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세미나는 김원기 목사가 KOSTA/USA 2002에서 복음 입문을 강의한 내용을 녹취한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도 살펴보고 개인적으로 복음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내 삶에 어떤 작용을 했는가 간증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Gospel이 헬라어에서 나왔는데,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소식이 나에게 어떤 상관이 있는가? What does Gospel mean to me? 아무리 좋은 사상, 이론이라고 해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복음은 십자가의 도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The message of Cross입니다. 1세기에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요즘 우리에게는 electric chair라고 할 수 있어요. 사형 집행 도구입니다. 아주 극악한 범죄를 한 사람, 특히 국가에 위협을 가져왔던 사람들에게 다시는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공포심을 일으키는 사형입니다.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죽기까지 사흘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저렇게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데, 그리고 부활을 했다는데, 교회에서 그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 message of cross 그것이 인류의 혁명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의 영향이 인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게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어요. 어떤 종교가 시작되었는데, 그 교주가 법을 어겨서 전기 의자에서 죽었습니다. 혹은 가스실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범죄자가 죽었는데 거기에 어떤 파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같이 다니던 사람이 그 메시지를 막 전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세상에 존경할 사람이 없어서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존경해야 하느냐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교주가 죽었는데, electric chair에서 죽었는데, 그것을 찬양하고 electric chair를 그려놓고 그것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보면 십자가에 대한 메시지 때문에 사람들이 두 가지 부류로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한쪽에서는 그것처럼 미련한 것이 없다 이렇게 말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에 대한 메시지를 들을 때 한쪽은 그런 미련한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관 중에 하나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의지가 없으니, 의지가 약하고 자기 혼자 인생을 개척하기 힘든 사람이 무언가 의지하고 싶으니까 교회에 다니면서 신을 의지한다 이런 것이죠. 들어가서 보면 별게 없다는 거에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부활했다, 그리고 창조했다 뭐 이런 것이고요. 교양도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들은 인생을 왜 그렇게 사느냐. 종교는 마약이다, 무식한 사람들이 먹고 한번 마약에 중독되면 계속 먹어야 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 대한 영향력을 체험한 사람들, 복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십자가 사건에 수제자인 베드로도 새벽이 오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다음에 사도행전 처음에 나오는 베드로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있습니다. 다시는 예수에 대해서 말하면 십자가에 대해서 전하면 너를 죽이겠다는 협박 앞에서 그는 나는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배신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가 죽었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순교하는 사람으로 변했냐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종교는 교리가 아니고, 이론이 아니고, 신학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선하게 살면 갈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하면 갈 수 있지 않으냐, 고행을 하면 갈 수 있지 않느냐, 내가 나를 벗어나면 갈 수 있지 않느냐 이렇게 접근을 합니다.


전기에 대한 비유를 들어보면 전기 이론을 공부한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전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기등을 설명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론은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이 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들어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제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어떤 사람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전기가 뭔지 몰라요. 설명을 합니다. 전기라는 것이 있는데, 전구를 끼고 스위치를 켜면 불이 들어온다고 말하면 수긍을 안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이 power of God 그런 것이죠.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사실 그렇죠. 가장 쉽게 말씀 드리면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의 그룹을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율법주의자였어요. 율법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이라는 사람 밑에서 공부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살다 보니 갑자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말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인 거 전혀 쓸모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런 알아 들을 수 이야기나 하니까 뭐 모르는 사람들, 여자들, 어린이들 따라 다니는 겁니다. 사울이 보기에 이것은 사회를 좋지 않는 쪽으로 끌고 가는 독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심하게 박해했죠. 교회를 없애는 것에 헌신하니까 다메섹이라고 하는 도시에 가서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올라가다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그 신앙을 자신이 소유하면서 자기가 핍박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갖고 추종자가 되니까 그 사람의 친구들이 얼마나 눈꼴 사납겠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야기 할 수 있고 제가 잠깐 소개는 하겠지만, 복음의 핵심은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탄생할 때도 천사들이 전한 메시지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말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데,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데, 그것을 만졌고 느꼈고 체험했고 그것을 증거할 수 있다.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체험했습니다. 복음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personality입니다. 그분하고 내가 만나는 거에요, 그 만남을 통해서 reality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1954년 제가 태어나기 전에는 김원기라고 하는 person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난 다음 죽기까지 김원기라는 인격이 존재합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는 제 인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거듭난다라는 말을 써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질문 했는데,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문이 막히는 거에요, 거듭나다니, 당시에 공부를 많이 한 니고데모라는 분인데, 이해하기 힘든 거에요.


나1976년 8월 13일, 저는 기억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전의 김원기는 옛사람입니다. 이후의 김원기는 그전의 내가 아니에요. 내가 태어나자 마자 울자마자 처음 본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이었겠죠. 인격을 가진 어머니를 만났어요. 제가 거듭난 후에는 인격을 가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 있어요? 어머니가 없으면 제가 없겠죠. 그런데 제가 거듭났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믿지 못해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을 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셨죠. 성령이 하시는 일도 그렇다. 성령이 지나고 나면 성령의 바람이 분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네가 어떻게 그것을 믿냐, 하나님을 보았냐, 그러나 세상에서 보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와요.


목사들은 말만 하면 하나님 만났다고 하더라. 그것이 사실이냐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알고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압니다. 마치 그렇게 비겁했던 제자들이 목숨 걸고 순교했던 것처럼,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건 아니건 something happened 이건 인정할 수 있겠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기쁜 소식이냐? 복음이라고 하느냐? 그전에는 나쁜 소식이 있었다는 거지요. 우리는 범죄했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나누는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다리가 없습니다.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거리입니다. 골짜기가 우리의 죄악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아서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배드뉴스라는 것입니다.


굿뉴스는 뭐냐. 내가 범죄 했고 그 범죄의 대가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죽고 난 후에 영원한 멸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값입니다. 내가 살인을 하는데 한명을 죽였던 열명을 죽였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니님이 보실 때 나를 구원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구원하려면 나를 대신해서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 생명을 바칠 사람이 의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의인이 있으면 대신 죽어줄 수 있는데 그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 누군가 속죄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을 찾아보아도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죄짓지 않은 사람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되어 있던 식민지 총독도 그랬습니다. 왜 너희들이 이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중에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구속하시고 나를 속량하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redeem,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신문, 잡지 이런 거 보면 쿠폰이 있죠. 갖고 상품 살 수 있습니다. redeem한다고 하죠? 그거 가져가면 돈 깎아줍니다. 그걸 할 때 redeem,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죽으시고 우리들에게 쿠폰을 준 것입니다. 그 쿠폰에 영생, 죄사함 이렇게 써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시고 나에게 그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예수님이 주신 영생을 하나님께 드리면 redemption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구원 salvation, 영생 eternal life, 죄사함 forgiveness of sin이 거기에 담겨있는 것이고, 기독교에서 가장 어리석은 소리, 그러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쿠폰을 받으면 효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쿠폰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속량해주마, 구원을 주마, 죄사함을 주마 이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펄쩍 뛰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려면 순서대로 해야지, 착한 사람에게 먼저 영생을 주고 상을 많이 줘야지,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벌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죠. 기독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저꼴이 아니냐고 그렇게 비난을 합니다. 조금 지각이 있는 사람이 교회를 보면 비난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너무 당연해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면 당연합니다.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고 복 받는다 이렇게 가르쳐야지 이렇게 말하는 거지요. 쿠폰을 바꾸는 과정을 믿는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뭘 믿는다는 거에요? 나는 쿠폰에 적혀있는 대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애들을 갖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애들 키우면서 보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아요. 여기 있는 형제는 아주 못됐다고 합시다 근데 제 아들이에요, 그리고 옆에 있는 자매님은 아주 착하다고 합니다. 비하면 30배는 더 착해요. 그런데 둘다 문제를 저질렀어요. 누구에게 더 관대할 것 같아요. 제 아들에게 입니다. 자식하고 사이가 좀 안 좋잖아요? 누가 더 잘 것 같습니까? 아버지가 더 잘못 잡니다. 자식을 야단친 게 더 속상합니다. 너희들이 잘 살아서 오면 내가 주는 게 아니고 너는 내 자식이기 때문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는 순간 뭔가 신비로운 것이 발생합니다. 이론이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체험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하나 더 봅시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람들이 말하는 말 중에 어디를 가든 꼭대기만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똑 같은 산을 오른다는 가정이 있지요. 만약 다른 산을 오르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정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복음이 유일한 길이냐 이런 논쟁을 할 수 있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체험한 것을 증거할 때는 내가 아는 것을 말할 수 있겠죠. 다른 종교에는 그 종교가 추구하는 결론에 다다를 수는 있겠죠. 그런데 제가 아는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지는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굉장히 중요한 바울의 고백 이에요.


저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외가는 불교를 열심히 믿었고 아버지는 무신론자셨어요. 내가 중학교 시험을 칠 때, 당시 불교에서 제일 유명한 성철스님이란 분을 찾아가서 절을 3만번도 하시고 그랬어요. 나이가 들면서 종교 생활이 없어졌죠. 중학교 2학년 중간에 여러 가지 이유로,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인생의 밑바닥에 빠져버렸습니다. 마치 열차가 고속도로 달리다가 부딪혀서 산산조각 난 것처럼, 그런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어요. 아마 그 당시에 갑자기 우울증이 심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냥 삶이 무너져버렸어요. 빛 가운데 있다가 아주 삭막한 어둠 속에 들어간 것처럼.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심각하게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는 학교 생활 잘 했었지만, 완전히 그만 두었고, 술독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학교에는 형식적으로 가고 학교 끝나면 곧장 술집으로 가는 게 삶이었습니다. 술 마시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더 심해지니까, 점점 방황이 심해지는 것이지요. 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삶이 깊은 염세주의로 빠져들게 되었어요. 사춘기의 방황보다 훨씬 심하게. 내가 누구냐, 나는 어디서 왔나,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런 문제죠. 일반적인 사춘기에 하는 고민이 아니라 완전히 염세주의에 빠져서 술 마시고 약도 손을 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왔는데요. 그때 미국은 한참 반전운동이 많고 히피가 많았는데, 제가 그냥 자연스럽게 히피가 되 버렸어요. 히피가 생각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고민과 아주 비슷했거든요. 히피라는 게 전쟁 이후에 배부르다 보니까 나온 갈등들이었지요. 부유하게 살던 젊은이들이 정신적인 방황을 하는 거지요. 세월이 갈수록 방황이 더 커지는 거지요. 마약을 하면서. 아무리 생각을 할수록 대답이 안됩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책도 그런 것만 보고 결국 세월이 갈수록 나는 자살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언제 하느냐 이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대학교 3,4년 때 그렇게 생각했죠. 어느 날인가 나는 자살하고 죽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보다 1년 먼저 신앙생활을 하던 동생이 나에게 찾아와서 전도를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내 삶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는데, 이번에 내가 부서지는데 이때는 좋은 부서짐이었어요. 나를 뒤집어 싸고 있었던 껍질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염세주의에 빠져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것은 좋은 부서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빛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었어요. 조그만 성경 공부 시간이었는데, 성경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설교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도 안 나요. 다만 어떤 예화였고 지금 생각하면 그 예화는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것인 것, 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느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제 마음 속에 아주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원기야 너를 위해서 내가 죽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너를 위해서다.’ 이런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 정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요 이런 마음이 들며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이때 한 5분 사이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한 8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문제가 해결되어버렸어요. 어둠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이 흐르는데 주체할 수가 없어요. 내가 얼마나 소중하면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내가 어디서 왔나, 어디로 가나,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 이제는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위해서 산다. 1976년 8월 13일 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러나 저는 알지요. 제 자신은 알 수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지요. 주위에 보는 사람들이 다 내가 변했다고 하지요. 체험한 것이 뭐요 하면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요. 내 마음 속에 있지요.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요. 어떻게 아나요, 제 마음에 알지요.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요. 내가 목사이지만 교인들을 위해서 죽을 자신은 사실 없지요. 그러나 내 자식을 위해서 죽을 자신은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내 마음 속에 있지요.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느냐, 영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영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세요.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눈으로 봐야만 실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한 번도 바람을 보지 않지만 바람을 부인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영혼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를 붙잡고 바울을 붙잡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복음이 뭔가요. It’s the power of God.


내가 알기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기 위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내가 부모 밑에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었어요. 내 자식이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에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redemption coupon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라는 선물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정리해서 여러분들께 말씀드립니다. 나쁜 소식이 있었어요.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Eternal condemnation입니다. 좋은 소식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 생명이 멸망에서 생명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다음 질문은 Did you receive it? 생각 중에 있습니다. 아직은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사람은 영생이 있다, 아들이 없는 사람은 영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하나님을 만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령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감사합니다. 참석한 형제 자매들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접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찾아가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