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의 의미’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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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이 가장 평화로왔던 때가 인생에서 언제일까 이렇게 질문을 해본다면 아마도 엄마 뱃속에 있었을 같애요. 안처럼 안전한 때가 없고, 그리고 안에서 있을 때처럼 만족스러운 때가 없을 테니깐요. 우리 인간이 가장 마음에 편안함을 얻을 때는 안전할 때고, 그리고 만족스러울 땐데, 안전과 만족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추구하는데, 샬롬이라는 것이 안전이나 만족과 얼마만큼 관련이 되는 것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가하면 한편 우리는 조화라는 단어를 알고 있는데요. 안전과 만족이라는 것과 샬롬이 가까운 것일까요? 조화와 가까운 것일까요? 샬롬은 정말 조화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안전과 만족을 추구하는 존재지, 조화를 추구하는 존재는 아닌 같애요. 그런데, 우리는 예외없이 안전과 만족을 추구하는데, 그런 안전과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거기서 분쟁이 생기게 되죠. 그러다보면 결국 우리의 관계 속에 문제가 생기고, 더이상 진정한 샬롬이라는 것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고 보면 샬롬이라는 것을 알고 누리기 위해서는 조화라는 것에 대해서 필요가 있을 같은데요. 우리 인간은
relational
존재죠. 관계를 통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우리 인생을 돌아보아도 우리 인생이 가장 행복할 때와 불행할 때를 생각해본다면 행복과 불행도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수가 있어요. 만약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가족 관계가 정말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정말 존중히 여기고 사랑이 충분히 나누어지고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때가 없는 거고, 반면에 우리의 소중한 가족 관계에 긴장이 있고 나눔도 없고 뭔가 벽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처럼 불행하게 느껴질 때가 없는 거죠. 인생의 행복은,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어떤 완벽한 안전장치를 갖고 있을 때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모든 필요를 내가 갖고 있을 평화로운 아니라, 오히려 관계에 있다는 . 설사 안전장치는 되어있지 않고, 필요한 것도 넉넉지 않아도 우리의 관계가 정말 사랑스러울 때는 우리는 거기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거죠. 그런 점에서 샬롬은 정말 관계에 있다는 것을 먼저 전제해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에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를 통한 샬롬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데, 샬롬은 다름아닌 관계 회복이고 깨어진 사이들이 다시 화해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있을 것입니다. 근데, 샬롬은 분명 누구나 원하는 것일 것입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인데, 사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진정한 샬롬이 뭔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샬롬은 결코 우리 개인의 어떤 안전이나 만족과 관련되지 않는다는 , 전적으로 우리의 관계에 달려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지킬 필요가 있는 같애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지만, 샬롬은 기도로도 이루어지는 같지 않습니다. 만약 기도로 이루어지는 거라면 이미 이루어졌을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도 기도하셨고, 우리도 정말 샬롬을 위해 기도하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샬롬은 기도를 통해 저절로 응답받는 것만은 아니라는 . 그리고 또한 선포하기도 하죠. 평화가 너희에게 임할지니라 주님 말씀하셨잖아요? 그리고 제자들을 전도 여행을 보내시면서도 너희가 어느 집에 거하든지 집에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포하고 제공하지만 그렇지만 거기에 평화나 샬롬이 이루어지지 않죠. 전제가 있습니다. 평화를 진정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일 때만 주어진다는 . 그것을 단지 선포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 샬롬은 기도나 선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샬롬이 무엇인지 알고 샬롬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마음들이 모아질 가운데서 조화가 경험되고 거기에 샬롬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실 , 바리새인들이 물었었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 거냐고, 언제 임하느냐고 물었을 ,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수도 없고 어디 있다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너희 안에 있다라는 것을 우리 마음 안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너희 안에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단어의 의미는
‘안
은’
“among you”
너희들 사이에 있다, 너희들 가운데 있다. 너희들이 땅에서 무언가 합심하여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너희들의 관계를 통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는 바로 너희들의 관계 속에 있다.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 23절에서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 하신 적이 있어요. 너희가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어떻게 하라 그랬죠? 예물 거기 두고 먼저 가서 사람과 화해한 다음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말씀을 오늘로 적용해본다면 너희가 예배드리러 나가다가 주일 교회에 출석하려다가 누군가와 관계가 깨어지고 원망들을 만한 사이가 되었으면 멈추고 돌아가서 사람과 화해한 다음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는 거죠. 그런데, 말씀 그대로 적용한다면 어쩌면 교회들마다 주일 출석율이 떨어질지 모르겠어요. 사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관계가 여전히 뭔가 문제가 있고 깨져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계속 나아가는 예배는 계속되는 거잖아요. 근데,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그렇게 도전하신 것일까? 거기에 주님의 진정한 뜻이 담겨있겠죠.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헌신이나 예배보다 어쩌면 우리의 관계를 원하신다는 .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보다 우리 서로간의 진정한 회복 관계를 원하신다는 .   
 
저는 공동체에 관심이 한국에 있을 때부터 있어서, 한번 한국에 있을 때도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도 많이 가봤었지만, 유럽에 있는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독일에 다름슈타트에 마리아 자매회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실레아 슈링크 라는 분에 의해 시작된 곳인데, 거기를 한번 방문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었어요. 그런데, 자매들이 공동생활을 오래하면서 기도해온 있었대요. 언제나 놓치지 않고 기도해온 것은
‘하
나님, 우리의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가 하는 일이 안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같이 농사도 짓고 거기는 출판도 하기 때문에 인쇄를 위한 윤전기도 돌아가는데, 어느 인쇄를 위한 윤전기가 돌아가다가 멈추면 우리 상식적으로 보통 사람같으면 기계를 손보거나 아니면 고칠 있는 기술자를 불러야죠. 그런데, 자매들은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하던 일손을 멈추고 각자 방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관계를 점검하는 거죠. 그러다 어떤 자매가 다른 자매에게 뭔가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것을 이제 알고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청하는 편지를 써서 상대방 자매의 방에 밀어넣고 자매도 자신이 용서를 청하는 편지를 이제 주고 받고 그렇게 화해가 이루어지면 멈춰있던 윤전기가 저절로 돌아가게 그런 기적을 많이 갖고 있더라고요.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자매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있을까 하는 반문도 해봤어요.
‘하
나님, 우리 가족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 가족이 하는 사업이고 뭐고 안되게 해주십시오.’
‘하
나님, 우리 교회의 형제 자매들 사이에 관계 문제가 있으면 교회가 하는 사역이고 뭐고 제대로 안되게 해주십시오.’ 사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우리의 우선순위가 많이 바뀌어버린 거죠. 우리는 우리의 관계보다 중요해져 버린게 생긴 아니겠습니까? 일이 중요하든지, 돈이 중요하든지,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어떤 다른 것들이 우선 순위가 되어버렸기에 우리는 관계들은 어렵고 망가져있어도 자꾸 뒤로 미루게 되는 거죠. 그런 우리가 그대로 살아간다면 땅에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샬롬이란 이루어지기가 요원할 것입니다
 
샬롬은 관계에 있다, 조화에 있다’전제할 , 샬롬을 우리가 가장 느낄 있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자연의 세계인데요. 종종 우리는 스트레스 받고 많이 지치고 피곤할 , 대개 훌쩍 자연에 가서 많이 쉬잖아요? 그리고, 자연에서 우리는 정말 특별한 위로와 쉼을 많이 얻게 됩니다
 
근데, 우리가 가는 자연도 어떤 자연이냐 하면 어떤 존재가 모든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자연이 아니예요. 우리가 가서 쉼을 누리는 자연은 여러 가지 생명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자연이고, 거기에 물이 넉넉하고 모두가 어떤 풍성한 초록빛을 나타내는 자연 거기서 쉼을 얻는 거지, 황량한 사막에서 얻는 것도 아니고 어떤 가지 짐승이나 식물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곳에서 평화를 누리는 아니라고요. 그러면 우리가 자연, 조화, 그리고 샬롬을 느낄 있는 자연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볼 , 자연이 어떤 상태이기에 우리가 거기서 샬롬,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인가 한번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먼저 우리 보통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를 한번 생각해보면, 탁월한 오케스트라 악단들이 이제 음악을 연주해낼 , 우리는 연주가 이루어지기 위한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있습니다. 우선 아무리 탁월한 연주자들이라 하더라도 만약 그들 가운데 지휘자도 없고 공동으로 주어진 악보가 없다면 과연 그들이 함께 아름다운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 있을까요? 불가능하다는 우리가 알아요. 그리고, 만약에 그들 모두가 나름대로 솜씨가 있더라도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쯤이야 하면서 군중 속에 숨으려고 하거나 나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고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경쟁한다면 함께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 있을까요? 그것도 사실 어렵다는 알거예요. 그리고, 하나 굉장히 거기서 중요한 것은 우선 어떤 주도권이 필요한 거죠. 내가 아닌 어떤 지휘자가 필요하다는 . 그리고 하나는 내가 나의 역할에 굉장히 충실해야한다는 . 다른 사람의 역할과 관계없이 나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 그리고 하나 굉장히 중요한 것은 연습할 때부터 필요한 태도인데요. 나는 연습이 됐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연습이 되지 않았으면 같이 기다려주면서 연습해야 되는 거죠. 서로를 인내하면서 견뎌주어야 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중에 이제 함께 아름다운 조화로운 오케스트라 음악을 연주해내게 됩니다. 근데 그것을 자연에다가 한번 생각해봅니다. 정말 자연이 그렇거든요? 우리가 알듯이 자연은 스스로 주도권을 갖고 있기보다 정말 창조주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있어요. 자신들의 계절을 자신들이 통제하지 않잖아요. 전적으로 창조주에게 의존되어 있어요. 창조주가 주신 계절, 창조주가 주신 , , 비를 맞으면서 움직여가는 것이지, 자기가 자기들의 삶을 스스로
control
하고 있지 않다는 . 그러면서 우리가 자연에서 있는 것은 어떤 존재도 서로 비교하지 않아요. 단지 자신됨에 충실할 뿐이지. 종종 우리가 땅에 떨어져서 자라는 나무들이나 풀들을 어떤 씨앗들은 운명적으로 나쁜 떨어졌어요. 예를 들어서 계곡, 절벽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나무들이나 정말 황량하고 건조한 땅에 홀로 자라게 나무들이나 풀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만약에 본다면 너무 환경이 좋아요. 근데 만약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런 상황을 다른 좋은 곳에 떨어져 있는 생명들과 비교한다면 얼마나 사실 서럽고 원망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자연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생명됨에 충실한 거죠. 군중 속에 숨지도 않고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정말 자기 자신이 되는 거죠. 그러면서도 하나, 자연에 있는 생명들을 보면 서로를 정말 견디는 것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아름다운 여러가지 씨앗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들판을 가보면 거기 어쩌면 씨앗들은 혼자만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자라고 싶겠죠. 그러나 예외없이 이런 저런 씨앗들을 옆에 와서 같이 자랍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사실은 불편하고 성가시고 그리고 어쩌면 없었으면 하는 마음들이 들겠죠. 우리 인간이라면. 그러나, 우리가 이제 집에 정원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잔디밭에 민들레가 자라고 토끼풀 자라는 보기 싫어서 자꾸 뽑거든요? 그건 사람 눈에 그런거지. 잔디밭도, 잔디들도 다른 존재가 오는게 환영하는 마음이 별로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조화로운 들판은 어떤 가지가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아니라,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이런 저런 손님들을 모두가 함께 결국은 견디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우리가 아름다운 거죠. 결코 독점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이런 저런 모든 존재들이 어우러져서 서로를 견디고 있는 아름답다는 . 그래서 자연에게서 우리가 있는 하나님의 샬롬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우리 인간의 관계 속에서도 비춰볼 있는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주도권을 정말 갖고자 하지 않을 , 오직 우리 인생의 주도권은 그분께 있음을 언제나 놓치지 않을 , 그리고 그분의 지휘에 민감하여 움직일 있을 ,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악보라고 말할 있는 말씀에 보다 신실할 있을 , 그리고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에게 맡겨진 나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있을 ,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들이 때로는 불편하고 나를 힘들게 수도 있지만 견디고 그걸 소중히 여겨줄 , 그때 우리가 함께 조화라는 것을 만들어 있는 것이겠죠. 우리가 개인적으로 속해 있는 가정이든, 믿음의 공동체든, 부분에서 약할 , 사실은 조화가 깨지고 결국은 샬롬은 사라지고 더이상 우리의 마음에 평화도 있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 사회만이 자연의 세계와 달리 부조화의 연속이라는 것을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 속에서도 동일하게 수가 있죠.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세계에는 어떤 질서와 조화가 있는데, 우리 인간 사회에는 그것이 사실 없습니다. 이유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도권을 놓쳤기 때문이겠죠. 근데 주도권과 관련해서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우선 주도권을 서로 잡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마치 고아들의 싸움터라고 말할 있을 거예요. 아버지없이, 부모없이, 어떤 누군가의 리더쉽없이 각자 그냥 고아가 되어버린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결국 아귀다툼이 일어날 밖에 없고, 거기서는 조화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 우리 충분히 상상해볼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 관계는 높고 낮음이 생겨났죠. 자연히 거기서 보다 경쟁력이 있고 힘있는 사람들은 위에 서게 되고, 상대적으로 약하고 결국 당하는 사람들은 이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원망과 분노들이 쌓여지게 되고 그리고 이제 자연히 그러다보니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를 만들고 어쩌면 이기기 위한 무기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근데 그렇게 해서 샬롬이 더이상 있지 않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 구약의 예언자였던 이사야가 환상으로 보게 샬롬에 대한 그림이 있어요.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면은 어떤 변화들이 있을까라는 그림인데, 강의안에도 있지만, 크게 가지 그림을 생각해볼 수가 있는데, 모든 높은 산들, 언덕들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서 이제 평평한 곳이 것이다. 그리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이리와 양이 함께 뒹굴고 그리고 사람들이 칼과 창을 부수어서 그것으로 보습과 낫을 만들고. 어떤 변화들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근데 변화들은 관계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요. 사실 변화는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알지 못하고 고아와 같은 심정으로 살아갈 , 우리의 인생 안에도 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높은 언덕과 산이 있는가 하면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어떤 수치의 골짜기들을 우리는 갖고 있다고 말할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분의 사랑의 통치를 알지 못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언제나 긴장하는 마음도 갖게 되고, 상처도 받지만, 주게 되고, 자연히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방어와 공격을 위한 무기들을, 칼과 창을 만드는 에너지를 쏟게 되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통치를 알고 나니까 이제 안에서도 그렇게 잘난 것이 사실 잘난 것도 아니고, 안에 수치스러운 것도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이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는 , 그래서 모두가,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이 그분의 은총 아래 평평해지게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도 사라져가게 되고, 상처를 받지도 않지만 주지도 않게 되고, 나아가서는 인생의 에너지를 이제는 방어와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살리는 사용하게 되는 그런 변화들을 그림으로 통해서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함께 아름다운 관계를,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 바로 샬롬이라고 말할 있을 것입니다.   
 
근데 샬롬을 우리가 세워나가는데 있어서 가지의 대조된, 성경에 나오는 건축을 통해서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성경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한번 찾아보시면 좋겠는데요. 에베소서
2

20
절부터
22
.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세워져 가는 것인지. 그런가하면 대조가 있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의 대조된 건축이 있는데요. 창세기
11

1
절부터
9
절에 나오는 바벨탑. 세상을 대표하는, 상징하고 있는 하나의 건축이라고 수가 있는데, 에베소서
2
장만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너
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어떤 건축되어져가는 그림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1
장에 있는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벨탑 사건인데요. 사람들이 어떤 아이디어가 생겼죠. 우리가 함께 성과 대를 높이 쌓아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그래서 그들은 아이디어가 좋아 보여서 시날이라는 평지를 선택하고 거기에다 성을 쌓기 시작했죠. 그런데, 성을 쌓다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셨기에 그들의 언어를 통하지 않게 하셨죠. 자연히 대화가 가능하지 않게 되고, 대화가 단절되니 협력도 불가능해진거죠. 자연히 성쌓기를 그치고 지면에 흩어져버린 이야기입니다. 나름대로 연합을 시도했지만, 나름대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하나되고자 하는 성공과 연합을 추구하는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지만, 오히려 결과는 분열로 끝나고 그런 건축입니다. 근데, 건축을 우리가 건축할 중요한 것이 보면 건축은 어떤 위에 것인가, 터가 굉장히 중요하고요, 그리고 누가 설계하며 누가 건축할 것인가, 설계자와 건축가가 누구인가가 굉장히 중요하겠죠. 건축하려고 하는지, 건축의 목표, 목적이 무엇이냐도 중요한 요소겠고요. 다음에 건축의 과정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것입니다. 근데, 가지 영역에서 개의 건축이 어떻게 대조가 되는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이 선택한 터는 시날 평지였죠. 근데 시날 평지는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곳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누가 설계하고 건축하고 있었냐면 이렇게 말했잖아요.
‘자,
우리가 성과 대를 높이 쌓아’. 그러면 누가 설계하고 건축한 거죠? 사람이 설계하고 건축합니다. 목적이 있었어요. 목표는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우리 이름을 낸다는 것은 스스로를 높이는 거죠. 근데, 건축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결국 대화가 단절되고 협력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결과로 결국은 분열되고 흩어져 버리고 만거죠. 근데, 지금 에베소서에서 읽은 성경구절을 보면 어떤 터를 소개하고 있죠?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 사도와 선지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이 전해진 것이죠. 구약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신약은 사도들을 통해서. 사도와 선지자의 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터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설계자와 건축가가 누구인가? 지금 함께 읽었었지만, 성경구절에 보면 너희는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다. 성전이 되어가고,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수동형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능동형의 표현이 하나도 없죠. 이야긴 뭘까요? 우리가 설계하고 건축하는 아니라, 우리는 그분의 주도권 아래서 지어져 이라는 . 설계자와 건축가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는 것입니다. 목표도 다르죠. 지금 읽었지만,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의 모임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기뻐 거하시는 그런 곳이 되기를 원해서 그들은 지어져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과정에서도 보면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그리고 함께 지어져 간다고 했죠. 건축의 가지 요소에서 아주 뚜렷하게 대조되고 있는 것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땅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추구한다고 , 샬롬은 어떻게 그러면 가능한 것일까? 한번 건축에 비추어서 점검해 있을 같애요. 우리의 가정이든, 우리의 교회든, 아니면 어떤 우리의 시도든간에, 우리의 인생이든 간에 우리의 터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터를 잘못 선택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터를 삼기 시작하면 우리의 기대는 사실 실패하기 쉽다는 .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주도권을 가져서는 결코 우리가 조화를 이루어낼 수가 없다는 . 그분의 control, 그분의 주도 아래 있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모임 안에 관계 속에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께서 기뻐 거하시는 곳이 되도록 우리는 부름받았다는 . 우리의 관계, 연결과 함께 지어져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 그것을 소흘히 여기지 않을 우리는 조화와 샬롬을 얻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이런 부분들을 소흘히 여기면 마치 바벨탑의 의도는 그럴 해보였지만 실패하고 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되고 싶지만 실패하고 분열될 밖에 없다는 것을 수가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아주 고대에 있었던 어떤 physical 건축으로 우리에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어쩌면 사건은 인류의 문명, 민족과 국가,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고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하나의 메세지를 담고 있게 돼요. 그리고, 분명 바벨탑은 고대의 건축이라기보다 여전히 오늘도 계속 건축되고 있는 거라는 . 오늘의 모든 민족과 국가, 모든 인간의 시도들이 사실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의도는 그럴 하지만 실패할 밖에 없다는 것을 어쩜 우리에게 메세지로 던져주고 있는 아닐까? 그렇게 돌아보고 싶은 거고요. 그리고,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의 심리를 생각해보고 싶어요. ‘자, 우리가 성과 대를 높이 쌓아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내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그런 마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안에 있는 심리는, 어떤 심리들이 있냐하면 우선 배타적인 심리가 있어요. Exclusive, 그리고 하나 굉장히 defensive 심리가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성과 대를 높이 쌓아서 하나되지 않으면 흩어질지 모른다. 그런 불안한 심리를 피하기 위해서 보이는 거라도 세워서 뭉쳐보자는, 우리 가만히 있다가는 흩어질지 모른다라는 그런 불안한 심리를 방어하기 위한 defensive 마음이 있는 거죠. 그리고 하나 이들에게 competitive 심리도 있어요. 우리 이름을 내자. 그리고 하나 덧붙인다면 take initiative 한거죠. , 우리가 해보자는 거죠. 그런데, 이제 가지 심리를 체크해보고 싶은데요. 만약 사람들이 배타적이고, 방어적이고, 경쟁적이고, 주도적인 마음을 갖고 함께 모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 우리 인류가 정말 하나될 가능성이 가지 있어요. 언제냐 하면 외계인이 침략할 . 외계인이 침략하면 모든 민족과 국가는 연합할 가능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때 공동의 적이 생긴 거니까. 그렇지만, 연합은 사실 잠시뿐이라는 우리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생각하더라도 2002 월드컵 모두 붉은 옷을 입고 정말 다같이 모든 광장들을 메우며 열광할 분명 우리는 하나였어요. 우린 하나였는데, 그때 우리의 하나됨은 exclusive 건가요 아닌가요? 굉장히 exclusive 거죠. 그때 defensive한가요 아닌가요? 굉장히 defensive해요.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 팀이 경기하는데 어느 심판이 불리하게 우리 편에 불리하게 판단한다면 다같이 그냥 굉장히 방어적이 되는 거잖아요. 그때 competitive한가요 한가요? 정말competitive하죠. 그때 얼마나 주도권을 가질려고 하는지, 다들 감독과 코치가 되서 선수 빼고 선수 넣어라 이렇게들 한마디들 하잖아요. 그런 심리들이 모여있지만, 때는 하나인 같았던 거죠. 그런데, 하나됨은 깨질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있는데, 예를 들어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배타적인 사람들끼리 함께 뭔가를 만들면 배타적인 심리는 안에서도 파당을 형성할 밖에 없다는 언젠가는. 그리고, 방어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는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서로 돌리게 되고 책임이 아니라고 하게 된다는 . 그리고, 경쟁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자연히 주도권, 자리싸움을 하게 된다는 . 그리고, 각자 주도하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모여있으면 서로 자기의 주장, 목소리를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 대화가 더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는 . 그래서,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됨은 우리 안에 있는 심리들을 사실은 우리가 극복할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축이라고도 있을 같애요. 저는 건축을 어떤 physical 건축이 정말 아니라, 우리가 땅에 기대하고 있는 샬롬이라는 것이 오지 않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있는지를, 정말 샬롬이 무엇인지를 보게 해주는, 대조가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예를 들었습니다. 사실 성공과 연합이라는 그럴듯한 아이디어였잖아요. 바벨탑은. 성공과 연합이라는 그럴듯한 아이디어였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끼리라는 어둠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결국 저는 샬롬을 무엇으로 말하고 싶으냐하면 ‘샬롬은 sharing이다’ 말하고 싶어요. 샬롬은 나의 어떤 배타적인 , 울타리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을 welcome하고 exclusive 자리에서 inclusive 자리로,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어떤 위기를 느낄 때마다 나를 방어하려는 defensive 그런 마음에서 자꾸 나를 위한 방어장치들을 만들려고 하기 보다 때로는 오히려 내가 짐을 지려는 그런 인내하고 견디려는 그런 마음을 갖고, 경쟁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compassion, 어떤 긍휼의 마음을 서로에게 제공해주고, 그리고 주도하려고 하기 보다는 정말 그분의 주되심을 놓치지 않고 그럴 우리가 함께 경험해 있는 것이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