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미나는 2001 KOSTA/USA에서 뉴저지 지구촌교회 김두화 목사님의 강의 내용을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이 세미나는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갖느냐라는 주제의 세미나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주제가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기쁜 소식, Gospel이라고 하는데요.

먼저 세상에 있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죠. 세상에서 기쁜 소식이라는 어떤 것이냐, 공통적으로 다 일시적이고 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애기를 갖는다는 것, 매우 기쁜 일이죠. 우리 교회에 애기를 기다리다가 갖게 되는 경우 아주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얼마나 갑니까? 밤잠 못자고 짜증나서 어떤 때는 아기도 집어 던지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연애시절 너무 좋죠. 결혼하면 허니문 기간이 얼마나 가나요? 여기 와서 고생하며 학위를 땁니다. 학위를 따면 기쁘죠. 그러나 얼마 안 갑니다. 새로운 차, 새로운 집, 잠깐 지나면 또 다른 집, 또 다른 차가 나옵니다. 진급했다, 샐러리 올랐다 기쁩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갑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이 어떤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어떤 부분적인 것이 아니고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흘 만에 죽은 후에 갑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때 반가움도 있었지만 서운함도 있었습니다. 주님 왜 이제 오셨습니까?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사흘은 혹시 모르지만 나흘은 너무 늦었습니다. 왜 더 일찍 오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섭섭함이 있었습니다. 그가 앞으로 부활할 것은 알지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시면서 ‘나는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기독교의 핵심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무엇을 믿는가가 확실한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지 분명해야지 막연하게 교회 왔다갔다하면 되리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백 속에서 I’m sure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내가 이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할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는 이 몸을 떠날 때 죽음 저편에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저는 이 확신을 의외로 갖고 있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뭔가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교회에 대한 배경도 많이 있는데,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내가 죄사함 받았는지, 내가 죽으면 천국갈 수 있는지, 주님이 오늘 오시면 들림받을 수 있는지 불확실한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교회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저부터가 그랬었습니다. 저는 원래 교회 다니는 집안이 아니고 다양한 신을 섬기는 집에서 자랐습니다. 제사가 다달이 있었고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굿하고 복 나간다고 못하는 일도 많은 그런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제사 안 지내면 집에 액운이 있다고 두려워하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뭔가 그곳에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진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제가 보니 교회 나가시는 분들이 뭔가 다른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교회에 나갔습니다. 교회에 나가자마자 교회 생활에 충실히 했습니다. 교사생활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교회 행사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제 일주일 생활이 교회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새벽기도 한번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를 만나서 ‘학생, 지금 예수님 오시면 들림 받을 수 있어요’ 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매우 불쾌했습니다. ‘물론이지요’ 그러나 돌아서 오는 마음에 뭔가 의문과 두려움이 있었어요. 왜 이런 두려움이 있는가? 왜 아직까지 흔들림이 있는가? 신비한 체험도 있었고 경험도 많았는데 왜 이런가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처럼 표현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런 혼란 속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이 그런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시기 바라고 주위에 이런 분들이 많이 있을텐데 이런 분들을 여러분들이 도와 주실 수 있는 지식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받은 것 같은데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구절을 인용했는데, ‘나는 부활이다’ ‘죽어도 산다는 것’ 이것은 육체적인 죽음의 문제에 해답을 주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가 죽습니다. 그런 육체가 부활함을 얻게 됩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 것입니다. 썩지 않을 육신을 갖고 다시 살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질문합니다. 이것을 믿는다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에 대한 확신을 성경적으로 갖게 되길 바랍니다.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겠습니다. 거듭남, born again, 다시 태어난다, 중생, 회심 이런 단어들이 사용됩니다.


정의를 내려본다면 구원이란 죄인이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전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걸어가다가 삶을 살아가다가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런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것이 죄의 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십자가가 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의 삯인 사망을 대신 지불해주시고 죄값을 지불했다는 증거로 못자국과 창자국을 가지고 부활하셔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확증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비우셨습니다. 육체를 가지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에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주셨습니다. 그분을 그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회개와 함께 하나님을 벗어간 길을 걸어가던 피조물이, 양처럼 그릇되어 가던 자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사건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과 Personal and wholesome relationship을 갖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한 마디로 줄인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처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더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가 되었다, 구원받은 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사랑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인간적인 선행이나 지식이나 종교적인 행위나 의식이 아니에요. 그것을 다 내려놓고 십자가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고 하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할 때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번째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나옵니다. 죄사함을 받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받을 것이 아니며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을 보면 우리는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고 내가 볼 때는 의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완전히 의롭게 된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7절 “진실로 내 말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도 의미하지만 지금 내가 하나님의 생명과 교제하는 생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personal relationship을 갖는다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교제하는 삶이 영생이고 그것을 영원히 갖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를 보면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었고 누구든지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네번째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지으시고 인격을 주실 때 지정의를 주셨습니다. 지는 진리를 추구하고 정은 미를 추구하는 부분입니다. 의는 의지의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 하나님의 숨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는 순간 산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순간 그들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사탄과 인간과 대립하는 순간이 있죠. 인간에게 와서 말합니다.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만은 먹지 말아라, 이것은 사랑의 약속입니다. 먹는 순간 죽을 것이다. 그날 죽는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900년 동안 살았죠. 그러면 이때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살았다는 것, 죽었다는 것은 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한 것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조직적, 구조적 죄만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 그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죄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 자체입니다.


그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영접한다고 할 때는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영으로 들어오십니다. 성령으로 들어오십니다. 이것은 마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듯이 바람이 어디에서 어디로 부는지 모르는 것같이 거듭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성령이 내속에 들어와서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령의 세례 baptism of holy spirit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요, 성경적으로 제가 볼 때는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신비하게도 하나님의 몸의 일부가 되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기적이에요. 어떤 사람은 드라마틱한 느낌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냉정한 가운데 의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내가 신앙하는 순간 내 안에 들어오시고 그 때부터 영원히 내 안에 계시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인격체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내 안에 들어오시고 성령이 얼마나 나를 지배하느냐를 볼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7, 고린도전서 3장 16절 이런 구절을 통해서 이미 나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예배당의 빌딩이 거룩한 성전이 아니에요. 성전은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순간 내 몸은 성전이 되는 거에요.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죄사함을 얻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령이 거하십니다.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새로운 피조물로 보시는 거에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나는 새것이 되었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 가졌던 개성, 지성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보아주시고 그렇게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못 볼 때 혼동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하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네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의 외적 증거, 성령의 내적 증거, 성도들의 외적 내적 증거, 성별된 삶의 외적 내적 증거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성경말씀이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하고, 구원을 받은 자는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말씀인데. ‘너희가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것을 모른다면 너희는 버리운 자니라’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 저는 그 말씀에 망치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솔직하게 나는 ‘모른다’고 생각하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 25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썪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다’


요한일서 5장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들에게 … 영생을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지금 내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말씀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는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얻었나 깨달았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영생을 갖고 있나, 중생했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성령의 내적 증거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16절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거하시고 그 성령이 증거해주십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6장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요한일서 3장 24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렇게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이분이 우리에게 주관적인 증거, 개인적인 내적인 주관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도들의 내적 외적 증거입니다. 크리스챤의 삶이 기쁨의 삶이에요. 즐겁고 좋은 날씨에만 기쁜 것이 아니라 먹구름 아래서도 기뻐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성도들 간의 교제가 즐거워집니다.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해 내가 달라집니다. 진정 구원을 받으면 성령을 통한 교제가 이루어져서 그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34, 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런 성도간의 교제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 요한일서 4장를 보십시요.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은 나와는 다르지만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변화를 점점 느끼는 것입니다. 주관적 객관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네번째가 성별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성별된 삶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전에는 행동이 아주 쉬웠어요. 이제는 내가 뱉은 말, 행동 이런 것들 지나치지 않을까 조심해야지 하면서 변화되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변화가 구체적으로 조금씩 생긴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옛 성깔 ‘내가 왜 이래’하는 것이 아직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이 지체가 아직 나를 괴롭혀요. 나의 자아가 점점 주님을 닮아가면서 작아져가는 거에요. 그러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지체가 변화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아직 변화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면 이것을 계속해서 벗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 이하에 그 의미가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거짓말을 그만 두는 것뿐 아니라 진실된 말을 하는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분을 낼 수가 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풀어야 합니다. 모르고 있는 것조차도 서로 고백해야 합니다. 화해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구체적인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삶을 다스릴 때 이런 변화가 하나 둘씩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에게는 용서와 화해가 아주 중요합니다. 도둑이 도둑질을 멈춘다고 도둑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행동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삶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런 행동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는 이런 변화가 조금씩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번째 특별한 경험을 추구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이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구원받는 것이 뭔가 특별한 경험이 있어야하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파에서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데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디모데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언제 구원을 받았는지는 모를 수 있지만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있다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분명히 경험, 기적이 구원의 증거가 아니고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의 증거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서서히 깨달아 가는 수가 있습니다.


앞에 기차가 가는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뒤에 따라오는 기차는 믿음입니다. 앞에 나아가는 팩트를 믿을 때 감정이 따라갑니다. 사실, 믿음, 그리고 감정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앞세울 때 뭔가 된 거 같다가도 또 생각이 바뀌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 인격적인 삶의 현장에 왔을 때는 불확실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세요. 말씀을 바탕으로 이지적으로 복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증거하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방황 속에서 교회를 떠나서 세상에서 찾다가 마지막으로 조이 선교회에 영어를 배우러 나갔습니다. 영어를 배우면서 사람들이 뭔가 다른 것을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시도해보겠다 하고 마지막으로 수양회에 따라 갔습니다.


들어가면서 나는 절대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이렇게 결심하고 들어갔습니다. 이때 저는 자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마지막이다 하고 따라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평화를 되찾는 모습을 보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메시지를 들으면서 저를 많이 되돌아보겠습니다. 허물에 사함을 받고 정죄함을 받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에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저는 아니다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날 왜 죄인인 줄 알았습니다. 1970년 1월 예수님을 거듭하면서 저는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때는 사실 저는 울지도 않았습니다. 영접하고 나서 내 인생이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 나를 얼마나 학대했는지 몰라요. 공손하게 종교인으로 살고 있었지만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이 너무 싫었어요. 공부해서 뭐하겠는가. 가와나리 야스나리 설국이라는 책을 쓴 작가, 자살했어요. 일주년 추도식에 그 소설을 읽던 한 학생 또 자살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도 자살하고 정치인도 자살했습니다. 자살을 각오했을 때 굉장히 비판적이고 냉정하게 있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주님이 알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는 것 그것을 모르고 아직도 뭔가를 더 보탤려고 하고 있는 것이 그날 처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불신 자체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까지 그저 도덕적인 삶, 윤리적인 삶 추구하고 회개하고 다시 실패하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험은 개인적입니다. 경험 위에다 신앙을 쌓으려고 하면 경험이 바뀌어질 때마다 교리가 바뀌게 됩니다. 말씀을 우선시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경험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 자체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본 천국, 이 책이 잘못된 성경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경험은 점진적입니다. 기는 애가 있고 뛰는 애가 있는데요, 기는 애가 뛰지 못한다고 실패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경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이 그것으로 증거가 된다는 것은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극동방송 상담실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5시간 상담하는데 4시간 동안 저에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리고 나서 잠깐 제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 그러시더니 주체를 못하고 우시는 겁니다. 제가 주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비로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접할 때 깊은 감동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조용한 가운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깨달음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그 불신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길이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고 사람을 죽인 자도 살인입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간음자이고, 실제로 간음한자도 간음자에요.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지 율법으로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내가 누구인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죄를 깨달을 때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불신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믿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죄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은 구원 후에 올 수 있습니다. 일단 사랑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 점점 그 사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다 알지 못합니다. 커가면서 알게 되지요. 나중에 부모가 되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구원받고 나서 이 사랑이 너무 감격하고 고마운 거에요. 성화라는 것은 죄를 더 깨닫고 죄를 더 미워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깊이 깨닫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십자가를 깊이 깨닫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자신의 믿음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구원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때 큰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어떤 믿음을 가져야하는가. 구원받을 때 큰 믿음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열 가지 재앙 중에 마지막 재앙이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이죠. 어떤 사람은 문설주에 피를 아주 많이 발랐습니다. 다른 사람은 적당히 발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많이 눈에 확 띄게 발랐습니다. 믿음의 사이즈가 한 사람은 좀더 크고 다른 사람은 작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크기가 구원에 영향을 주었나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어린 양의 피를 의지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믿는 믿음이면 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산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우리가 믿는 믿음은 어쩌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믿음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의 보혈을 의지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피를 의지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네번째 자신이 내린 결정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살펴볼 때 결심이 작심삼일이었고 또 지나니까 그냥 그렇고 그래서 구원에 확신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결심은 우리를 상대로 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날 때 하나님과 함께 내리는 결정입니다. 내가 의지했던 분은 하나님입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죄를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에 믿음을 두는 한 나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의지함으로 나는 구원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구원받은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만일 죄를 범하면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불순종할 수 있으나 구원이 취소되고 아들 딸 된 것이 취소되느냐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패한 죄로 정직하게 고민하는 것, 죄 때문에 갈등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서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앞에 설 수 있는 그 사랑이 너무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들딸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제가 막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거듭나지 못하는 경우에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정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 신분 자체를 변화가 없는 것이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그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원에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비추어 내가 거듭났다면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경 두 곳을 찾아보고 마무리 짓겠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10장 17절, 주님께서 나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셨고 영원히 기억지도 아니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 29절,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요 또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다.’


주님이 이 손을 잡았습니다. 주님이 잡았고 여러분이 주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로마식 인사였습니다. 가끔 여러분은 이 손을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손을 영원히 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놓을 수가 있어요, 확신을 잃어버릴 수가 있어요. 그러면 다시 잡으면 됩니다.


이것까지도 십자가로 용서해주심을 감사하고 다시 잡으면 됩니다. 신앙이 자라면서 이 횟수가 줄어들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이 멈출 때가 있겠죠. 이 몸을 벗어날 때입니다. 영원히 보장된 구원이에요. 힘있게 잡는 것입니다.


내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