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둘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2강(수요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c)



오늘 주제강의 두번째 시간에서는 이번
KOSTA
주제말씀중
[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을 살펴본다.

고통의 시대

우리가 살아오면서 특히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 고통, 재난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의 연대성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서 이러한 아픔과 눈물을 끊임없이 경험하게 된다.

또한, 문화, 역사, 뉴스, 책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이 고통스러운 곳임을 발견한다. 물론, 세상에는 아직도 아름다움과 선함, 참됨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들어와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 반창조 혹은 반생명의 증상이 발생하여 우리가 고통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속에서 구원역사를 이루어나가야 하므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시고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비밀스런 은총을 부어주심으로 창조세계를 보존하신다.

그러나, 세상의 악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쁜 사건, 내가 지은 나쁜 죄가 아니라, 엄청난 세력, 유사인격 혹은 하위 인격처럼 거대한 사람과 같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창조세계와 인간을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악은 더욱 거대하고 강력해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오늘날 악이 훨씬 강하고 많다. 활로 했던 과거의 전쟁과 단추 하나로 수십만명을 죽이는 현대의 전쟁을 비교해보라또한, 인간성의 황폐, 물질주의의 기승으로 사람의 가치가 그가 가진 물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는 과거에 별로 없었다.

세상,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실 , 세상이란 무엇이고 이겼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하자.

세상을 이겼다십자군 전쟁을 통해, 혹은 복음 전파로 이교도에 대한 승리 혹은 개종? 질병과 굶주림의 정복?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무엇을 이겼다는 것인가? 마디로, 죽음, 사망을 이기셨다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 것은 단순히 분이 죽은 몸에서 살아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fact
이기는 하지만.

죽음이란 생물학적으로는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저주가 끝까지 계속되었을 일어나는 사람과 피조세계의 궁극적인 운명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 그것이 저주임은 어제 살펴보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우리들을 말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바로 저주
– curse
퍼붓는 것이 아니라
이다이것은 마치 태중의 아기가 탯줄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과 같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된 상태에서 영생의 복을 항상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인데, 탯줄을 스스로 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이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결과로, 우리는 죽어가고 죽는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저주이다. 이로부터 모든 악의 증상들
미움, 증오, 시기, 질투, 폭력, 파괴와 같은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것이다. 사랑해야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 그로 인한 극심한
죽을 같은
고통, 가난과 질병, 공해, 자원고갈, 환경오염 모두가 죽음의 증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인격적인 죄로 말미암은 것들, 이것을 사주, 확대 재생산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사탄이다. 그래서, 지구상의 악의 세력은, 모든 인간이 지은 죄를 합한 것보다 훨씬 크다. 사탄이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의 작은 죄로 시작된 모든 죽음의 증상은 사탄을 통해서 증폭되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 그러하다.

, 모든 죽음의 증상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오게 것이다.   

살후
1
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때에
안식, 완벽한 샬롬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되어있다. 때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자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전까지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 돌이켜 회개하면 샬롬을 회복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지만, 때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에서 벗어날 기회가 다시는 없다. 또한, 하나님과의 거리는 불가역적으로 무한히 멀어진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죽음의 증상에 고통스럽게 시달리다가 창조물로서의 모든 존재가 파괴되고 소멸되는 죽음을 맞는다.

죽음, 샬롬, 부활, 구원과 같은 성경의 위대한 언어를 이해할 , 도덕적 죄의 회개와 죄사함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꿈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로 파괴되고 있을 ,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악을 몰아내시고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샬롬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 꿈의 부분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한 꿈이 이루어진 상태를 샬롬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제 혼자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과연 우주에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졌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의미는, 부정적인 세력의 극치, 악의 극치, 악의 세력의 궁극, 죽음을 이기셨다는 의미이다.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사역, 귀신을 쫓으심, 바다를 잠잠케 하심은 모두 예수님의 악의 세력을 잠재우는 능력을 보여준다.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하자. 내가 만지면 옮는데, 예수님께서 만지시면 병이 낫는다. , 악의 결과, 죽음을 정복하는 힘을 미리 십자가 이전 부터 과시하셨다.

그리고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결정적이로 최종적으로 세력을 없애셨다. 십자가의 사건은 실제적,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사건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며 악을 없애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선포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가? 로마정부의 하수인 빌라도, 식민통치 정부 헤롯왕의 하수인, 대제사장 무리들과 같은 권력자들이 모여있었다. 한결같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모든 세대의 권력자들, , 악한 정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강한 힘들을 상징하는 ,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주위를 포위했다.

그리고 유대인 군중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하나님없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인본주의라는 말이 선한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모든 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을 지칭한다. 왜냐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있음, 내가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을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유대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들이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 자녀, 아들이 된다 하나님의 언약의 선포를 수도 없이 들어왔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요한복음19:15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로마 황제 가이사외에는 왕이 없다 소리쳤다. 창조해주시고 선택해주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는 바로 오늘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있다고 하여도 믿을 없다고 주장하는 타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또한, 마태복음27:40에서,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 도전하였다. 이것은 사탄이 마태복음
4:6
에서 광야에서 예수님께 던졌던 도전이었다. 사탄의 강력한 세력이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를 애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악의 세력들, 인류 역사 이래 그리고 십자가 이전 모든 세대, 앞으로 모든 세대의 모든 악들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자기 존재와 인격의 안에 고스란히 받아서 죽음으로써 악의 무섭고 가공할 힘을 소진시켜 버리신 것이다.

십자가와 가시관 

십자가위에 가시관을 쓰시고 달려계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사형방법중 가장 잔인한 것이어서, 로마시민은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국가반역죄인, 로마 황제에게 반란을 꾀한 자에게만 가했졌던 로마의 극형이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여러 날을 매달아 두면 서서히 피를 흘리며 팔레스타인 땅의 태양의 뜨거움과 밤의 무서운 추위가운데 죽어가게 하는 무서운 형벌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독특하게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다.
가시 에덴동산에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다.   세상의 모든 종류의 악의 상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관은, 세상의 모든 악이 예수의 인격과 존재위에 얹혔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 마태복음27:51 의하면, 예루살렘 성소과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졌다. 휘장은 마리가 당겨야 찢을 있을 정도로 두껍고 튼튼한 장막이었고, 금색실로  그룹, 하나님의 천사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룹은 창세기3:25, 하나님의 샬롬에서 인간을 추방하실 죄인은 샬롬으로 돌아올 없음을 지킨 문지기, 하나님의 천사이다. 성소의 휘장이 찟김으로 이제 문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샬롬으로 들어갈 있게 것이다

갈라디아서
3:13

나무에 달린 자마다
(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라고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고 있다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죄목에 해당하는 형은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로 맞아 죽으시게 되면, 핍박받는 선지자로 인식되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것이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알고보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네라고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 죽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로마 반역죄, 유대인의 왕을 자처한다는 거짓죄를 덮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간교한 생각을 완벽하게 역이용하셔서 율법의 저주를 예수님께 부어서,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는 섭리의 도구로 활용하셨다.

부활로 성취된 샬롬의 시대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선포한 모든 메시지가 모호해진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항상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부활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죽으셨고, 장례까지 치루어져서
3
일이 되셨다. 육체가 썩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셨다
(
로마서1:3-4).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역사, 구속사의 단계를 보여준다. 처음 창조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의 창조의 시대, 육의 시대와부활 후의 시대, 시대, 영의 시대, 성령님의 시대인데, 영의 시대는 창조의 시대와 비슷한 점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시대, 하늘과 땅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영의 시대를 준비하셨고 여셨다. 그리고 들어가셔서 첫번째 주민이 되시고 우리를 초청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아직 실존은 들어가지 않았으나 주민등록이 옮겨진다. 우리의 실존도 언젠가 시대, 샬롬으로 충만한 나라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시대, 영의 시대는 예수님이 처음 오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완성될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 속으로, 미래에 있을 영의 시대가 부분적으로 침투해 들어온 이것이 바로 샬롬의 나라의 이중구조이다.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릴 것이나, 중간, 재림 전까지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것도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만 샬롬을 누릴 있다. “Already,
But not yet”.

그래서 시대에는 예수님의 샬롬의 나라와, 살기등등한 세상나라가 겹쳐있어서 우리는 크리스챤이면서도 부득불 고통과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궁극적인 힘이 없다.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결정적으로 소진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 조상들의 죄로 인한 증상, 질병, 장애, 실패, 두려움, 자연재해, 사고등을 인류의 연대성가운데 우리도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그러한 악의 최종적인 결과인 죽음이 완전히 소진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담대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2:14-15
인간의 실존을 정말 정확하게 묘사해준다.
죽기를 두려워 일생에 종노릇한다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증상들인 고통을 경험할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고 두려워한다그것이 죽음의 증상이기 때문이다. 미움과 증오를 받을 , 모든 악의 현상을 경험할 우리는 그것의 본질인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의 가장 자명한 증거는, 바로 먹고 사는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확실히 소진시켰음을 믿게 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나로 하여금 죽기를 두려워하게 했던 것들이 나타나면 이제 힘은 들지라도 두렵지 않다. 자유롭고 용기 있게 살게 된다. , 부분적인 제한적이나마 샬롬을 누리는 것이다. 영의 시대, 시대의 완전하게 누리게 샬롬의 열매, 맛배기를 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크기 때문에, 샬롬의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 영혼에 오게되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충분히 살아지고 나누어 있게 까지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므로 너희는 담대하라 용기를 내어라 말씀하신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자유함 누리게 된다. 가질 지라도 우리는 노심초사하면서 자기중심적으로 끌어당기면서 살기를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빼앗아 먹기 위한 작은 탐욕으로 인한 다툼과 전쟁이라는 매임에서 우리는 해방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가진 자유함과 샬롬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의 복지, 샬롬을 위해서 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샬롬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샬롬이 없는데 내가 죄용서 받았고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식의 구원의 개념은 일그러진 것이다. 나와 모든 사람이 전체성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다

어떻게 구원을 구체적으로 누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타적으로 누리게 되는지는 내일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