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2003년 KOSTA/USA에서 김영봉 목사가 ‘기도의 삶을 위한 인간이해’라는 세미나를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2007년 집회에서도 멋진 세미나로 섬겨주실 김영봉 목사님의 강의를 기대합니다.


뉴저지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김영봉 목사입니다.(지금은 DC지역에서 목회하고 있다 – 편집부) 사귐의 기도라는 책을 냈는데 신학교에서 학생들이 자주 영적생활에 대해서 질문을 해올 때 상담을 해보면 상담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상황에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상담후 돌아가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신앙생활 안내서를 주고 싶어서 이 책을 썼습니다. 어제 소개된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란 책중에 기도는 훈련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삶이라면 기도가 잘못되면 삶 전체가 잘못된다는 것이고 기도가 어려워지면 삶이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가 즐거워지면 삶이 즐거워지고 또 기도가 왜곡되면 우리의 삶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항상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딸아이가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성경구절을 보고서 무슨 뜻이냐고 묻길래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냐고 되물었더니 기도하다 쉬지 말라는게 아니냐고 그랬습니다. 쉬지말고 항상 기도하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더니 어떻게 24시간 항상 기도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했습니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겠는가? 기도가 어렵지 않고 즐거운 일이 되겠는가? 찬송중에 ‘내 기도하는 이시간 그때가 정말 즐겁다’고 하는데 저는 오랫동안 기도하는게 힘들었습니다. 물론 기도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랬지만 노동처럼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의무감에서 벗어나면 기도를 쉬었습니다.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하나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기도의 상태에서 하루종일 삶을 사는 것. 이것을 늘 즐겨하고 사모하는 상태로 바뀔 수 없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을 쓰게된 동기입니다.

이 책에 다섯부분중 첫부분은 한국에서 가르치는 기도방식의 잘못된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산타크로스냐? 이것은 헨리나우엔이 지적한 것인데 어린 아이들이 선물때문에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기도의 촛점을 다른곳에 두고 나를 잊기 때문에 기도의 경험이 문제가 되고 응답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세상이 우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내 시야가 변하고 내 생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촛점이 다른 사람,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째는 기도는 하늘보좌를 움직인다.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기도를 요청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의 요청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앞에 나열하는 것은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직책을 맡았을 때가 있었는데 학생이 임원에게 왔을 때에 요구사항만 나누면 인격적인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귐의 과정이지 요구조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티즈 목사님의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의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받습니다 라는 책에서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junk mail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기도의 대부분이 버려지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잘 못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다 얻어진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에 그런 말이 있지만 그 앞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의 말이 우리 안에 거하면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설정이 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초신자의 경우에는 가끔 그럴 경우가 있지만 그런 일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의식을 수정하고 기도의 방법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숙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잘못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잘못된 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생각할 때에 율법적인 하나님으로 생각을 해서 우리를 못마땅해하고 우리에게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걸복걸 부르짖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 분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시고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상을 우리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 신관으로 자꾸 돌립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은 유대인이 생각하기에 유약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선의를 가지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멀리 계신, 율법적인 하나님 상을 바꾸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상으로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두번째 기도가 잘못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막연히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성경에서 찾아보게 되면 심리학이나 철학에서 찾아보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사실 정답을 낼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물이 아니라 인격체이기 때문에 전체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격은 개개인이 다르고 그 개인도 지금과 나중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정답을 이야기 할수 없습니다. 두번째는 인간이해는 인간이 주체이며 객체이어야 하는 모순이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세번째는 인간에 대해 이해를 한다고 해도 인간의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축소될수 밖에 없습니다. 칼융이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단순화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언어로 표현을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다르게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근거로 한 가설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말씀드립니다.

바울의 인간이해를 보면 인간 안에 세개의 자아가 있습니다. 헬라어를 우리말로 풀면 영, 혼, 육. 세 자아가 하나가 되어 활동하는 것을 몸이라 합니다. 바울이 많은 경우Body(몸)와 flesh(육)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를 통합하여 삼분법의 제 삼의 인간이해를 만들어 냈습니다. 히브리 사고에서는 인간을 분리될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로 이해했고 헬라적인 사고로는 인간의 영과 육이 분리가 된다고 이해했습니다. 영이 육속에 갇혀 있어서 구원은 영이 육에서 해방된다는 것이고 영혼불멸설로 발전을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영혼이 분리되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이 새롭게 되어서 전체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헬라적인 이원적인 이해를 극복해서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전체가 새로운 차원으로 구원된다는 삼분법으로 이해했습니다. 영이라는 자아를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육을 겉사람이라고, 혼을 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육(ed), 혼(ego, self), 영(superego, the self)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동양전통 유교에서는 육을 수성이라 하고 혼을 인성, 영을 천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안의 세가지 자아에 대한 개념을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육은 주로 본능적인 욕구를 이야기합니다. 육적인 성향을 부정적으로 많이 보아왔지만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선할수도 악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잘 관찰하다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욕구가 나를 이끌어 간다고 알고 그것에 육체적인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둘째로 혼에 대해 살펴보면 태어났을 때에는ego가 없습니다. 자라면서 자기보존의 욕구에 의해 자기를 만들어 갑니다. 혼의 자아는 우리에게 본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자아관을 형성하는 것이 엄마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가 엄마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거부될 때에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혼의 자아는 예수님을 믿기전, 믿은후. 혼의 자아상은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자아상은 버려야 합니다. 세번째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기 위해 주신 접촉접입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해 명제적으로 진술한 것에 세가지인데 요한복음에 영이시다. 진리다. 사랑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했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하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심산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길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어디나 존재하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재할 수 있는 영역으로 주어진 것이 영입니다. 그래서 인간안에는 세가지의 자아가 활동하고 있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세자아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정신질환은 세자아가 갈등하는데서 생겨난다고 합니다. 세 자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동심원 세개가 있고 맨바깥쪽에 영에 해당하는 것은 점선으로 되어있습니다. 동심원의 크기는 영향력을 말합니다. 제일 작은 동심원은 육, 그다음은 혼, 그리고 영이 가장 큰데 이 순서로 영향력의 크기가 되어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영과 교제하면 진리를 영이 깨닫게 되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전이받게 되어있습니다. 육과 혼으로는 하나님을 만날수 없고 참된 진리를 알수 없으며 참된 사랑을 할수 없는 것입니다. 영향력이 미치는 방향이 영이 혼과 육을 통제하게 됩니다. 이러면 자아가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존재가 영과 혼과 육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창세기 일장의 인간이 바로 이런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삼장의 인간은 타락한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었고 욕구가 생겼고 뱀과 사귀었기 때문입니다. 뱀이 어쩌다 마주쳤는데 그냥 한번 만남에 넘어갔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엉터리 작품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뱀과 꾸준히 사귐으로서 인간이 가장 많이 사귀어야 할 대상인 하나님, 배우자 그리고 동물인데 육적인 자아가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C.S Lewis의 책중에 사탄이 기독교인을 어떻게 넘어뜨릴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은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보면 인간은 신적인 존재로 솟아날수 있는 가능성과 동물적인 존재로 떨어질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와 사귀냐에 따라 신적인 존재로 될수도, 동물적인 존재로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들은 죄의 열매를 이야기하고 죄는 뿌리, 본질적인 상태, 하나님과의 분리를 이야기합니다. 사귐은 사귐은 사귐의 대상과 같은 성향이 커지게 되고 사귐의 대상과 다른 성향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이후에 영은 죽어버리고 육과 혼만 남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육과 혼도 분열됩니다. 육과 혼이 싸워서 이기는 쪽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진리를 알수도 없고 사랑을 할수도 없습니다. 자연인은 이런 상태인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우리 안에 바울이 이야기한 속사람이 생겨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지만 속사람이 태어나게 된 후에 영이 주관하게 되는 완전한 통합이 될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태어나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기 보다 더 생겨납니다. 두자아가 싸우다가 세자아가 싸우게 되기 때문에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요구하게 되는데 높은 차원의 부름과 낮은 차원의 부름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롬7장14절에 보면 영이고 속사람이 있고 속에 또다른 법이 있어서 나를 끌어내리게 되고 혼의 자아는 고통스러워 하게 됩니다. 차라리 안믿었더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25절 후반에 보면 영이 막 태어난 우리의 상태입니다.

영이 태어난 상태에서 이제 영이 성장해 가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부름을 위해서 경주해 가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과의 부단한 사귐를 통해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귐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많이 하고 있는 요구의 기도의 대부분은 혼에서 나옵니다. 사귐의 기도가 되지 못하고 요구의 기도가 계속되게 되면 문제는 자아가 변하지 못하고 강화가 됩니다. 요구만 하고 그러다가 가끔 되는 것이 응답이라고 생각하면 나에게서 나오는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기도를 통해 영이 성장해야 하는데 영은 성장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곤고한 사람의 상태에서 10년 20년 머무르게 됩니다. 진리의 자유함을 맛보지 못하고 진리의 능력과 사랑의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귐의 기도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유는 우리가 영을 키워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귐의 기도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자아는 원래 자아보존의 원칙이 있기 때문에 죽어 사라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길 원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서 나의 자아는 사라져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내 기도가 혼에서 나오는 나의 요구만을 하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을 피하면서도 정서적으로 기도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욕구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내 자아가 기도를 하는 것인지 영이 기도를 하는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기도는 일방적으로 내 요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침묵도 하고 묵상도 하고 내 영의 사람과 하나님의 충만한 경지까지 가지 않으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성생활이 무엇이냐 생각해 보면 참된 영성생활은 영과 혼과 육 세가지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고 기도만 해서는 안됩니다. 영성생활은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과 혼과 육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우리자아가 내놓는 요구의 기도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좋아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변화하게 됩니다. 헨리나우엔은 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참된 기도의 사람은 용기없이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무의식중에 하나님에게서 떠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변화하게 되는데 자아는 하나님이 변화시키게 하시기를 싫어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물을 던지라고 한곳에 그물을 던지고서는 나를 떠나달라고 고백하는데 이것은 변화되기 싫다는 자아의 고백입니다. 나는 고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부정합니다. 누구에게나 그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이 우리가 깊은 기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100%열어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 삶의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전통적으로 요구하는 관습에 매여 기도하면 우리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기도가 행복해 집니다. 이렇게 기도가 바뀌어 우리의 삶전체가 바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