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라는 주제로 열린 2004 KOSTA/USA집회에는 ‘한국교회사 속에 나타난 공동체의 고난과 영광’이라는 눈에 띄는 주제를 볼 수 있었다. 이번 eKOSTA에서는 신사참배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사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 강의해 주신 김승태 목사님을 만나본다.


“김승태 목사는서울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를 전공하고 한신대, 숙명여대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전공하고 2002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90년부터 현재까지 사단법인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장, 세움교회 목사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등 다수가 있다.”


eKOSTA 목사님의 강의를 매우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한국기독교의 신앙 전통으로 강의의 문을 여셨는데요, 강의를 듣지 못한 많은 코스탄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번 강의 내용을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승태 제 강의의 요지는 우리 신앙 선배들이 어떤 고난을 당했고, 고난이 닥쳤을 때 그 고난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를 그분들이 직접 남긴 자료들, 편지들, 책들, 회고록 등 일차 자료를 통해서 살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공부해온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신 분들, 옥고를 치루신 분들, 순교당하신 분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eKOSTA 신사참배 문제가 큰 이슈가 되어서 개신교의 경우 교파가 분립될 정도의 문제가 되었는데, 카톨릭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김승태 개신교의 경우 장로교회가 큰 문제가 되었고 다른 교파는 이른 시기에 굴복을 해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카톨릭의 경우, 일본 카톨릭의 경우 오히려 프로테스탄트에 비해 더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32년 경에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양심의 저항으로 거부한 분들이 계셨습니다. 평양의 메리론 선교회는 미국 계통의 선교회인데 그때까지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만 바티칸의 결정 이후는 굴복했습니다.


eKOSTA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셨고 전공이신 한국기독교회사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요?


김승태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마을에 교회가 생겨서 누가 나가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제가 나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교회가 생겨서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가정에부터 예배드리곤 했습니다. 교회 자리에 뽕나무가 있었는데, 새벽에 뽕나무에서 기도하던 기억도 나고, 한번은 책을 읽다가 소를 잃어버려가지고 소를 찾으려고 산에서 기도하는 것을 담임선생님께서 보셨고 그 다음날 겨우 소를 찾은 기억도 있습니다.


실 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깨달은 것은 중학교 3학년 쯤이에요. 중학교 1학년 마치고 집안이 어려워져서 검정고시를 하려 서울에 올라왔는데 학교에 안 나가니까 교회에서 중등부나 고등부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선생님이 어느 학교 다니냐고 하셨을 때 아무 말을 못했어요. 그게 상처를 받아서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어요. 한 일년 정도 못나가다가 마음속에 내가 사람보지 않고 하나님보고 교회에 나가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새벽기도하던 습관이 있었으니까 새벽기도회부터 나갔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마침 로마서를 강해하고 계셨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나를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인데요,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정하셨다는 말씀인데요. 내가 왜 이렇게 방황하는가? 이것은 내 죄 때문이고 내가 나를 포기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회개를 하고 그 후 하나님께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계속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KOSTA 그러면 그게 몇 년쯤 됩니까?


김승태 서울에 온 것이 68년이고 1970년에 세례를 받았으니까 그 사이가 되겠네요. 처음 신문배달을 해서 성경을 샀습니다. 성경을 처음 읽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밥도 세끼 먹는데 세장은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안 읽으면 밥을 굶는다 결심했어요. 나중에 하도 재미있어가지고 줄을 치는데, 나중에 서신서를 보면 다 줄을 쳐 놓아서 더 줄을 칠 필요가 없는 그렇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제 가 신학은 늦게 했어요. 40이 넘어서 했는데, 제가 남동생이 네 명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신학을 공부한다면 내가 그것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공무원도 하고 군인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던 중 그러면 “너는”이라는 내적 음성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신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신학 하기 전에는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이만열 선생님과 같이 한국기독교회역사연구회에 84년부터 활동하면서 기독교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사참배 문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일 본의 신도가 어떻게 한국에 들어오게되었고 한국사람들이 어떻게 저항했는가를 공부했고, 독립기념관에 근무했었는데 사람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꼭 해야되겠다고 생각해서 이 일에 전념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두고 모임을 만드는데 전념하게되었습니다. 이만열 교수님이 회장 맡으시고 저는 총무를 맡고 해서 모임이 이루어졌습니다.


eKOSTA 목사님께서는 ‘신사참배’ 문제는 교회와 불의한 세속 권력과의 갈등관계로 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신사참배와 관련된 갈등에서 더 넓은 교회와 세속 권력의 충돌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김승태 세속 권력은 항상 권력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서 작동하죠. 자기 권력의 확장을 항상 추구하는데, 목적을 위해서 성서에 어긋나는 방식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럴 때 교회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합니다. 종교와 정치는 창조적인 긴장관계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죠.


일 본제국주의하에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강요하고 심지어 교회에서 헌금을 내고 종을 바쳐라 하는 명령이 있었죠. 그런 거를 강요하는 것은 명백이 성서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죠. 이것을 거부했어야 하는데, 거부하고 목숨을 걸고 저항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참여하거나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순교하거나 항거한 분들을 귀감으로 삼을 만하고 신앙의 좋은 유산으로 살려야 할 것입니다.


eKOSTA 신사참배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거부하다 순교 당하신 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계신데요, 어떤 분들이 계신지 말씀해주십시요.


김승태 제가 강의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많은 분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회고록, 수기, 재판 기록등을 접할 수 있습니다. 순교하신 분 중에 박관진 장로님, 최삼열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같은 분들, 순교하신 분들이 50여분들이 있었고, 옥고를 치룬 분들이 2000여명 계시고, 4, 5년 이상 옥고를 치루시다가 해방을 맞으신 분들도 20여분 계십니다. 안이숙 여사라든지, 손양원 목사님이라든지 그런분들을 소개했었습니다.


eKOSTA 신사참배의 고난이 순교자적 교회를 세운 기회가 된 반면 한국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점도 있는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교단간 갈등), 전체적으로 평가해 볼 때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김승태 신사참배 거부가 해방후 장로교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누구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교회 출신이다라면서 자신들과 연관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훌륭한 전통으로 생각합니다.


그 런데 해방 직후에는 이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는 양상이 벌어졌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했던 사람들은 회개하고 거부했던 사람들은 굴복했던 사람들을 포용해주는 태도를 보여주었다면 교회가 특히 장로교회가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포용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비판하고 정죄하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나누어진 이유는 소멸했지만 분열이 더 심화되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되는 운동, 일치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eKOSTA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세속 권력에 대한 타협의 유혹이 많이 있는 것같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를 바라보시며 한국 교회가 순교자적 전통을 어떻게 계승해야할 지 조언해주십시요.


김승태 우리나라 초대 교인들은 사실 목숨을 내놓고 예수를 믿었어요. 신앙의 자유가 법령적으로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각되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죽게되는 상황에서 믿었습니다. 일제시대에도 여러가지 불이익이 있었지만 고난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한 믿음을 소유한 분이들이었고 순교의 태도, 안이숙 여사의 예를 들었지만 순교의 훈련을 준비하는 분들도 계셨죠. 이런 신앙 선배들에 대해서 우선 한국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되겠습니다. 요즘은 고난에 대해서 듣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축복만을 강조합니다. 먼저 이런 고난에 대한 믿을에 대해서 알고 그럼으로써 신앙 전통들을 유산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같습니다. 교회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하겠습니다.


eKOSTA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새로운 교회에 대해 어떤 비젼을 갖고 계신지요?


김승태 우선 기본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정말 교회다운 교회,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어렵듯이, 정말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는 어려운 일인 것같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사람을 사람으로 세우는 그런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세움교회, 세우다라는 뜻으로 사람들을 대접하고 세운다는 뜻에서 지었습니다. 이름대로 사람들을 세우고, 누구든지 기쁘게 와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제 가 평신도에 있을 때 독립교회가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제가 어렸을 때 처음 나간 교회가 기장교회였고, 기장 신학대학에서 공부했기때문에 독립교회는 아니고 기장교회가 되었지만 교파가 아닌 하나님의 교회를 지향하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방학동에 지하에 작게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eKOSTA 마지막으로 코스타에 참석한 많은 유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김승태 코스타에 대해서 이야기만 듣고 이번에 처음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젊은 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감동받았어요. 평양 과기대를 준비하기 위해 자기 삶들을 포기하는 모습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당부하고 싶은 말은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주님의 분신이 되어서 한국 교회를 섬기고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그런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신앙의 선배들처럼 그렇게 되려면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신앙의 유산을 잘 받아서 또 후배들에게 잘 전달해주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