문이라는 관점이 있습니다. 직업이 소명이라는 관점도 마찬가지로, 성실하게 일하는 소명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어그러진 창조세계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방법으로, 이 세상권세를 길들이는 현장으로 직업을 삼았을 때 직업이 소명이 됩니다.
3. 현재적 소명
절망적인 상황들이 있습니다. 쳇바퀴 같이 돌아가는 일상, 경제적 육체적인 어려움, 실연,어려운 학업,실업의 문제 등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성경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하루만 지나면 없어지는 만나가 있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가 왜 하루면 없어질까요? 하나님께서 저장하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예수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고,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는 분명 미래에 대한 걱정입니다. 반면 주기도문의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날그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secure 해주시기를 간구하라는 현재의 삶에 대한 기도입니다. 현재의 삶에 대해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제 1 계명입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이미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이미 주어진 계명을 소명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언가 특별한(specific) 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specific 한 것이 미래에 관한 것이라 우리는 미래에 대한 소명을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을 현재적 소명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연속성 상에서 보면 왜 현재가 중요한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현재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나의 최선이 아닌 하나님의 최선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온 맘과 뜻을 다해 충성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의적으로 이 사실을 외면하면서 우리 소명을 다른 곳에서 앞으로 다가올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현재적 소명을 놔 두고, 미래적인 것을 그릇되게 찾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왔던 소명이 미래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위에서 말씀드렸던 하나님나라의 현재성, 연속성을 무시한 뭔가 왜곡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성경이 견지하는 미래적 소명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방향이나 진로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미래적 소명을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은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소망’이란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대신에 현재적 소명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으로의 초청’이 미래적 소명입니다. 저와 성경공부를 하셨던 분이 잘 지적해 주셨해 주셨던 바울의 예를 들겠습니다. 바울의 ‘로마도 보아야 하니라’는 비전이 언제 생겨났겠습니까? 1차 전도여행 전부터 생겼겠습니까?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충성되게 수행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바울의 눈을 열어 그런 비전을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성경에서는 미래에 대해 믿음으로 걸어가라(walk by faith)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묵시가 없는 백성은 방자하거니와’라는 잠언의 구절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비전, 소명이 있어야지”라고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방자한 이유는 현재적 소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엘서에는 ‘너의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꿈을 꾸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요엘 2:15의 ‘회개하라’는 명령에 순종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현재적 소명이 바로 역사적 연속성을 가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가져야 할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인 현재성을 가진 것이라면 우리의 소명도 결코 현재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냥 공허하게 미래를 생각하기 보다는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적 소명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봅시다.
‘새 피조물’입 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시고 백성으로 부르셨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현재에 살도록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죄사함을 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그리고 이미 다가온 종말을 현재에 앞당겨주신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은 불연속성을 예견하는 연속성을 가진다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현재적 소명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출 3:5)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고 있을 때 불이 붙었지만 타지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가까이 다가올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수시로 옮겨다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한 곳에 4-5년 이상 머무르기가 힘듭니다. 우리가 이동이 많은 삶을 살아나갈 때 나그네의 삶을 사는 양 스스로를 비견합니다. 나그네의 삶이 성경적인 용어라서 그 표현이 멋있을지 몰라도, 대부분 우리는 헌신하지 못하는 나의 삶을 변명하기 위해 나그네의 삶이라고 하지 않는지요? 직장에서 임시고용인들은 헌신도가 떨어집니다 (요즘이야 직장 잡기가 힘드니까 제 비유가 맞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그런 임시 고용인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선 땅에서 거룩함을 찾아야 합니다. 나그네라는 표현은 헌신하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변명의 용도가 아니라 소유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그 안전을 의탁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재를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로 여기고 현재에 충실하며 미루지 않는 것이 현재적 소명의 요소입니다.
또 현재적 소명에서 ‘창조적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행을 하거나 남을 보살피는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보람을 느끼게 하고 그것은 우리 삶에 중요한 활력소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즉 남을 도와준다든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한다든지 하는 어떤 보람을 느낌으로써 내 삶의 의미를 갖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 행위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식입니다. 아무 행위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유대인 포로캠프에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내가 소록도에 있는 사람 중 하나라면 어떻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요. 이때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른다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아주 소박한 행위를 통해서라도 피조세계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피조세계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 자체로 내 삶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출 3:5)를 다시 생각해 보면, 창조성을 가진 현재적 소명은 내가 선 곳에서 거룩함을 찾는 것입니다. 아침에 반복하는 행위들(세수, 어항의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것, 화분에 물을 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이 피조세계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현재의 삶에 있는 거룩함을 찾는 삶이 아닐까요?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의 삶에 이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어항의 물고기에게 밥을 주며 피조세계를 다스리라 하신 주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그 깨끗한 물을 써서 세수할 수 있음이 감사하고, 또 그 투명한 물이 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때 느끼는 그 신선함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을 느낍니다 (뭐 매일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자주 그렇답니다). 가령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경우, 아이들처럼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좋고, 가르칠 때 교사로서 더 배우는 것이 있어서 좋다고 흔히들 말씀하시지만, 어떻게 하면 주일학교를 더 좋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궁리를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거룩한 행위 안에 우리가 같이 들어간다면 놀라운 창조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가 현재적 소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적 제자의 삶’. 제자의 삶은 곧 성품을 연습하고, 용서를 선포하며 사는 삶, 세상 권세를 대적하는 삶입니다. 성품의 연습에 대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은사로서의 성품이 계발되지 않은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관에 밀리고 밀려서 직장, 소명을 얘기할 때마다 좋은 자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하고 얘기하곤 하는데, 무엇이 된다는 것이 꼭 소명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소명은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것에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새포도주 비유에서 가죽부대가 견디지 못하고 터지듯이,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권세가 견디지 못해야 합니다.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가 보통 개인적인 소명으로 접근을 하는데, 공동체적인 (현재적)소명을 지향하며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소명공동체가 없으신 분은 소명공동체를 꿈꾸시고, 속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소명이 없다면 공동체가 공유하는 (현재적)소명을 기대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성품을 연습하고, 또 용서의 선포로 이 세상권세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비전이었습니다.
4. 맺음
음유시인인 T.S. Elliot은 ‘The Rock’에서  “Where is the Life we have lost in living(우리가 사느라고 읽어버린 우리의 삶은 어디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우리가 goal-driven 인생을 살고 탁월성을 추구해가면서 바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이제 우리가 높고, 강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려 같이 따라가야 하는지 우리 인생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겠습니다.
“네가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에서 물론 여러가지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불 붙어 타지 않는 떨기나무가 모세 자신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모세의 마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과 desire를 여전히 품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불러 내셨습니다. 신을 벗고 (상전에게 표하는 극도의 순종을 보여줌) 순종하는 모습으로 가도록 하나님께서 모세를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현재적 소명에 충성하는 가운데 기초가 다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KOSTA에서 김동록 박사를 만나보았습니다.  

코스타 이후의 강사님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씨애틀 근처의 몇 군데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이들과 코스타 전후로 잠시 쉬었던 만남과 교제를 다시 하면서 서로 돕고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지요. 제가 직접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또 최근에 달라스(시카고 코스타 4지역)에서 새로 시작하시는 성경공부가 있는데 그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어서 제게도 무척 격려가 됩니다. 또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욕심만 많아서 그런지 진도가 나가질 않네요.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성경의 진리를 하나라도 더 알고 (뭐 전하기까지 해야하겠지만) 싶은 욕심이 끝이 없어요.
강의에서 (시간상의 이유로, 혹은 다른 이유로)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이곳에 나눠주세요.
복음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가지는 폭발적인 능력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힘들어요. 저희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저희 잠재의식속에 내재되어 있어서 항상 기독교가 이세상 권력에 정면 대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지요. 근데 만약 그 말씀이 헬라어 용법에 맞게  “내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 아니라”고 해석이 되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이 왜 그토록 자신과 하나님 나라가 너무 일찍 드러나는 것을 말렸을까요? 그저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으로만 포장되어 와전되기를 우려하셨다고 보기에는 미흡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났을 때 정치적 세력의 핍박이 너무 일찍 닥쳐오기를 우려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말씀을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한다면 그런 우려가 필요없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믿기로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짓누르는 권력과 가치관에 온 몸으로 정면 대적하면서도 오히려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의 핍박을 받아내시고 용서하심으로 그들의 속박을 끊어 버리시고 승리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내가” 어디로 갈까, “내가” 무엇을 할까라고 고민하는 젊은이들의 앞길에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그 왕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이 새로운 가치관이 젊은 분들의 장래를 설계하는 기본 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명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시게 된 동기와 강의제목을 ‘방황하는 소명’이라고 정하게 되신 동기가 궁금합니다. 제목이 굉장히 attractive 합니다. 
사실은 저 자신이 방황했었거든요. 강의에서 이야기한 비전을 핑계한 무기력함은 제 모습이었습니다. 유학 온 동기나, 유학와서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지역사회, 교회, 이웃섬김에 대한 모든 일에 눈과 귀를 막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떠날 사람,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것이라는 핑계로 10년을 보내었지요. 전혀 현재적이지 않았고 왜곡된 미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으로 교수직을 받아서 금의환향하고 학교 캠퍼스에서 기독교 동아리 지도교수가 되어서 학생들 지도하는 그런 꿈을 꾸었지요. 꿈이 순진한 만큼 제 삶도 순진하리라 만큼 이기적이었지요. 연구실에 처박혀 정신없이 일하다가 어느날 번뜩 제 삶이 성경적인 소명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주변 선배들과 후배들에게 조심스럽게 확인을 해보니 과연 제 생각이 비전이 아니었던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헤맨 것이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거의 대부분)  유학생이나 청년기독교인들이 같은 오류 안에서 인생을 고민하고 있더군요. 이런 강의를 하도록 해주신 것을 제가 허비한 것을 갚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특히 소명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요
소명이 전 생애를 통해 지속되어야 하는 엄청난 것이란 부담감을 내려놓으시면 좋겠습니다.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하는 것일테니까요. 굳이 예를 들자면 마치 소명을 3-4년 전심을 다해 노력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하시는 정도로 봐도 되겠어요.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는 또 그때 가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고. 저는 그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예언자적인 상징을 통해 이 세상의 권세와 가치관(사단의 세력에 잡힌 권세)을 향하여 “너희 나라가 아니란다. 하나님나라가 이런 특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단다”라고 하면서 세상권세를 길들여 가는 비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역을 하나하나 선포해 나가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작업들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정직함, 아무도 노래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 나가는 작업들인데, 매주하는 작은 성경공부, 그리고 그 구성원에 대한 아무도 모르는 속타는 기도와 돌봄 등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고 듣지 않지만 이를 행하는 나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과 어려움과 불편이 늘 함께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권세와 가치관을 거스리기 떄문입니다. 우리의 앞길에 대한 고민이 이런 길을 걸어나가기 위함이라면 숨겨진 영광된 가치와 비밀스러운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밭에 숨겨진 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