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을 위한 헌신’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고 
무엇보다 한편 평화, 샬롬을 누리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 땅의 
어느 누구보다도 샬롬을 누리신 분인데 
그러나 한편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가장 슬퍼하셨던 
분인 것 같기도 해요. 슬픔과 평화는 
반대편에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예수님은 왜 슬퍼하셨나?
예수님의 슬픔을 성경에서 좀 본다면 특히 누가복음
19장 42절에 보면 예루살렘성을 보며 우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네가 평화에 이르는 길을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그것이 너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구나.’ 평화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 땅의 사람들을 보면서
슬퍼하신 거죠. 예수님은 하늘의 평화가 뭔지 아시고
누리시는 분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셨다는 것.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서
샬롬을 위해 헌신하신 분인데요.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은
함께 이 땅에 샬롬, 평화를 위해 헌신할 사람들을 필요로
하셨고 그래서 찾아오셨고 부르시기도 한 거죠, 제자들을.
근데, 제자들이 얼마만큼이나 이 샬롬을 위해서 잘
준비되었었는지 우리가 성경을 보더라도 제자들은
참 변화되지 못한 제자들이었음을 우린 성경에 있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많이 보게 되잖아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까지 대동해서 한 번 청원을
한 적이 있죠. ‘주님 나라에서 우리 두 사람, 우리
두 아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혀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 뭐라고 하셨냐하면
‘너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구하는지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렇게
물으셨어요. 그때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은 ‘예,
마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죠. 근데 그 잔은 원래
어떤 잔이죠? 고난, 죽음의 잔인데, 그 의미도 모르고
‘마실 수 있습니다’ 했죠.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래, 너희도 언젠가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나에게 구한 것,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예비되었든지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고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부탁하는 것이 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나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그렇게
세도를 부리고 위에 서려고 하지만 너희 중에는 정말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되겠고 대접을 받으려하는
자는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러 왔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근데 그 에피스드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청원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제자들이 어땠어요?
다 제자들이 분이 났다고 했어요. 그러고보면 그 제자들이
함께 동역자고 친구들이고 정말 가족이 되었었는데,
그 제자들 중에 헛된 야망과 꿈을 가진 제자들의 이야기가
결국 관계들을 갈라놓게 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샬롬을 이루고 샬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꿈을, 어떤 야망을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먼저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샬롬이 
무엇이냐 라는 샬롬의 의미에 대해서 
세미나를 할 때 샬롬은 다름아닌 
조화이고 관계의 회복이고 그리고 sharing이라고 
표현했었는데요. Empire builder와 Kingdom seeker를 한번 이제
어떻게 다른지 좀 생각해보고 싶어요.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사람이라면,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인데요. 여러분들은
Empire builder 입니까, Kingdom seeker 입니까? 어떻게 다를지
좀 생각해보고 싶어요.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는 사람인데, 자기 왕국을 세우는 사람은 스스로
통치하죠. 왜냐하면 나의 왕국이니까 내가 다스립니다.
하지만, Kingdom seeker는, 즉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또한 신뢰합니다.
그분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아는거죠. 스스로 통치하는
사람은 자기가 통치하지만, 언제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다스려지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한 거죠. 통치할 수 있지만, 통치 안 되는
영역이 있으니까. 그러나,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의 통치를
신뢰하기에,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영토가 분명해야할 필요가 있어서 울타리를
세우고 자기 편을 만듭니다. 왜냐하면 내 통치의 영역이
안정되고 확정될 필요가 있으니까, 분명할 필요가 있어서이지요.
그러나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갖고 있던 울타리도 걷고
그리고 자기 편 만들지 않죠. 자연히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참 다른데요. Empire builder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죠. 왜냐하면 내가 다스리니까. 그리고 사람들을
이용하게 됩니다. 나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을 묶어두려고 하죠. 왜냐하면
내 통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싫으니까요. 하지만,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을 따라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섬기려 하고 또 이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세우려 하고 사람들을 묶어두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풀어줍니다. 자연히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차이가 나타나는데Empire builder로 살아갈 때 관계
속에 긴장과 불신이 많이 생기죠. 왜냐하면 내가Empire
builder일 때 지금은 내 밑에 있고 나와 함께 있는 것
같지만 이 사람도Empire builder로 보이기에 언제 나를
치받고 올라올지 모른다는, 사람에 대한 불신과 긴장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러나,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관계 속에서도 긴장이 아니라
평화와 신뢰가 있습니다. Empire builder로 살아간다면
친구와 이웃은 늘어날까요, 줄어들까요?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경쟁자와 적은 늘어나게 되겠죠.
그러나, Kingdom seeker로 이렇게 살아간다면 오히려 친구와
이웃들이 늘어나게 되고 경쟁자와 적은 사라져가게
되는 거죠. Empire builder와 Kingdom seeker와 이렇게 다른데요,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주님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혀 달라고 할 때,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을 위해서
헌신했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
같았지만 스스로, 사실 그들 안에는Empire builder의 야심을
그대로 갖고 있었던 거죠.
 

근데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요? 목회자들이나 오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도Empire builder가 될 수 
있을까요? 예, 좀 안타깝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대단한 헌신을 
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하더라도, 내가 정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생각한다 하더라도 만약 나의
삶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이런 부분들이
있다면 내 마음이 뭔가 불안하고 내가 스스로 다 control해야
마음에 좀 안심이 생기고 그리고 자꾸 나의 분명한
울타리를 만들고 내 사람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자꾸 지배하려고 하고 그리고
이용하려고 하고 묶어두려고 하는 것이라면, 함께 있는
동역자의 관계 속에 자꾸 긴장과 불신이 생겨난다면,
자꾸 소중한 관계들이 경쟁자와 적이 되어간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단해보이는
사역을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Empire builder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사실 기독교도, 교회도 Empire 일 수
있다는 것을 교회 역사를 통해서도 보게 됩니다. 만약
기독교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다스리려고 할
때,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하고, 그리고, 울타리를
세우고 배타적으로 자기의 세력들을 결속시키려고
할 때, 기독교가 다른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배하고 이용하고 또 묶어두려고 할 때, 그리고 바깥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긴장과 불신들을 만들어낼 때,
사실은 기독교 세계도 Empire가 되고 마는거죠.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때 그 당시의 기독교는 사실은
Empire였지 하나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서 주변 민족들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그래서 어두운 역사를 남겨놓게 되었던 거죠. 사실
이 Empire builder냐, Kingdom seeker 냐는 우리의 작은 관계
속에서도 늘 이제 왔다갔다 하기가 참 쉬운 거잖아요?
우리 부부 관계에서도 사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만났지만,
서로 영역 다툼하기가 참 쉽고 사실은 지고 싶지 않은
것이고, 내가 주도하고 싶어하고, 그리고 나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할 때, 우리는Kingdom seeker가 되기보다는Empire
builder가 되서 결국은 샬롬이 아니라 갈등과 분쟁을
만들어내기 쉽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렇게 좀 생각해봤는데요.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가 굉장히 많이 공격과 모욕을 당하고
있잖아요. 개독교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데, 근데 도대체
이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좀 생각해보면 저는 이렇게도
표현하고 싶어요. 안타깝게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요. 어떤
의미냐 하면 저도 기독교 가정에서 이제 몇 대째 자랐는데요.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그리고 교회에서
때로는 목사님이 오셔서 심방을 해서 축복해주시고
기도해주시잖아요? 또 교회 장로님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부모님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잖아요. 제일 많이 들었던 기도가 어떤
기도냐 하면 ‘하나님, 이 아이가, 우리 다음 세대가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해주시고, 꾸는 자가
되지 않고 꾸워주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 들어보셨어요? 그 기도를 하나님이 그래도 들어주신
거 같애요.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대통령도 되고 사실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어느 영역을 가든지
위로 가면 갈수록 크리스챤 비율이 높잖아요. 크리스챤들이
리더가 된 영역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들
안에 정말 섬기려는 마음,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려는
마음, 으뜸이 되기보다는 종이 되려는 마음이 너무나
배우지 못했고 없었기에 단지 위에만 섰을 뿐 결국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아서 결국은 바깥으로부터 멸시와 모욕을 받게
된 것 아닐까요? 만약 우리의 윗 세대의 신앙의 부모들이
이렇게 기도했더라면 어떨까요? ‘하나님, 우리 아이가
머리가 아니라 꼬리가 되어도 좋으니 정말 섬길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가
이 세상에서 대접받는 아이가 아니라 정말 대접할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이
정말 이 땅에서 우뚝 서는 아이들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섬길 줄 아는 아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들이
드려졌다면 오늘 한국 기독교는 정말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전히 오늘도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처럼 동일한 기도들이 계속
올려지고 있는 것 같애요.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너희가 정말 무엇을 구해야 하는 줄 알지 못하는구나.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하겠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대접하는 자가 되라’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정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 길을 잘 보여주셨잖아요.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단 한번도 땅에 있는 어떤 영광을 얻으려고
하신 적이 없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오직 Kingdom
seeker로만 사셨는데, 그 Kingdom seeker로 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고 기다려주신 거죠. 그런데, 우리가 알 듯이 제자들도
나중에 변했잖아요. 그렇게 엉뚱한 야망을 가졌던 제자들도
나중에는 다 달라졌습니다. Kingdom seeker가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도 부르고 계시는데, 우리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되기를, 우리의 
나라, 나의 empire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하실 때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하시죠.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너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있지 않냐고. 하늘 아버지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신다’라고요. 그러니, 너희는 그런 것들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셨죠.
그러면서 그때 예로 드신 것이 너희가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그리고,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 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시고 입히시지 않냐고.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정말 한번 그렇게 생각해보죠. 공중에 나는
새가 하나님께서 먹이시나요,  스스로 먹이를 찾아서
사나요? 그리고, 들에 핀 백합화. 스스로 그렇게 이제
피어나는 건가, 하나님께서 다 입혀줘서 그렇게 아름답게
된 건가요? 우선 새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떤 관점에서
보면 새가 열심히 먹이도 찾아서 먹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먹이시는 게 아니라. 그래서 심지어
early bird라는 말도 있잖아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 그러니까, 경쟁, 땀흘리고 노력해야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서 보다 근면해질 것을 말하기
위해서 생겨난 속담이죠. 그런데, 실제로 새들 중에
더 먹이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알듯이 새들은 우리가 갖지 않은 눈과 날개를
갖고 있는데,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먹이를 참
잘도 찾아요. 그리고,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잘 가는
거죠. 근데, 그것이 노력일까, 선물일까 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갓난아기들이 태어나서 엄마 젖을 쪽쪽 빠는
것은 노력일까요, 본능인가요? 빨라고 해서 빠나요,
저절로 빨게 되나요? 저절로 빨게 되는 것이죠. 그거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그거는 노력도 아니고 땀도
아니라구요. 저절로 하게 된 것.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니까,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거고
기르신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너무 스트레스받고
살지 말라는 면에서 어떤 사람이 재밌는 도전을 했어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는 말에 대해서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먼저 잡아먹힌다’. 똑같은
논리겠죠. 만약에 정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 거라면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먼저 잡아먹히니까.
자연의 세계는 스스로 땀흘리고 노력하고 노력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늘이 주신 그 선물, 은사, 본능을
따라서 그 축복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도
그 자그만한 씨앗에서 실같은 뿌리가 내려오는데, 참
멀리도 잘가요. 물도 잘 찾아가잖아요. 그것을 어떤
눈으로 보면 노력인 것 같지만, 그러지 않는 씨앗들이
있는게 아니잖아요. 안에 생명만 충분히 있으면 다
찾아가요. 그냥 그러면서 하늘이 주신 선물을 따라
꽃을 피워내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백합화를
말씀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입은 그 모든 영화도 이 들꽃 하나만 못하였다’ 하셨죠.
솔로몬의 영화와 들꽃의 영화. 어떤 게 더 영광스럽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솔로몬의 영광처럼 대단해보이는
게 없는 거 같은데, 왜 예수님은 솔로몬의 영광보다
이 들꽃의 영광이 더 크다고 하셨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곰곰히 묵상하면서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된 기회가 있었는데요,
가만히 보면 이 솔로몬과 들꽃을 비교해본다면, 솔로몬의
영광은 소유로 인한 영광이라면 들꽃의 영광은 존재의
영광입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우리에게 영광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솔로몬의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아니라 그에게 덧입혀진 것들이예요. 그가 가진 지혜와
지식, 그가 갖게 된 인기와 명예, 그가 가진 물질과
권력, 그것이 솔로몬을 영광스럽다 보는 거죠. 만약
솔로몬에게 그런 모든 게 없다면, 지혜와 지식도 없고,
인기도 없고, 권력도 부도 없다면 누가 솔로몬 영광스럽다고
말하겠어요? 우리가 말하는 솔로몬의 영광은 그가 가진
소유에 대한 영광이죠. 그러나, 들꽃은 덧입혀진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창조주가 자신에게 준 몸뚱아리 그
자체로 창조주의 아름다우신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거죠. 또 하나 차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달랐습니다. 솔로몬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멀리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까지 구경하러
올 정도로 부러움도 사기도 했죠. 그런데 솔로몬은
잘 몰랐던 거 같애요.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아들 르호보암이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의 지도자들이 찾아와서 간청을
하죠. ‘임금님, 선왕 솔로몬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 우리의 어깨에 얹어준 멍에와 짐이 너무나 무거워
이젠 더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짐을 좀 내려놓게
해주십시오.’ 솔로몬이 통치할 때 7년 동안의 성전
건축과 이어서 13년의 왕궁 건축을 하면서 백성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시켰던 거죠. 근데, 그때 그 말을 들었던
르호보암은 왕궁에 있는 신하들 중에 젊은 친구들의
조언을 따라서 강경책으로 나갔었죠. 그래서 더 강하게
나가니까 백성의 마음들이 떠나고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열 지파가 떼어서 나가면서 이스라엘이 두 쪽이 나고
말았습니다. 르호보암의 정치력의 부재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원인 제공은 누가 한 겁니까?
솔로몬이 한 거예요. 솔로몬이 왕궁에서 편한 잠을
잘 때, 백성들은 허리가 아파서 신음하고 있었고, 솔로몬이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만족하고 있을 때 백성들은
눈물 뿌리며 고통하고 있었다는 것. 솔로몬의 영광은
백성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담보로 얻은 영광이었죠.
하지만, 들꽃은 어느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잖아요?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뿐,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또 남기고 가는게 달랐어요.
솔로몬은 뭘 남기고 갔나요? 한편 솔로몬은 안정된
국가와 모든 부와 권력을 아들에게 다 고스란히 물려줬어요.
보통 솔로몬을 가장 부럽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요.
솔로몬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형통했던 사람이예요.
아버지 다윗은 역경도 많이 겪고 고난 많았잖아요.
사울 왕의 시기 때문에도 참 고생고생했지만, 왕위에
오른 다음에도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또 피난 생활했어야
됬고, 정말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는데,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안정된 국가를 물려줬거든요. 그래서 요람에서부터
정말 형통하게 시작했어요. 그리고, 왕위에 있는 동안에
외적의 침략을 받아본 적도 없고 안에서 내란이 있지도
않았어요. 죽을 때 아들에게 다 물려주고 갔어요. 그러니,
복지 사회의 구호라고 말할 수 있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형통했던 사람이 사실 솔로몬이죠. 근데, 솔로몬은
다 잘 물려준 것 같았는데, 사실 솔로몬이 뿌려놓고
간 어둠의 씨앗들이 있었어요. 그 하나는 앞서도 얘기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이 두 쪽으로 날 어둠의 씨앗을 남겨놓고
간 것이고, 또 하나 솔로몬이 왕위에 있을 때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품에 안게 되면서 우상 숭배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갔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이후에,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왕들은 거의
예외없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 거죠. 솔로몬은 어둠의
씨앗들을 가득 남겨놓고 갔습니다. 그게 솔로몬의 영광이예요.
하지만, 들꽃은 뭘 남겨놓고 갈까요? 자기 생명의 씨앗들을
남겨놓고 가겠죠. 그 씨앗들은 또 들꽃들이 되어서
창조주의 정원을 아름답게 할 것이구요. 솔로몬과 들꽃,
뭐가 더 영광스럽습니까? 네, 그러면 솔로몬 되고 싶으세요,
들꽃 되고 싶으세요? 주님은 솔로몬의 영광을 꿈꾸고
살아가고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우리, 그래서 보다
더 필요를 더 채우고 갖고 싶어하는, 그래서 무엇을
더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는 거죠. 너희가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결국 너희의 모든 관계들은 전쟁터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더 위에 서려고, 더 가지려고
아귀 다툼을 하다보면 모든 관계들은 깨지고 만다는
것. 너희에게는 너희를 사랑하시는 하늘 아빠 아버지가
계시지 않느냐고. 그 아빠 아버지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다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고. 그러니,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말씀하신거죠.
 

우리는 샬롬을 
위해서 정말 기도할 필요가 있는 거 같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진정 이 땅에 샬롬이 올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애요. 최근에 한국에도 소개된 다음에 몇
해 전 부터 꽤 인기가 있었던 기도가 있죠. 야베스의
기도. 근데 이 야베스의 기도는 어떤 거였죠? 내게 복에
복을 더하셔서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또 환란이 없어서
근심도 없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잖아요. 근데 그 기도가
아주 인기가 있게 되서 마치 심지어 부적처럼 어떤
사람들은 차에도 붙이고 집에도 붙여놓고, 또 많은
크리스챤 집회의 어떤 제목으로도 많이 등장하게 되었어요.
근데 저는 이 기도에 대해서 좀 아쉬운 마음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그
주기도문과 한번 이렇게 비교해보고 싶어요. 야베스는
복에 복을 더해달라 기도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일용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시잖아요. 야베스는 나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는데, 예수님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하고 있구요. 야베스는 어떤
환란도 근심도 없기를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유혹과
싸우고 악을 이기는 그런 거룩한 근심을 담은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것. 남미의 우루과이에 있는 어느 한
성당에 붙어있다는 주기도문에 대한 글을 제가 접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도전이 됐었어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들어보신 분들도 있을 거 같은데, 제가 한번
읽어드릴께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임하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평생 먹을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일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다른 사람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굉장한
도전이 되는 표현이죠. 저는 주님의 기도가 그렇게
어려운 기도인지 몰랐어요. 우리가 늘 외워서 하는
기도. 그 기도는 정말 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이 주님의
진정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드려져야될 기도인거죠.
야베스의 기도를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야베스의 기도가
사랑받기 보다 정말 주님의 기도가 사랑받게 되기를
바라고, 주님과 함께 이런 진정한 기도를 이 땅의 샬롬을
위해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이제 그렇게 헌신하는 마음을
좀 더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 고아와 같은
마음들을 갖고 있어서 자연히 경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애요. 하지만, 경쟁하는 것이 아주 익숙해져있고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버린 우리의 삶에 대해서
주님은 우리를 서로 사랑의 자리로 초청해주신 거잖아요.
근데, 그 경쟁을 competition이라는 단어로 우리 알고 있는데,
발음이 약간 비슷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그 마음은 compassion인데, 우리가compassion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어원을 보면 com 은 with
함께 한다는 뜻을 갖고 있고, passion은 suffering인데요.
suffer with 함께 고통받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compassion을 갖는다는 것은 로마서 12장 15절에
있는 말씀처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그런 정말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그런 마음으로 이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인데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마음이 바로compassion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compassion이죠. 그런데 우리가compassion을
갖고 살 때도 있죠. 그러나, 우리는 이 거대한 경쟁
사회 한복판을 살아가면서 이competition에 의해서 사실
움직여지고, 그렇게 끌려가고 결국 우리도 competition의
마음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기가 참 쉽다는 것.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현재 모든 세계는 치열한 경쟁 관계고, 국가와
국가 간에도, 민족과 민족 간에도, 그리고 한 민족 안에서도
이념 사이에, 그리고, 어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
그리고 더 작게는 교회 안에서조차도, 그리고 가정
안에서도 계속 competition이 있는 거잖아요. 심지어 아이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 관계에서도 얼마나 competition이
많이 있어요? 근데, 그런 competition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는 아들
딸이라는 생각이 있기 보다는 우리가 너무나 뭔가 갈증,
채워지지 않은 마치 고아와 같은 심정을 갖고 있어서
자꾸 더 갖고 싶어하고 이기고 싶어하고 경쟁하게 되는
거죠. 근데 우리가 한편 치열한 경쟁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르게 살아가야지만,
정말 하나님의 샬롬, 조화를 위해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도전,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은 어둠을 많이 갖고 있죠. 때로는
어떤 사람들은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표현하기까지
해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 자연의 세계를
우선 다시 한번 돌아보면 자연의 세계가 경쟁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일까 하면 정말 그렇지 않아요. 자연에
있는 모든 초목들이 경쟁자가 더 많아서 더 잘 자라는
걸까요? 그렇지 않잖아요. 혼자 벌판에 홀로 떨어진
씨앗도 잘 자라요. 경쟁자가 많든 적든, 상황이 좋든
나쁘든, 사실 초목들은 정말 자기 자신이 되는데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멋있게 자라나요. 그런데, 그것을 보면
그들을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나게 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이라구요. 그 생명력이
그들 자신이 되게 하는 것이지,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이 그들을 만들어 내는게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의
인생은, 경쟁 사회는 굉장히 비교 중심이잖아요. 모든
것을 비교해서 우리를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 보게 하는 것인데요. 근데 비교는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진정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자꾸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고 자꾸 평가하고 판단하고
또 판단받고 그래서 상처를 주고 받고, 그래서 가정
안에서도 얼마나 부조화를 만들어내는지. 아마 어려서
성장할 때, 가정에서 비교당하면서 자라신 분이 있다면
얼마나 그게 아픈 것인지 알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어려서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들과 비교당하면서 살았다면
얼마나 그게 싫은 것인지. 우린 비교당하고 싶지 않으거죠.
하나님은 어느 생명도, 우리 어느 누구도 비교하지
않으시는데, 모두가 존귀한데, 우리가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자꾸 비교되고 비교하면서 살아가며 관계들을
파괴해왔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은 참 결과 중심이라서 성과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다보니까 자꾸 성과, 결과에 목매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compassion은
정말 결과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데요. 우리 예수님의
삶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이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이런 가정을 해보죠. 오늘로
말하면 어느 언론의 인터뷰 기자가 예수님께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이 땅에서 사역하면서
얻은 결과가 뭐가 있냐고’. 그때 예수님께서 아마
보고하실 수 있는 결과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 나를
따랐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고, 나를 따르던 제자들도
다 떠나고 없다고. 그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줄
수 있는 결과는 제로, 0 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을 맞이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
하셨어요. 도대체 뭘 이루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루어낸 게 도대체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부르심, 그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내가 이 땅에서 걸어가야 될
걸음을 끝까지 성실하게 걸었다는 점에서 다 이룬거죠.
내가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결과가 있어서 이룬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나의 걸음에 신실했다는 점에서, 나의 마음의 동기와
그 과정을 변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 이룬거죠.
결과가 있어서 다 이룬 게 아니라는 것. 우리는 너무
결과에 의해서 평가하고 평가받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거죠.
 

저는 이제 그 선교사들을,
선교 단체도 보내고 교회도 파송하잖아요? 그러면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이제 후원을 받으면서 열심히 사역하는데,
근데 정기적으로 선교 보고를 해야되죠. 근데, 후원
교회에서는 어떤 보고를 받고 싶어할까요? 좋은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거죠. 그러니, 이제 대개 선교 보고를
써야 되는데, 결과가 없으면 선교사들은 불안해져요.
그래서 자연히 때로는 후원이 끊길까봐 과장 보고의
유혹을 받게 되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현지인 서로
끌어당기기 선교사들 사이에 경쟁도 생겨나게 되는거죠.
근데, 선교 본부나 파송 교회가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에게
결과 보고를 기대하지 말고 그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갈 때 그 순수한 초심, 그 마음의 동기가 혹 바뀌어지지
않도록, 그들이 선교지에 가서 혹시 잘못된 어떤 관계를
만들어서 empire builder가 혹 되지는 않도록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그들이 결과를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을 support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선교사들도 그런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정말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냥 내가 이 땅에서 걸어야 될 그 걸음에만 신실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은 어떤 선교사가 한 민족
가운데 가서 십 년 이십 년 동안 살다가 거기서 목숨을
잃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한 사람의
결신자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쩌면 그 사람의 죽음
이후에 거기 복음의 싹이 트고 나중에 교회가 세워질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있을 때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상하게 하고 우리의 관계들을
무너뜨리는 것인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 사회는
굉장히 성공 스토리를 보고 싶어 하잖아요? 성공 스토리가
언제나 무대의 중심에 오르죠. 그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도전도 받고 또 격려
받고, 동기 부여도 돼서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기도
하죠. 꿈을 갖게 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성공 스토리를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나는 사실 그렇게 될 수 없다’라는
사실 때문에 더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도 사실 있어요.
그런데, 교회들도 보면 교회의 간증 집회나 무대 위에
대개 성공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오르죠. 좋은
결과를 가진 사람들이죠. 물론 귀한 믿음과 헌신을
따라 살다가 결국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무대 위에 올라서 많은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도전도
하고 또 꿈도 주고 변화의 계기도 많이 만들어줍니다.
그렇지만, 역시 그 교회의 올라오는 성공 스토리들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또 낙심과 아픔을 가져다주기도
해요. 근데, 한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무대 위에 올릴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무대 위에 올리신
적이 있었나요? 예수님과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라는 자리 다툼이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누구를 세우셨냐면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셨어요. 너희도 이 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셨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이
위에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 뭔가 더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 제자들의 눈이 오히려 어린
아이에게 가고 또 그 당시에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이 오히려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가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 기억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