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소그룹 모임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난 항상 ‘글쎄.. 모르겠어..‘ 아니면 교과서 적인 깨달음 들을 털어 놓았던 것 같다.


내가 느끼는 그분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왕’이시다. 


모태 신앙 덕에 배운 그분의 존재 명칭은 내가 느끼는 하나님을 ‘왕’이라는 언어로 격하지 않으면서도 내 심정을 고스란히 설명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 분은 머리를 조아려서 보이지 않는 왕처럼 나에게는 멀고 또 거리가 있는 분이었다. 세상에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믿어져서 믿는 사람, 믿어져도 안 믿는 사람, 안 믿어 져서 안 믿는 사람, 그리고 안 믿어 져도 믿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나는 그 네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라고 하는 것과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에서 허공에 대고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향해 기도하는 것은 장단 없는 음악에 춤추라는 것처럼, 참으로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더 구나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고 나를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셔서 아버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로는 정답을 컨닝 하는 수험생 마냥 그렇게 다른 사람의 믿음을 곁눈질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저 그분의 존재만으로도 무조건의 믿음을 내어 놓은 크리스찬들이 내 눈에는 그저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심성은’이라는 인간의 항변


세 상 만물이 보여주는 섭리와 아름다움을 바라볼 때면, 그분은 정말 살아계시고 대단한 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고단할 때가 많다. 내 삶에 대체로 만족하며 감사하기는 하지만, 아담이 저지른 죄 때문에 땀 흘리고 종신토록 수고해야 소산을 먹을 수 있는 현실 말고도, 아픔과 고통, 贊?허무가 가득 찬 이 세상이 고단한 것은 (모든 것을 이 지면에서 설명할 수 없지만,)난 내 삶을 통해 고스란히 겪은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혹은 고통의 내용가운데 평안을 달라고,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은 전능하고 뱀을 주는 아버지가 아니니까, 떡덩이 대신 돌을 주는 분이 아니니까 구하라고, 두드리라고 그러면 내 아버지가 주신다고, 나는 다른 기독인들과 같이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많은 경우 기도를 통해 일어났다고 간증하는 내용을 보면 정말 거짓말처럼 불행이 전화위복이 되어 감사한 것 아니면 그 내용은 고스란히 떠 않았지만, 위로의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내용이 전부이다. 말하자면 누구에게는(또는 어떤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누구에게는 (또는 어떤 때는) 그저 위로하는 나약한 하나님으로써, 세상에서 벌어지는 형통한 일에 대해서는 그 전능과 선하심에 대해 찬양을 받으시면서,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때는 그저 거기서 위로하셨다는 내용으로, 혹은 인간의 죄나 세상에 관영 하는 사탄의 행패로 그 책임과는 관계없다는 설명을 들을 때 나는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을 넘어 이해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나는 내가 기도한 대로 그분이 들어주시지 않은 사건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시간이 흘러 내가 죽을 것처럼 여겼던 문제들이 적절한 시기에 해결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믿으려 해도, 도대체 일관성이라고는 구약 내에서 (전능하신)혹은 신약 내에서(위로하시고 함께하시는)도 찾기 힘든데 하물며 내 삶을 통해서는 더욱 알 수 없는 그분의 섭리 기준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 런 분이 창조 섭리아래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하나님을 온전히 감각할 수 없는 죄의 유전자를 타고난 나에게 사랑과 신뢰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분을 독재하시는 왕으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역사와 수천의 증인들의 말을 믿고 인간으로 지음 받은 존재 목적에 충실 하라고, 로보트가 아닌 존재로 창조했다면서.. 사랑과 신뢰라는 것이 일방적 일 수 없는 것 아닌가..


많 은 사람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싫어도 떨쳐낼 수 없는 모태신앙인들의 책임감- ‘믿어야 하느니라’ 에 나는 정말 노력했었다. (물론 내 기준에서) 나의 멘토분과 이야기도 해보고, 또 다른 기독인들과도 상담을 해보았다. 세뇌 적 진단- 기도와 말씀으로 모든 현실의 문제 해결책을 내어놓는 교육에 의해 나를 자책해 보았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믿음이 생기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는 뭔가.. 심지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있었던 것 같다. 교회를 내 집처럼 드나들고 소위 영빨이 센 집회에 가도 내 종교적 감흥의 유통기한은 짧기만 하고, 어떻게 해서든 ‘믿어 보려는’ 의지조차 방전되어가고 있었고 냉소적인 나의 마음은 그분에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미국여행 그리고 KOSTA


그 즈음 스스로의 자질에 실망한 8년여의 직장생활에서도, 내 어깨에 얹어진 책임감, 의무감에서도 벗어나 쉬고 싶었다. 그래서 홀로의 미국여행을 무작정 계획했다. 우습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미국으로 여행 간다고 떠벌리고 다닌 것이 민망해서라도 가야했다.


여 건과 환경이 순조롭지 않았다. 사직서를 내고 서른 넘은 딸이 갑자기 미국으로 여행을 가겠다고 하니(그것도 6개월이나) 가족들의 질타는 두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친척들의 잔소리까지 들어야했다. (뻔한 시집이나 갈 것이지..의 종류와 신변의 걱정) 이 문제를 놓고 기도 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 같은 건 들을 수 없었고 환경의 인도하심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가지 말아야 한다는 쪽으로 환경이 만들어져갔다.
건강도 안 좋아졌고 계획적인 스타일을 좋아하는 내가 구체적인 여행계획도 공부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허락을 겨우 받고 전화로만 만났을 뿐 한번 도 만난일 없는 Atlanta에 계신 목사님과 Iowa에 친한 선배가 ‘오라’ 는 말에 대책 없이 무조건 티켓을 끊었고, 하루전날 짐을 꾸역꾸역 꾸려서 공항으로 갔다.


정신없는 몸과 맘을 이끌고 미국에 온지 한 2개월이 지났을 때.. NW gpKOSTA 준비위원 이었던 선배의 무조건적인 등록과 협박(?)에 NW gpKOSTA에 참석하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선배 때문에 참석한 NW gpKOSTA에서 처음에는 자비량으로 사역하시는 강사 분들의 헌신과 구체적인 강의내용에 조금 놀랐었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배낭에 침낭을 둘러메고 하나둘씩 모여드는 유학생들의 모습에 더 놀랐다.


KOSTA의 어떤 내용이 좋았노라고 나는 딱히 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허공에 대고 태어남을 저주했던 욥에게 그가 항변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시면서 감동을 주시던 그 모습처럼, 하나님은 나에게도 그렇게 다가오셨다.
NW gpKOSTA가 끝나고 한 이틀쯤 지난날 밤에 한 강사님과 하루에 성경을 3장씩 읽기로 약속한 것이 생각나 성경을 읽던 중.. 어떤 가시적인 현현도, 청각을 통한 음성도 아니었지만,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믿음이 생기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는 뭔가)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 모든 것은 전적인 그분에 은혜라는 사실이다. 그분이 주신 은혜가 아니면 나는 그분을 고민할 수도 하나님을 부를 수도 없고 성경의 인쇄된 글자 하나라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셨다.
내게 작게나마 믿음이라는 것이 생겼다면 그것은 온전히 그분에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인 거다! 노력하는 마음도 그분의 은혜라는 것.


그 은혜의 흔적이 더욱더 분명해질까 하는 기대로 WA gpKOSTA를 참석하려는 마음을 주심으로 교과서적인 깨달음에 지쳐있던 오랜 내 갈망과 답답함에 하나님은 그렇게 응답하셨다. 


그 리고 KOSTA와 여행을 하며 만난 많은 좋은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홀로 다닐 때 마다 일용할 양식이상으로 나를 축복하시는 그분을 느끼게 해주셨다. 수만 가지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게 하시며 결국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정보를 담은 어떤 칩 같은걸 마치 마음속에 심기라도 하시는 것처럼..


에베소서 2장 8절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면..


솔 직히 그 깨달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얻고 싶은 대답들이 있고, 사람의 죄도 하나님의 선이나 악으로 판단할 수 없는 회색지대에 대한 회의는 남아있다. 아직도 먼듯하지만, 나를 다듬어 가실 그분을 믿는다. 이 글에 대해 내게 회자되어 돌아올 사람들의 반응들이 눈에 선하다. 나의 신앙에 대한 답보에 대해 불같은 성령의 힘으로 인생을 180도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언젠가는 너도 하나님의 감격에 겨워 살 거다”라는 등의 아래를 쳐다 보는듯한 태도- 확언컨대, 그러한 태도는 받아 볼 만큼 받아봤다. 정말이지 왜 울음에 묻혀 겨우 새어 나온 ‘하나님’ 한마디가 그 어느 분들의 유창한 백 마디로부터 쓴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신앙적 충고를 듣지 않으려는 교만한 마음으로 밀어내는 저항이 아니라, 믿음이나 은혜가 같은 돌이라도 누구에게는 반석이고, 누구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는 그 천차만별의 다름을 이해 받기를 바라는 소망을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켠 이 글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그러한 동정 아닌 동정이나, 어떤 집회가 나에게 좋았으니 당신들도 가보라는 상업성 멘트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나와 동일한 고민과, 같이 힘겹게 답을 얻고자 수고하고 애쓰고 그리고 돌아서서 울고 있는 그 어떤 이들에게 나도 그들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노라고, 같이 걸어가자고 내어놓고 싶은 마음에 답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동행 하셨듯이 오늘날에도 나와 함께 걸어갈 어깨 쳐진 형제자매들 뒤에서 함께 해 주시지는 않았는지 뒤돌아보는 마음과 함께….


내가 알기로 구원의 길은 믿음이다. 끈질기게 기다리되 너무 많은 회의로서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야 말로 구원으로 통하는 믿음의 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