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핵심으로 들어가서 여태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리를  가르쳐 드렸는데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상대편이 나에게 상처준 것을 생각하면 절대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용서하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았는지입니다. 영화 ‘Passion of Christ’를 보면 예수님의 아픈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offend한 거 아십니까? 우리가 모든  죄를 졌을 때 그 모든 offend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용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기억한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은 자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기억 안하고 용서하려고 한다면 참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김철수 선교사님도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얼마나 큰 대가을 치르셨나요? ‘Passion of Christ’에서 그려진 하나님의 모습은 그 육체의 고통을 잘 표현해 줍니다. 육체의 고통도 너무 아프지만 제가 더 가슴이 아픈 것은 하나님이 외로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은 한번도 외로운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지만 항상 예수님이 여러분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둘째치고 하나님께서는 유아독존으로 유일하게 혼자가 되어보신 분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완전하게 separation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보신 분은 어떤 기분인지 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게 일시적이라도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독생자를 완벽하게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내 상처가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에 절대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용서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대가를 치르시고 여러분을 용서하셨는지 먼저 묵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용서의 첫번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계가 없으면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사랑할 수 있듯이 용서를 받아본 것이 머리에만 있고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힘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 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사랑과 용서를 기억하시면서 용서의 단계를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안되면 용서가 여러분에게 너무 큰 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지, 우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괴로움을 주었던 존재였는 지 기억하시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단계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깨달은 후 해야할 것은 상대편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cool’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적으십시오. 상대방이 나에게 얼마나 망신을 주었는지, 자매 같은 경우에는 사랑한다고 해서 순결을 주었는데 어떻게 날 버릴  수 있는지. 그 모든 것을 다 적으세요. 그렇게 아픈 것까지 종이로 다 적어서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상처가 다 빛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상처가 치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픈 감정들을 다 적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raw feeling’을 전부 다 적으시고, 그것을 잘 소각하고 버리시길 바랍니다. 정말로 여러분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 지를 정확하게 드러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머리로 하면 많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모든 쓴 뿌리들을 하나님 앞에 다 적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죄를 짓는 것이 무서운 것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에게 상처를 주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raw feeling’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이 일이 정말 힘들지만 우리가 용서의 원어에 담긴 의미처럼, 탕감해주고, 던져주고,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만큼 아팠으니 나에게 보복의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just maker’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게 상대편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저지른 행동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알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 모습을 따르기 위해서 용서를 실천하시는 것입니다. 상대편의 죄를 탕감해주고 복수할 권한을 포기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수할 권한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나에게 빚을 진 형제가 나에게 ‘백만 불’을 주어야 되는데 그 백만 불을 찢는 것입니다. 나에게 다시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이 용서했을 때 여러분을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교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만큼 중요한 것이 나에게 잘못한 상대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복수할 권한이 있는데 그것을 내려 놓았고, 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상처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서 담대하게 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는 이 일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다시 첫 번째 단계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날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용서를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자녀라 하고 싶지만 그래도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머뭇거릴 것입니다. 정상입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그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죄할 권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권리만 주셨지 정죄할 권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정죄는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다보면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blind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죄권을 안주시는 것은 즐거운 복수를 혼자 하려고 하시게 아니라 복수의 과정에서 상처받는 게 우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당신에게 맡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결과적으로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내가 복수할 권한이 있는데 하나님이 더 나은 ‘just maker’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공평하게 할 수 있도록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용서했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 용서했으니 봐 주세요’하더라도 그 사람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just maker’로서 일을 하십니다. 물론 상대편을 사랑하셔서 그 사람이 잘 되는 방향으로 하시겠지만요. 모든 죄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굉장히 정확하십니다. 우리가 용서했기에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도 그렇고 예수님도 저희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용서했다고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처음 용서를 시작할 때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이 좀 더 자라면서 좀더 성숙한 이유로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굉장히 정확한 분이십니다. 얼마나 정확한 분이신지는 물리적인 법칙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으셨을텐데 지구의  상태가 약간만 달라져도 지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물리적인 세상도 굉장히 섬세하게, 정교하게 만드셨는데 여러분이 받은 상처를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여러분도 용서받고 싶은 것처럼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보다 죄를 더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만약 사람들이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러셨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죄가 아니라고 할 만큼 정신이 이상한 분도 아니었고, 다른 길도 있었는데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실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어리다면 하나님이 복수해 주시는 것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숙하게 될수록  내가 받은 용서때문에 남을 용서하게 되고 내가 감사해서 용서를 하게 됩니다. 내가 일억의 빚을 졌는데 그게 탕감되었다면 누가 나에게 일 불을 탕감해 달라고 한다면 안 해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감사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되었으면 좋겠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용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better ‘just maker’라는 믿음에서 하셨으면 좋겠고, 그 사랑에 의해서 여러분이 용서하시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도 용서를 해야 됩니다. 용서는 믿음의  행위이고, 선택하는 것이며, 복수할 나의 권한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이며, 여러분을 위한 일입니다. 용서의 유익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당신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으시길 원하십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백만 달란트,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백 일과 천 오백 년의 노동의 차이와  같습니다. 용서를 안하겠다는 것은 일억 갚음을 받은 사람이 일 불을 안 주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제삼자와 가해자에게도 할 일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아픈데 주위에서 부채질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넌 크리스천인데 왜 용서 못해?”라고 말하지만, 그 사람이 그 상황에 있으면 펄펄 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조심하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제 삼자로서 도와야하고 곁에 있어주어야 한다면 기억하세요. 절대 쉽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정말 당한 사람에게는 큰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제 삼자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도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픔을 다 받으신 유일한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대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시고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쉽게 해결점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상대편이 해결점을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들어주시고 아픔을 공감하고 기억해 주시는 것이 너무 필요합니다. 가해자로서 중요한 일은 사과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과를 받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사과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주고 회복을 시작시켜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실수로 상처를 주었고 사과를  하면 상대편의 상처의 치유가 굉장히 빨라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해자일 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하고 넘어가지 마시고 그 사람의 상처치유를 위해서 사과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일은 아름다운 일이고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사과를 안 하는 것은 내가 상처를 주어도 나는 상관없다는 냉정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사과할 때 기억할  것은, 상대편에게 아픔을 준 것이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많이 싸우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이 의도를 하지 않았는데 당한 나만 바보가 되었다는 생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의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의도하였던 그렇지 않던 상처를 받았다는 게 아픈 것입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표현하고 정확하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백하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나쁜 예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상대가 무엇이든지 잘못한 것 같으면 용서해 주세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 잘못 안 했다는 말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상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집어주지 않으면 상대는 잘못한 것도 모르면서 ‘왜 용서를 해?’ 하는 식으로 나와서 여러분을 더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모든 것은 실수다’라고 넘어가면 안됩니다. 고의건 아니건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사람이 상처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상처를 주었다면 막연하게 화해를 청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저도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에요.’하는식으로 변명을 합니다.  하지만 상처는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서라기 보다는  그 행동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기에 이 말은 올바른 사과가 아닙니다.  고백은 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한 부분에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잘못을  했더라도 사과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훨씬 축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고, 그것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묵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 안에서 용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내려 놓으시고, 모든 일을 종이에 자세히 다 적으십시오. 그리고 내 안에 용서의 마음이 없는 것조차 고백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십니다. 용서할 힘도 구하십시오. 용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 마음과 힘도 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감정과 분노를 생각나게 하세요. 상처가 곪으면 정말 아프기 때문에, 그것을 터트려야 합니다. 이 일은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모든 감정과 아픈 고통들을 다 적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에서만 맴돌다가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감정들을 성령님께 드러내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다  드러나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릴, 던져버릴, 그리고 뒤돌아갈 힘을 구하십시오.  
이 일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진정으로 믿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이 어려움과 아픔을 통해서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하기 힘듭니다. 한 번 용서하면 끝난다고 생각하는데, 한 번 받은 상처는 오래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이 과정을 반복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끝없이 축복하십시오. 그것이 진짜 여러분이 용서를  한 증거입니다. 축복을  하라고 하니, 정말 화가 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람을 용서할 때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 때에는 축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