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간증, 간증하신 분의 요청으로 익명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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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나왔습니다. 제가 무대공포증이 있다거나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무엇을 의미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처음에 간증을 부탁 받았을 , 아주 순간적이지만 강렬하게 마음속에 자리했던그거 내가 하고싶다라는 생각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서 지금 자리에 오른 순간까지도 저로 하여금 망설이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저의 간증을 이렇게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믿게된 제가 가장 확실하게 하고 있는 경험은두려움입니다. 나는 이제 죄된 본성에 따라 없는 것이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삶의 주인이고자 하는 마음이 곳곳에서 감지되기 때문에 제게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쩌면 평생을 걸고 싸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거침없이 살았던 인생과 맞물려 있겠습니다.

지금은 학문을 하고 있지만, 학자의 길을 걸으리란 생각은 하질 못했습니다. 여기 유학생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어릴 적부터 성실히 공부하고 꿈을 키워서 이곳까지 나오셨으리라 생각되지만, 저는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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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이 우연한 일들이 겹쳐서 이곳까지 나오게 경우라고 있겠습니다.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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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 때까지 지기싫어하는 성향 때문에 공부를 잘했고 남들 웃기는 일을 좋아해서 전교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반내에서는 인기가 많았던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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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이 되면서 친구와 급격히 가까워졌다가 종국에는 절교를 하게 되는데, 시점과 사춘기가 맞물려 매우 혹독한 사춘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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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을 보내게 됩니다. 친구문제로 한참을 방황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가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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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 말이었는데, 성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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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에서 6등급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3학년에 접어들면서 성적을 올리지 않는한 대학가기도 힘든 성적으로 떨어지게 되다보니, 대학 까짓껏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던 같습니다. 아무리 1학년 때까지 착실히 학교공부를 했다고 해도 그렇게 2년을 숫제 놀았기 때문에 사실 대학엘 있는 상황이 벌어지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수능으로 입시제도가 처음으로 바뀌었는데, 새로운 제도의 시행이라 해는 특별히 1차와 2 두번의 기회가 주어졌고 복수지원이 시작된 때였습니다. 그런데, 1 시험이 고등학교 과정 기초부분이 많이 다뤄져서 예상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는 일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친구들과 시험 전전날까지도 재수할까 장사할까 그런 이야기들 하고 그랬던 같은데, 점수가 제가 어울리던 친구들과 너무 차이나게 나온 것입니다. 딴에는 내가 의리를 지키마하고 지원 안하고 같이 재수하마 했는데, 엄마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막내이모가 줄기차게 쫓아다니면서 한두군데만이라도 혹시 모르니까 지원하자고 졸라대는 통에 이모가 골라주는대로 아무 성의없이 대학입시원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진짜 기대도 안하고 생각없이 친구들과 놀고 있다가 대학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건데, 막상 합격소식을 들으니 갑자기 재수하기가 싫어지더군요.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친구들에게 집에서 대학가라고 난리가 났다는 어정쩡한 핑계를 주고서는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어설프게 들어가게 되었지만 대학은 제게 바꿀 없는 소중한 수많은 경험을 주고 의식을 성장시킨 장이었음을 부정할 없습니다. 대학을 들어가서도 학업에는 전혀 뜻이 없었고 음악과 영화, 그리고 문화/사회 비평 분야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많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자연스레 여행할 기회가 많아지고 여행을 통해서도 세상의 여러가지를 배우고 느낄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이런 저런 활동에 매진하는 동안 꿈같던 시간이 흘러 어느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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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 마지막 학기가 되어 졸업이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루는 날이 좋아서 잔디밭에 앉아 신문을 펼쳤는데, 세계의 뇌과학 연구에 대한 특집 연재 기사가 있어서 관심있게 읽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과선배 하나가 제가 잔디밭에 있는걸 보고 인사할 들렀습니다. 슬쩍 보더니 우리학교에도 뇌과학 센터가 생겼으니까 관심있는거면 한번 가서 알아봐라했습니다. 사실 뇌과학이라는 말도 신문보고 알았으니 관심있는 것도 아닌데뭔지도 모르면서도 뇌과학센터라는 말이 근사하게 들렸던 같습니다. 그냥 그래볼까하고 아무 생각없이 센터에 전화를 했는데, 어디에 전화를 누구에게 하는지도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한터라 상대쪽에서 누굴 찾으십니까 하는데 제가 글쎄요 했으니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죠. 뇌과학연구센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하는 것이라고 했을 전화 받으신 분이 친절하게도 새로오신 교수님이 계신데, 학생을 마침 찾고 있으니 만나보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연락이 닿아 새로 오신 교수님을 찾아 센터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것을 계기로 시작해서 신경과학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되고, 실험실을 떠나 미국에 나오게 되어서도 하게된 공부의 재미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게 됩니다. 뇌기능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고 연구접근 가능한 기술을 익히게 되면서부터 알게되는 것보다 알고싶어지는 것이 많아지니 학문이 주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구나에 미쳐 그렇게 년을 지내오게 됩니다. 어떻게 미국으로 나오게 되었나, 시애틀이었나에 대한 얘기도 한참이 길지만, 결론적으로는 우연한 일들이 계기가 되어서 시애틀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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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공부를 하는 것이 삶을 지탱하는 원천이었고, 그렇게 열정을 다바쳐 하루하루를 보낸는 것이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름있는 과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제가 하는 연구들이 다음 연구들의 중요한 기초가 있고, 이곳에서 배우고 익힌 기술을 들고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서 후학양성에 힘을 보탤 있다면 인생에서 몇가지 쯤을 희생해야 한다면 기꺼이 희생할 있을만큼 제게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시애틀에 와서 얼마되지 않아. 우연한 계기로 형제 분을 만나 성경공부를 소개받게 됩니다. 제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 좋아 소개를 받은 것이지 사실은 형제분과 초면에 시간동안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을 했습니다. 그것이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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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일이라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정확히는 기억하진 못합니다희미하게 기억하는 것은 창세기의 창조부분은  여러 신화의 내용들이 뒤섞여있는 형태라는 점에서 단순한 민족 신화에 가깝다는 내용과, 기독교가 종교로서 갖는 배타성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런데 논쟁 중간에 분이 자존심을 긁는 발언을 합니다. 제가 몰라도 한참 모르면서 아는 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너무 기초가 없어서 논쟁이 되질 않는다며 번만이라도 공부에 나와서 공부해보고 다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 없겠냐고 하셨죠.
아니오했어야 하는데, 자존심이 건들어지는 바람에
그러죠라고 대답을 것을 계기로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겠다고 입밖으로 내면 해야만 하는 성격탓도 있고, 도대체 내가 모르고 그렇게 말한다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 믿음이 없는 상태로 꾸준히 성경을 공부하게 됩니다. 삼년이 넘는 시간을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성경의 말씀이 크게 마음에 남는다거나 믿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이렇게 거짓말같은 이야기들을 믿을 있다는 것인지 더욱 의문스러워지기만 했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구절이 바로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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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말로 믿을 없는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었죠.

그래도 한가지 마음속에서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면, 성경공부 때문에 성경을 읽게 되면 읽게 될수록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개념이 마음에 자꾸 걸리적거린다는 점이었습니다. 한번은 성경공부하는 중에 성경책만 펼치면 왠지모르게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되어서 기분이 나쁘다라는 말을 했더니 형제분이 그것이 그러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말을 했을 당시에는 막연한 어떤 것이어서 어떻게 생각해봐야 하는건지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뭔가가 마음에서 걸리적거림이 있는건 분명하다 정도였을 겁니다. 그것때문에 처음으로 성경공부 이외에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던 같습니다. 저를 성경공부로 인도하신 분이 다니시는 교회를 따라 나서게 것도 즈음, 그러니까 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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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순이었습니다. 설교는 성경공부에서 갖기 힘든 통찰이 있게 하는 같아 좋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교를 듣는 중에 목사님이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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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구절을 잠깐 읊조리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런데 순간 말씀을 듣는 순간 머리속에 어떤 울림, 마치 보신각 같은 종이 바로 옆에서
하고 울린 것같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돌아서 나오는데 무슨 일인지 앉았던 자리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뭔가 변화가 일어난 같다는 느낌은 드는데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라 도무지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후부터였습니다. 무엇인가 다르다라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한 것은제일 먼저 감지한 다른 점은 성경을 읽을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려고 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마음에 망치로 내리치듯이 들어오는데 그것은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읽는다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없는 상태입니다. 모든 오감을 통해 말씀이 들어온다고 하는 것이 가장 비슷한 묘사가 아닐까 합니다. 성경을 통한 그러한 경험이 날마다 진행되면서 안에 이미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부정할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실로암에서 눈을 뜨게 소경처럼,
이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누가 이렇게 하게 합니까?’라고 물을 ,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부정할 없는 대답이 되어 역시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릴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저에겐 완전한 치유자로서의 주님이셨고, 온전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되면 세상을 보게 됩니다. 저는 눈을 뜨면서 처음에 보기 시작한 것들은 어제까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린 날의 친구는, 문화는, 그리고 과학은 제가 마음을 다바쳐 사랑했던, 무엇과도 바꿀 없던 내가 섬긴 우상이었습니다. 우상들을 위해서 그토록 죽을 힘을 다해 살았던 모습은 당시엔 반짝였을지는 모르지만 영원할 없는 그런 것이었음을 보게됩니다. 그렇게 때는 분명 즐거운 삶이었고 의미있는 것들이었는데, 이제는 안에서 너무 처절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모습을 인식하게 때마다 동시에 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이것은 너무 놀라운 경험입니다. 저는 항상 살아 숨쉬고 있었지만, 특별히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억지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 이상 나는 살아있다라는 생각을 해보질 못했는데,
나는 살아있다라는 인식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어제까지의 모습이라는 영상과 더불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복잡미묘한 상태를 저는 어떤 말이 형용할 있을지 아직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냥
감동이야 정말‘, 정말 감동입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신 하나님이셨고, 얼마나 오랫동안 저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셨는지에 대해 느낄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명을, 하루하루 풍성해지는 삶을 그냥 받기만 해도 되나, 내가 뭐라고, 내가 뭔가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별별 생각이 많이 들지만, 딱히 내가 있는가 말이다 그저 이렇게 주시는 풍요함을 누리는 마리 양으로 살면서 감사할 밖에는

시카고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창문너머 풍경을 보고 있다가 주체할 없는 감동에 사로잡혀서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고생을 했습니다. 된통 했습니다. 저와 오랫동안 성경공부를 같이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그동안 나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간구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추해서 내린 결론이거나 미루어 알게된 그러한 일이 아닙니다. 그냥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깨달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알려 주셨다라고 밖엔 저는 표현하질 못하겠습니다. 저를 오랫동안 대한 분들은 기에 곧잘 눌린다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기라는 것은 힘차고 강한 좋은 기운도 있지만, 독기와 같이 남에게 상처가 되는 기운도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말하는 기운은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악에 받히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열나게 되면, 스스로도 기를 다스릴 없어서 곤란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충돌 혹은 대폭발이 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자신의 단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기 쉽지않은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저를 경험한 우리 모임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을까요? 모습은 예쁘지 않은 모습입니다. 예쁜 사람 사랑하기야 쉽지만, 미운 사람 사랑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명백하게 제게 감동으로 알려주심은 그런 나를 위해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구한 영혼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온전한 하나님을 만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목메어 말을 잇지 못하게 정도로 감동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곁에 두신 하나님, 그렇게 일하신 하나님을 깜냥으로 도저히 측정불능입니다. 경험을 통해 제게 보이시는 하나님은 사랑과 풍요의 하나님입니다. 저는 우리 지체들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정말 거저 받았습니다. 그냥 이렇게 받는 주체할 없는 은혜를 두고 제가 있는 일이라곤 감격에 겨워 엉엉 소리내어 우는 일이 전부입니다. 지금은 제가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고등학교 친구하고 헤어지게 이후로 거의 울어본 일이 없는데 요즘은 하루에도 번씩 목놓아 울게 됩니다. 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심장이 터질듯한 감동 속에서 그러합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어야 일에 대해 저는 어때야 하는가가 제게 수행해야할 남은 명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때입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