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 미주 코스타 장성준 교수의 ‘기독교 지성’ 세미나를 녹취한 것입니다.



장성준 교수: 미국 올바니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현재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의 사회학과 부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25여편의 논문을 미국사회학, 범죄학, 사회복지학, 그리고 심리학 학술지에 발표하였으며, 현재 미국전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성(spirituality)과 영적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미국 대학생선교회 (Campus Crusade for Christ)의 Christian Leadership Ministries로 부터 2002년도 Erick Nilson Achievement Award and Grant를 수상했다.





지난 시간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지성적인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서 만든 인간도 지성적인 존재다. 그래서 지성적인 부분을 신앙생활에서 배척하거나 무시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온전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별嚥【?너희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을 때 영어로 perfect인 단어가 원문에서는 balanced라고도 번역이 됩니다.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전인격,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과 지성과 감정 등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교회, 가정, 직장, 자녀를 키우는 일, 공부하는 일 등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기독교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 오해가 많은 부분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절대로 반지성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지성적인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잘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thinking christian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 신앙 생활은 온전한 신앙생활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자유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함이 있게 됩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불안함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서 교회 안으로 도망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신앙과 지성은 물과 기름의 관계가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것을 분리시킬 때는 불안전하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관계가 아니라 떨어져서는 안되는 관계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성경을 먼저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올바른 기초없이 기독교 세계관을 쌓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은 성경을 바탕으로 정리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관 공부를 했을 때 우리가 지성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세계관 공부는 성경공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만 해서는 전도하는데 어려움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만 해서 전도하다가 크리스챤은 왜 저렇게 무식하지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자연계, 물질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할 때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관들도 일련의 가정을 내용으로 하는 믿음 체계가 있습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과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도 어떤 믿음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는데 그 믿음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기독교인들만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이 세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믿음체계를 출발점으로 사물을 보고 관찰하고 설명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설명이 있을 때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그런 비기독교적인 믿음체계를 바탕으로 한 설명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풀어서 분석하고 비판하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적인 체계를 논리적으로 지성적으로 변호하는 것이 기독교 변증입니다. Christian apologetics가 성경적인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갖고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물어볼 때마다 잘 설명하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줄 수 있도록 예비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그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이러이러한 것이고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지, make sense한지 차근차근 설명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부분에 훈련이 거의 안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으로 나가기 보다는 교회로 도망가는 경우가 많죠.


하나님은 무궁무진하게 풍성하신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절음발이 신앙생활하느라 힘든 거에요. 전도하다가 싸우게 되죠. 삐딱하고 뺀질대니까 화를 내게 되지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온전한 모습을 다 훈련받지 못해서 그렀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번에는 학문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기독교 학문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합시다.
제가 이 세미나에서 기독교 학문이 아닌 것을 먼저 말합니다. 첫번째 것은 spiritualizing하는 것을 기독교 학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영해하는 것이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성경적인 용어로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유럽 공동체가 유럽 연합으로 만들었잖아요? 그것을 성경의 계시적인 얘기로 열 마리의 짐승이 모여서 연합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해석해서 성경에서 미리 얘기하는 것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부 맞는 해석은 아니지만 전부 틀린 것도 아니죠. 그런데 여기서 기독교 학문이라고 하는 얘기는 그런 영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범죄학을 연구하는데, 범죄를 왜 저지르느냐 했을 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맞는 얘기죠. 그런데 제가 범죄학자로서 미국범죄학회에 가서 인간의 범죄는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라고 말하면 나가라고 얘기합니다. 신학적인 context에서 말하면 괜찮아요, 그러나 그 아이디어를 전하는 모습이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됩니다. 영해가 틀린 것은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학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simplistic fundamentalism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쓰신 편지에요. 일종의 글이란 말이에요. 글을 읽을 때 어떤 부분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하는 부분이 있고 어떤 부분은 비유로 쓰는 부분이 있죠. 그것을 구별을 못해서 성경에서 예수님이 독을 마셔도 죽지 않을 것이요 라고 하셨다고 독을 마시고 죽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영생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에요. 어떤 부분은 비유로 해석해야하고 문자로 해석해야하는 부분이 있어요. 애들이 말 안 들으면 집 나가라고 말하죠. 그때 아들이 집을 나가면 안 되요. 거기서 집 나가라는 말은 속이 상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직역하면 좀 모자른 행동입니다. 성경도 직역해야하는 부분이 있고 비유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Simplistic fundamentalism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부분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극단적인 태도가 있어요. 그것은 기독교 학문이 아니에요.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미팅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미국 범죄학회같은데 크리스챤 미팅이 있어요. Prayer meeting도 있습니다. 서로 교제하고 격력합니다. 크리스챤들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고 격력하는 크리스챤 활동이 아닙니다.


크리스챤 스쿨에서 가르치는 교육내용도 아닙니다. 성경 클래스가 있습니다. 진화론 같은 것을 가르칠 때 창조론을 바탕으로 비평하는 것을 가르치던지. 일종의 패러럴리즘입니다. 세상에서 가르치는대로 가르치고 교회가 가르치고 싶은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종교학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신학적인 이론이 기독교 학문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기는 한데, 그것을 가르켜서 기독교 학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학문의 정의는 무엇인가? Working definition입니다. 각학문 분야의 근본적인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성경의 기본 원리, 성경의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개념을 계발하고 발전시켜 주요 학술지에 발표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연구의 부분과 교육의 부분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얘기하는 기독교 학문이라는 것은 성경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얘기하는 원리를 각자 공부하는 학문의 분야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원리 중에 하나가 인간관이 있습니다. 인간관에는 기독교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만들었죠. 성악설과 성선설이 있죠.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Empirical investigation이 아닙니다. 성악설은 인간이 원래 이기적인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가정하고 그 위에 이론을 만듭니다. 범죄학 이론에서 성악설 이론에 바탕으로 한 것이 social control이론이 있습니다. 범죄는 사회 통제가 부재하거나 비효과적일 때 범죄가 결과로 나온다고 합니다. 만약 성악설을 출발점으로 범죄를 설명하면 원래 인간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악한 그런 동기를 갖고 태어났다면 인간을 통제하지 않으면 무슨 결과가 벌어지겠어요? 온갖 나쁜 일들이 벌어지겠죠. 그게 범죄입니다. 범죄가 많은 지역은 사회통제가 낮은 통제입니다. 싱글 패어런츠 가정의 청소년들이 비행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면 부모님이 혼자밖에 없을 때는 가정내에서 사회통제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이 예에서 보면 성악설이라는 가정에 기초해서 범죄를 설명했어요. 그러면 성선설, 루소 같은 사람의 주장, 인간은 원래 선하게 태어났다고 봅니다. 교육학에 큰 영향을 미쳤죠. 루소는 우리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은 순수하고 퓨어하기 때문에 출발은 innocent했다고 합니다. 왜 범죄가 있냐는 것은 사회의 여러 제도나 문화적인 것이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켰다고 봅니다. 사유재산제도가 사회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루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회의 제도나 환경이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그 결과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어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해답입니다.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수단으로서 제시한 것이 교육입니다. 그래서 루소의 철학이 현대 교육에 영향을 많이 미쳤습니다. 크리스챤 가운데 교육학을 공부하는 분들은 루소의 철학을 비판한 위에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쪽이 성경적인 원리인가요? 둘다 성경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성악설이 맞는 것같기도 합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나는 선한 일을 하고 싶은데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일을 행한다고 괴로와합니다. 성선설도 맞는 것도 같네요. 우리의 마음에 선한 일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성경적인 가정은 두가지를 모두 포함하여 다시 쓰여져야 합니다. 성경적인 인간관은 인간이란 원래 선하게 만들어졌으나 built in flaw 삶 속에서 선하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이룰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선하고자 하는 소원과 그 소원하는 것만큼 선하게 살지 못하는 딜레마에 있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실제 보면 인간이 사는 모습을 보면 성악설, 성선설보다는 성경적인 시각이 옳은 것같습니다. 기독교적인 학문의 기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성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지성을 바탕으로 가르치는 것. 실증적으로도 분석하고 인간의 영성을 실증적으로 측정한다는 말입니다. operationalize하고 empirically measure해서 analysis하면 relation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이 거부감을 가질 것이지만 성경적인 아이디어를 실증적인 이론체제와 개념 용어를 통해서 소개하면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학문을 왜 해야하는가 생각해봅니다. 고등학교까지 교회 잘 다니다가 대학가서 절반 이상의 크리스챤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경험적으로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노르망디에서 상륙하는 군인들이 마치 고등학교까지 교회생활 잘 하던 학생들이 대학교 캠퍼스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캠퍼스에 발도 못딛고 죽은 숫자가 엄청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렸을 때부터 성경공부 시키고 여름 성경공부시키고 중고등학교 잘 해서 보내도 대학교에서 살아남는 숫자가 많지 않아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하는 것을 기독교 학문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 이유는 대학교 캠퍼스에 갔을 때 학문이 비기독교적인 학문들입니다. 그리고 비기독교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아주 그럴듯한 틀 속에서 그럴듯한 과학적인 실증적인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교회에서 성경공부는 좀 했고 성경구절은 암송했지만 생각하는 능력을 배우지 못한 오히려 중고등학교 때 사고가 발달하는데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해요. 그런데 질문하면 미움받아요. 선생님이 대답하기 보다는 본인도 생각을 안 한 것을 물어보니까 당황스럽겠죠. 그런데 교회의 분위기가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이슈에 관해서 지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훈련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대학교에 가면 실패할 수 밖에 없는거에요. 캠퍼스에 발을 대자마자 다 죽는거에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아이큐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게 맞는 얘기같습니다. 진화론을 가르치면 그게 절대적으로 맞는 것같습니다. 살아남는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그렇게 젊은 지성들이 대학교에 가면서 신앙을 떠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독교 학문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같습니다.


미국의 교육계가 특히 대학이 완전히 세속 세계에 넘어갔어요. 그것의 근원이 60년대 70년대 문화적인 운동, 히피운동, 성혁명, 여권운동 등이 있었습니다. 문화적인 변동이 많았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학문적인 비판이 노골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미국의 교회들이 학문적인 과학적인 지적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도망갔습니다. 교회, 크리스챤 스쿨 등으로 도망갔습니다. 과학자, 철학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니까 그쪽으로 가는 것을 죄악시했습니다. 그래서 60년대 70년대에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 비기독교인이었습니다. 크리스챤들은 학문을 반기독교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언론, 미디어, 연예에서 기독교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저널리즘에서도 후퇴했습니다. 교회 안으로 도망갔습니다. 교회 안에서 뜨거운 예배와 찬양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을 완전히 놔두고 교회로 간 것입니다. 그 결과로 20, 30년 후에 대학 캠퍼스가 완전히 불신자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지성의 관점에서 학문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장터를 다 내준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당연합니다. 대학교뿐 아니라 문화의 주요 장에서 모두 빠져 나왔습니다. 이미 세상이 모든 영역을 장악했어요. 그래서 그 결과를 지금 맛보고 있습니다.


대학교수들이 교회를 나가기는 하지만 지성적으로 리버럴한 것이 그때 시작된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과 편하게 볼 영화가 없는 것이 그때 시작된 것입니다. 기독교 학문은 매우 의미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도 비슷합니다. 제가 답답한 것이 한국에 그렇게 교회가 많은데 문화가 변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미국의 문화의 주요 요소가 반기독교적이냐는 것입니다. Pure art보면 아주 황당한 것 많습니다. 예술과 문화 분야가 포스트 모던 분야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사회학, 심리학, 영화, 언론 등에 영향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 학문에 소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교회에서 토론되고 어떤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교는 다음 세대를 훈련시키는 곳입니다. 다음 세대를 결정하게 됩니다. Change the universitie, you change the world이런 말이 있습니다. 2차대전에 나찌 정부가 유대인들을 학살했죠. 극소수의 사람들이 살아남았습니다. 빅터 프랭클린은 나찌의 죄악이 독일 나찌 정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독일의 대학교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허무주의, 실존주의, 다윈의 진화론에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히틀러는 책을 많이 안 읽었는데, 다윈의 진화론과 니체의 책을 탐독했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정치적 사상을 형성하고 유대인 600만명의 학살을 추구한 것입니다. 우월한 종이 있고 열등한 종이 있습니다. 열등한 종은 도태되어야 하고 우수한 종은 남습니다. 진화의 법칙을 써포트 하기 위해서 열등한 종을 없애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니체의 철학에 따르면 신이 죽었기 때문에 인간이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권위체계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결정할 수 없어요. 인간 중에 파워를 갖고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리면 파워만 남아요. 진리를 중시하는 사회는 파워가 있어도 진리가 우선시됩니다. 진리, 기독교 학문을 다시 부활시켜야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학자들에게 있는 엄청난 소명입니다. 기독교 학문이 교수들이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여기에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문화적 대사명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잘 다스리라는 명령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의 각 분야에서 하나님의 원리를 나타내는데 노력을 해야합니다. 지금 미국교회에서는 문화적 대사명에 대한 강조를 합니다. 많은 한국 교회에서도 큰 호응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창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계를 잘 연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이즈에 대해서 여러가지 얘기하지 않습니까?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을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이 성을 만들었을 때 그 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잘 누리면 깊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데요, 그 디자인을 어겼을 때 그것이 성병으로 나타나건 낙태로 나타나건 무질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를 발견하는 원칙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면 공예학자들이 보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색깔의 조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자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 역사학자 한 분이 책을 썼는데요,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기독교 신앙을 얘기했는데, 앨럼나이 신문에 기사가 났는데, 많은 편지가 왔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뭔가 하나님을 대변하면 세상을 반발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면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을 드러내는 것을 언제 해야하는가 하는 것을 고민했습니다. 테뉴어를 받기 전에 할 것인가 테뉴어를 받기 후에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테뉴에를 받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루이지아나로 옮겼습니다. 테뉴어에서 짤렸습니다. (웃음) 그러나 그때 제가 speak up하지 않았으면 제가 지금도 하고 있지 않았을 것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잘못된 이원론, 미국의 학계가 자연주의적 관점이 지배합니다. 자연주의 관점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바로 낙제입니다. 자연과학 연구를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하지 않으면, intelligent design을 얘기하면 원서를 받지도 않습니다. 지성적으로 보아도 매우 폐쇄적입니다. Methodological naturalism이죠. Intellectual criticism입니다. 진리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듣기 좋은 얘기를 하도록 합니다. Pluralism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다원주의가 잘못된 것은 multi-cultural이 있으니까 모든 것을 다 동등한 것으로 하자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anti-intellectual하다는 것이에요. 다른 문화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상반된 주장을 하는데, 비교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학문을 할 때 중요한 것이 지성적인 이슈이고 영적인 이슈입니다. 도덕적, 문화적 상대주의가 큰 문제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절대진리의 거부의 문화가 있습니다.


실제 예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노르트 데임 대학의 철학자 애번 프랜티카 교수님, Christian theist이십니다. 데이빗 랄슨, 듀크 대학에서 정신분석학, 종교의 영향에 대한 연구를 하고 프로이드의 종교는 나쁜 영향이 있다 것이 주류 견해였는데, 그러한 견해가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필립 존슨, 유씨 버클리 법과 교수였는데, intelligent design에 대해서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양쪽의 논리적 주장을 듣고 진화론과 intelligent design에 대해서 연구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고 지적 설계를 적극 지지하고 계십니다. 마이클 힉, 과학적 시각에서 본 진화론의 문제점, irreducible complexity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이런 분들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학문적 과제에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기독교적 개념적 모델을 설명하고 마칩니다.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 기독교적 세계관, 물질론적 세계관이 있습니다. 어느 관점이 맞는 것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과학입니다. 자연주의적 이론, 기독교적 이론도 어떤 믿음 체계에서 출발한 것에서 동일합니다. 믿음체계에서 출발한 것 자체는 문제가 없어요.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관찰의 결과들이 어떤 세계관이 더 일관성이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과학은 증명하지 않습니다. 통계적으로 어떤 것이 더 나은가를 설명하기만 합니다.


어떤 정책을 토론하거나 지성적인 문제를 얘기를 할 때 성경책을 들고 토론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혼전 동거하면 결혼을 안정적으로 만드는가? 인본주의적, 자연주의적 견해에서는 동거해서 트라이해보고 결혼하면 더 안정적이지 않겠는가? 이혼율을 낮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관점에서는 커미트가 없는 동거는 사람들의 이혼율을 높이게 됩니다. 여기서 과학적 데이터를 동원해서 두 집단을 비교해보면 이혼율이 높게 나옵니다. 기독교적 설명이 맞다 라고 주장할 범위가 찾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계속 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