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셋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3강(목요일). 너희가 내 안에서 샬롬을 누리게 하려고이 말들을 하였다(요 16:33 a)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2000
예수를 믿는 초대교회에서 육체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부활에 대한 많은 증거와 놀라운 논리에 따라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선포하기를 하기를,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것이 아니라, 변화할 것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고전15:51-52)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비밀은 하나님이 이세상역사를 움직여 나가시는데 결정하신 내용인데, 그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 성경말씀을 통해 있습니다. 중에 복음과 부활이 들어있지요.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 삼키고서, 승리 얻었다. 어려운 말이지만, 썩을
것이라는 말은 욕스러운 말이죠. 썩을 것이란 말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셔서 지금 입고있는 육체, 우리가 벗어야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입으셨던 입으셨던 신비로운 영체를 다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사망이 승리에 삼킨 된다는 말은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을 정복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사망이 완전히 처리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55절에 계속해서죽음, 너의
승리
어디에 있느냐? 죽음,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기를 두려워 하기 때문에 일생에 모여 종놀음하는 모든 인류를 풀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사망을 조롱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망을 가져오는 것은 죄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6: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고 죄가 죄되게 하는 것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권세를 깨뜨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때에 여러분, 생각을 많이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성령님이 그토록 뿌리치던 나를 체포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만지실 때에 1초전까지도 믿어지지 않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신비스럽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이후에 빛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해서   깨달 있기를 바랍니다. 덮어 놓고 믿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안죽어야 하지요.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죽게 되죠. 요한복음 5
28절이하의 말씀에서는 구원받은 자도 부활하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부활한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 6절에서도  신약적으로 논란이
있지만,
둘째 사망이 있다고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첫창조때 받은 육체를 벗고, 부활하게 되면은 다음에 오는 사망이 진짜 사망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1 7절과 8절에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어떻게 되냐면, 죽고 부활한 다음에 영원한 멸망을 받는다고 합니다. ,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것이죠.요한계시록 20 12절에도 죽은자들이 사망도 지옥도 지옥에 던지운다고 합니다. 첫째 사망이라는 인간의 , 고통도 때는 처리되고, 이것은 둘째 사망, 불모시 (영원한 저주,  사망)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원히 하나님과 다시는 돌이킬 없는, 동떨어진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을 뜻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헬라어로 겐나입니다. 구약시대에 성밖에 있던 쓰레기소각장을 말합니다. 온갖 저주받은 것들을 모두 태우는 . 저주의 장소라고도 합니다. 자녀들을 불에 태워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다던지하면서 불이 타고 연기가 나던 곳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불탄다기 보다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지옥과 같은 삶을 생각해 본다면 몇만배 확대된 고통을 가늠해 어렵게나마 상상할 있겠죠. 요한계시록21장에서도 계속 나오는데요, 성경에서 말씀해온 언약의 말씀은 내가 너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영원한 나의 자녀가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죽는 생물학적인 죽음은 사망이라고 밖에 없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한 죽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5 17 18절을 다시 보면, 둘째 사망이 영원한 사망이기 때문에 첫쨰 사망, 그러니까 그리스도안에서의 죽음은 잠잔다라고 있겠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잠들때가 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토록 죽지않는 영체로 살아나셨고, 영체가 있는 새땅과 하늘 (베드로후서 3, 20-21 ) 이뤄질 것이죠 .
새로운 피조세계를 새로이 창조하신다고 해도 되겠고, 첫창조의 세계를 완벽하게 회복하셔서 재창조하신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새하늘과 땅의 모습은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도의 육체적인 부활의 몸이 첫창조의 영역때의  그것과  연속성와 불연속성이 동시에 있었듯이 새하늘과 땅도 그러합니다. 그러무로, 현재의 사는 이땅에서의 삶과 자연과의 연관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소중히, 아름답게 여기며 땅에서의 일을 충실하게 감당하셔야 합니다.

계시록 20장에서 하늘과 땅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보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의 사람들과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그리고,
고린도 전서 13 끝에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 알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늘에서 씻으시매 다시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으리니..
지상에서 인류역사 내내 개인적인 죄로, 집단적인 , 죄행으로 인해서 내가 직접짓지 않았음에도 피할 없는 인류의 연대성때문에 얽혀서 부메랑처럼 돌아온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 3절에는
다시는 저주가
없는
그런 새하늘과 땅을 준비하시고 여시고 예수님이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주민등록은 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완전히 들어갈 것입니다. 죽음, 영원한 사망과 고통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길 원하는데요, 예로 들어서 생물학적으로 가장 크다는 27m짜리 문어를 바닷속에서 만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왠만한 작은 배는 움켜잡는다고 하는데, 문어가 자신을 잡았다고 생각하십시오. 누가 와서 문어대가리의 머리를 찍었습니다. 문어다리의 힘은 빠졌고, 머리부분까지 다가가보니 죽어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망권세를 예수님이 깨뜨리셨기 때문에, 사망권세가 있는 현재의 고통은 이미 죽어 있는 것입니다. 설령 문어발처럼 우리를 움켜쥐고 있다 하더라도 고통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잘라서 죽일 있습니다. 나라가 열려있습니다.

나라는 시간개념으로는 미래의 것이지만, 현재의 역사속으로 역행해서 들어왔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원래는 구약시대에는 그것이 인류역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여호와께서 전격적으로 임재하셔서 유태인이 갖고 있는 the Lord day 개념인데 (주의 진노의
날의 개념).
Here and now
개념으로 현재 역사속에 역행하여 침투해서 들어왔습니다. 겹치는 부분의 초기 그리고 already but not yet, 곁치는 첫부분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역사의 중심입니다. B.C. A.D.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역사,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도 쓰는 용어를 봐도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에 있음이 보이시죠. 오직 십자가의 빛만이 이전의 세상을 해석해 주고, 십자가 이후의 날을 해석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내가 말들을 하는 것은 내가 안에서 샬롬을 누리게 함이라에서
들은
13-16장을 가리킵니다.  13 초반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자신의 죽음으로 죄가 속량됨으로 그리스도와 그들은 끊을래야 끊을 없는 관계가 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거쳐 새하늘과 ,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서 너희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신다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셔서 성부께 구하면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들속에는 성령님에 관한 설명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를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순간, 즉시! 성령께서 여라분의 존재속에 영원토록 머무십니다. 여러분이 참담한 짓을 그분께 한다 할지라도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다음에는 기도에 관해서 말씀하시죠. 14절에는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하십니다.
다음에는 사랑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말을 지키리니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 그러니까 성령, 기도, 그리고
사랑.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이말을 듣고 샬롬을 듣고 이해하고 조금이나마 즐길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안에서 샬롬이 가능합니까?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대리인격이시고,  자신을
숨기시고, 성부하나님과 성자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밤에도 동상을 있도록 조명이 있듯이, 성령님은 숨으시고, 다른 위격이 드러나시도록 역할을 다하십니다. 성령님이 오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성령님안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안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알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간헐적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영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성령님이 영원히 거하겠다하시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기도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종말의 것들, 새하늘과 새땅에 샬롬으로 충만할 것을 미리 앞당겨 쓰는 수단인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앞의 것을 빚을 내어서 쓰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신, 하나님의 실체이신,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증거하시는 분이 성령님인데, 새하늘과 땅에서 얼굴을 마주할 있을 정도로 확고한 것들이 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것을 기도를 통해 있습니다. 기도는 미래의 샬롬을 있는 수단이고, 오직 샬롬을 맛본 사람만이 사랑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맛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없습니다. 미덕이 사랑이 아니라, 샬롬을 맛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있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기도와 사랑. 이런 함으로써 그리스도안에서 샬롬을 누리기를 원한다고 하시는 것이죠. 예수님안에서 샬롬을 누린다는 것은 다소 자명해졌죠. 뒤집으면, 예수님 밖에는 샬롬이 없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같이 더불어 살자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있던 홍익인간의 개념도, 인본주의, 박애주의자들도 공평하게 살자고 하는데, 샬롬은 단순히 사이좋게 사는 것이 아니라, 샬롬의 구성원들이 반드시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약의 관게로 복구해야 함으로써,  아담의
죄로인해 상실했던 영원한 복을 다시 받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에 같이 우리를 담근 상태를 샬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원해도 샬롬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지혜를 같이 해서 더불어 살자!라고 해도 불가능하죠. 모든 사람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위해 많은 것을 추구했습니다.

모든 시대마다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추구해 왔습니다.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샬롬을 상실하고 나서는 머리좋고 뛰어난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있는 길을 궁구했지요. 서양에서는 이치, 진리, 철학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동양에서는 같은 작업을 ()
추구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죠. 첫날, 세상에 관한 세계관을 정리할 때에, 세상은 초월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초월의 세계에서 부어주시는 무한한 생명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것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만이 부으실 있는 생명의 힘말입니다. 운명을 어깨위에 짊어지고 사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단절된 폐쇄된 공간에서 하나님이 주셔야 받을 있고 누릴 있는 샬롬을 스스로 얻겠다는 것은 모순이지요.  수많은
종교와 사상이 있어 왔었지만,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러나 문제나 길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비밀번호를 잃은 복잡한 전자기기를 고치려면, 만든 곳에 가서 수리를 맡겨야죠. 번호조합을 때려 맞출 수가 없겠죠. 인간의 샬롬은 샬롬을 만드신 분께 물어봐야 합니다. 찾는 것이 아닙니다.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역사에서 궁구해 마지 않던 길과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이죠. 일단 폐쇄된 우주속에서 하나님없이 스스로 안녕과 샬롬을 찾을 있다고 자만하는 인본주의는 하나님 배제하고 우리끼리 샬롬을 만들어 보자고 하는 것인데, 가능하지 않습니다. 첫날에도 말씀드렸듯이 현실에 대한 인식은 비슷하지만, 세상이 고통을 당하는 곳임을 공통으로 인정하지만, 해법에 대해서는 다르죠. 죄를 해개하고 그분에게 돌아감으로 낙원을 회복할 있다는 생각이 다르죠. 허나 인본주의적 샬롬의 개념은 인간이 점점 진화하여 지상낙원, 유토피아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낙원은 하나님의 꿈이고 유토피아는 인간의 꿈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가능합니다.

불교, 유교, 힌두교,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과동양의 유교와 조로아스터교같은 많은 종교들이 있어왔죠.  신기하게도 예수님이 땅에 오시기 300 내지 600 전에 약속이라도 듯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에 반해서 나온 종교들도 있지요. 6c  이슬람교, 10c 사회주의를 들수 있겠습니다. 종교와 이데올로기와의 차이는 예식은 없으나 이념의 강렬함은 선동적이고 호소력이 있고 종교적일 있습니다.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는 20세기에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것은 인류의 끊임없는 여운이 담긴 문제이기 때문에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부디 부화뇌동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제가 보기에는 한국의 많은 청년들이 쪽으로 치우친 같습니다. 한국의 상황을 비추어 때에 좌파, 우파,  진보, 보수, 기득권자, 사회적인 약자등등의 용어는 많이 들어보셨죠?  1789
프랑스대혁명 혁명을 평가하기 위해 주어진 사회자의 오른쪽에 왕당파 (지롱드당), 왼쪽에는자크뱅파(혁명) 앉아 있었습니다. 좌는 현실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그러니까  권위를 부정하고 집단을 존중하고, 현실을 깨뜨리며 나은 상태을 지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라는
것은 공산주의만을 가리키는 것이아닙니다. 옛날에 레닌, 스탈린시대에도 좌파와 우파가 있었으니까요.  우파라는 것은 일단 현재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좌파와 진보를 일치시켜서는 안되겠죠. 보수는 현재상태를 지향하는 것이겠고, 진보는 좌파와 같이 개혁과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상태이겠지요.  그래서
진보와 좌파를 올바르게 규정하고 써야 합니다.  한국에서 좌파라고 하면 사회주의성향이 있다고 간주되는 경향이 있는 같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6세기의
종교와 이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이슬람과 공산주의는 절대로 무시할 없는 대단한 종교입니다. 포스트 크리스챤 릴리젼이라고 합니다. 시대와 앞으로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라이벌은 사회주의와 이슬람입니다. 참고로  사회주의는 개인주의를 무시하고 집단, 국가, 사회를 위주로 하는 마르크스가 제창한 이념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란 말은 사회주의라는
실제로 국가에 적용해서 공산당이라는 일당독재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고 사회주의 경제를 실현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근본목적은 계급없는 사회를 만들자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자를 억누르고, 가진자가 못가진자를 착취하는 것이야말로 악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나긴 과정을 밟아서 세상이 사회주의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확신하기를 역사는 내적으로 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장하신다고 생각하는데, 사회주의 사람들은 인류 역사 자체는 힘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따라가면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으로 사회주의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결정론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과정에 자본주의가 생긴다고 본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되는데, 자본주의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불가불 많은 노동자계급이 생기게 되죠. 그런데, 계급이 의식화되어서 국가기구를 깨뜨리고 노동자국가를 세우는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혁명을 통해 국가를 만들고, 일당독재하는 상태를 프롤레타리아독재라고 부르는데, 의회를 해산하고, 어떤 공무원도 육체조동자보다 봉급을 많이 못받고, 정규군대신에 시민군을 두고, 노동자평의회가 국가를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본가들이 반발하면 숙청하고 죽이고 쫓아내서, 노동계급이 완벽하게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상태로 만든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사유재산제도를 없애고 산업과 기업을 국가소유로 하고,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게 된다면 엄청난 국가의 부가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만인이 자기의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만큼 받는 화기애애한 공산국가를 만들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들의 꿈은 맞는 것이고 좋은 꿈일 있겠지만, 불가능하고, 틀린 부분이 많이 있죠.

John malinier 영국의
사회주의 논객인데, 사람이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르크스 주의가 다른 이데올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적 방도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계급구분을 철폐하고 착취와 전쟁을 종식시키며 세계노동자들이 지긋지긋한 빈곤과 고된 일에서 해방시키는 , 인류가 진보를 향해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말은 현실적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이전에도 자유와 평등을 향한 갈망은 있어 왔기 때문이다. 스파르트쿠스가 반란을 일으킨 이후로 억눌린 자들은 억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사상가들은 조화로운 사회를 꿈꾸었다이들도 샬롬을 꿈꾸워 왔는데, 가장 탁월하게 정리해서 제시했기 때문에 어떤 사회주의 운동이 나온다 하더라도 원본은 마르크스사상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들어보시죠. “다른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기독교도 왜곡되어 소망이 표현된 것이다”. 우리의 입장은 모든 종교와 사상들이 샬롬의 길을 추구하고 있지만,  사회주의 역시 이런 갈망이 왜곡되어 표현된 하나의 이념인 것이죠. 이것은 놀라운 개념이죠. 크리스찬이면서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된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우의 대결이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타협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저는 악이고 나는 선이라는 태도가 강한 같습니다. 이분법적태도가 참여정부시절부터 두드러진 같고요. 비주류출신의 대통령의 국정운영의 방법에 모두 동의하진 않지만, 서거소식 이후에 우리나라에 두드러진 , 우와 진보, 보수와 기득권자와 사회적 약자의 입장이 대조되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좌나 우를 편들면 안됩니다. 우리는 3 , 중도, 성경이 말하는 샬롬의 추구의 길이 버젓이 있는데, 편을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회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인본주의의 대표이고, 유물론입니다. 완전한 물질주의죠. 그리고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산다는 개념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모두가 공평하게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류역사 이래로 인간의 인간됨. 가치에 있어서 같다는 뜻입니다. 부자나 천재나 지체장애자나 인간으로서의 가치나 존귀함과  존엄성에서 하나님보시기에 똑같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같이 주어진다는 의미에서의 평등입니다.  빈부의 평등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특정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좌도 우도 아닌 샬롬의 길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나 이념에서 추구하는 파라다이스, 낙원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장 종교적으로 흡사한 이슬람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이유는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혁명으로 이루려는 낙원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와 이론이 제시하는 길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향은 가망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많은 시험을 받았겠지만, 마지막 시험은 만국의 영광을 보인 후에 사단이 십자가없이 샬롬의 나라를 이룰 있는 것처럼 속이고 권유하고 강요합니다. 

 가장 기독교와 유사한 사회주의 이론은 어떤면에서 기독교 이론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목사의 손자로 태어났고, 요한복음 15장을 졸업논문으로 쓸정도로 신학도였던 마르크스는 이미 기독교에서 말하는 낙원개념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생각하기에 부패했다고 바라봤던 기독교는 이룰 없다고 생각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통해서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모하메드가 만든 이슬람도 낙원개념과 구약의 많은 사상과 선지자개념을 갖고 있지만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자력으로  알라의 뜻을 이루려 하고, 죄를 짓지 않고 선행을 많이 쌓아서 스스로 낙원에 있다고 생각하는 ,   죄인된 인간들이 십자가를 통한 구속과 속량을 받지  않은채로 , 그들의 죄악된 욕망으로 이상향을 이룰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샬롬을 이루려는 것은 노력은 성공한 적도 없고 하나님께 불경한 일이기도 합니다.  샬롬의 나라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 15절에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어린아이들처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천국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말하는 것이지요. 내가 노력하고 값을 치루는 것이 아니라,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폐쇄된 우주가 아닌 초월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 (샬롬)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고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샬롬은 세상적인 것들이죠.  결국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얘기이지요. 그것을 중심으로 인권을 조금더 공평하게 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 인간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샬롬 누리지 못한 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광을 상실한 우리들이, ,  죄인들이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샬롬을 누리기 힘들죠. 인간의 타락한 본성때문에 사회주의를 통한 낙원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말리니어는 물질적 조건에 따라서 사람의 됨됨이가 달라지고, 사회에서 맺는 관계에 따라 인간성이란 달라질 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가 말하기를,  지배계급을 타도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혁명이 거듭남, , 지난 시절 달라붙은 더러운 얼룩을 떼어낼 있다고 했습니다. 사회주의가 말하는 공평하게 잘사는 세상, 약자들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은 중요하지만, 사회주의 이론이 이토록 구구절절 기독교의 진리를 비판하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회적 약자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대부분은 말을 주로 하고는, 실천하지 못하는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내가 기꺼이 손해보고, 내가 힘들기를 자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례로, 종로에서
the noble’s obligation 외치며, 기득권자들이 나눠야 하고, 평등해야 한다는 외침이 있는데, 정작 앞에 있는 라파엘의 집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라파엘의 집은 장애우들을 위한 시설인데, 이름없는 800명의 소액의 기증으로 운영되다가 운영난으로 다른 곳으로 이사가야 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요, 여전히 앞에서 평등만을 외치고 술마시고, 택시타고 집으로 가버린다는 것이지요.  역사를 위해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이 실상 사회적 약자의 삶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는 예가 되겠지요.

샬롬을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 기독교는 민족적인 거부를 받고 있습니다. 샬롬의 위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부분적으로나마 샬롬/영생을 미리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중의 모든 것되시고, 천하보다 귀하시고, 인생의 궁극/목적이 되시고, 육체와 마음이 허물어갈 때에도 영원한 분깃이 되시는 분입니다.  놀라움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샬롬을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민족적으로 거부당하는 지금,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복을 마음껏 누리고 나눠야 합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주머니것을 옮기는 것을 포함해서, 여러분의 특권을 누리지 않는 것도 나눔입니다. 수입과 사회적 지위로 누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출을 줄이고, 남들처럼 못살아 주는 것도 나눔입니다. 잘났지만, 못난 사람처럼, 존귀하지만, 비천한 것처럼 사는 것도 나눔입니다.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이렇게 떄에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을 통해서 흘러 나가게 됩니다.  세대에서 우리의 받은 복을  
적극적으로 아낌없이 내가  바닥이 나도록 나누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번째로는 악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악을 대항하셨는데, 십자가에서 악을 받아내서 수용해서 악의 힘을 소진시키셨습니다. 악을 튕겨낸 것이 아닙니다. 시대에 악을 대항하는 방법은,
국가와 사회에서의 악은 악으로 규정해야 하지만, 너는 악이고 나는 선이다의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악의 요소가 있으나   악과 작은 악이 있을 때에 already but not yet 시대를 살아 가면서 부득불 악과 작은 악을 선택해야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누구를 악으로 규정하게 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비폭력적으로 해야 합니다.

1988 3 25일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로바 국립극장앞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4시부터 촛불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2000명이 되었고,   장엄한 찬송가가 불려지고,
 기도로
30분간 지속되었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집회였습니다.  2000명정도가 경찰이 터뜨리는 체류탄속에서 조용히 해산했었는데요,  전세계로 방송을 타고 나가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결국에는 11월에 있었던 무혈혁명의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마틴루터킹과 간디가 주장했던 비무장,
무폭력운동이십자가의 방법입니다.  내가 악을 수용해고, 망가지고, 내가 죽는 방법을 통해서 이시대와 정치에는 이런 악이 있음을 규정하고, 시대의 사회와 정치에는 악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무기력해 보이는 작은 몸짓, 이것을 하나님께 오병이어처럼 올려 드릴 때에 하나님의 성령의 무한한 플러스 알파가 임하셔서 시대를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  샬롬의 주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청년의 때에 예수 믿게 되신 것만으로 성공하신 것입니다. 많은 것을 성취하신다고 해도 예수 믿지 못하셨으면 아무것도 안하신겁니다. 땅에서 가진 것이 없고, 원했던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예수를 믿고 샬롬으로 초대받으신 분들은 인생을 성공한 사람입니다. 복된 메세지를 잊지 마시고,  여러분의 일생속에 구체적인 메세지가 약효를 발휘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참고로, 3번의 강의로 주제를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계속해서 자세한 설교를 하며 화일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홈페이지를 확인하셔서 생각하실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