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서론

Living out My Dream

2010년 시카고 의대 MD PhD 통합 과정을 20세의 나이로 졸업한 쇼 야노군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지금 서른이 넘은 나이로 병원에서 전공의로 일하고 있지만, 그는 이제 갓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전공의로 일하고 있다. 시카고에서 자란 그는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밑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홈스쿨링을 하고 9세에 로욜라 대학에 입학하고 12세에 시카고 의대에 입학해서 이미 한국과 미국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2세에 쇼팽을 연주하고 3세부터 작곡을 했다는 믿기지 않는 신동이라고 했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가 인격적으로도 참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일찍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 뇌 연구를 통해 인류에 공헌하고 싶다고 하면서, 앞으로 어떤 꿈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I am living out my dream now.” 이 말이 상당히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자기 꿈을 살아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남들이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그 청년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주변의 관심은 차지하고서라도 그를 극성 아시아계 부모의 희생양으로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과 그를 외계인 취급하며 인터뷰 때마다 노벨상이 목표가 아니냐고 다짜고짜 묻는 미디어의 냉소적인 태도 때문에도 참 힘들었겠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일까? 오프라 윈프리 쇼나 제이 레노 쇼의 거듭된 출연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 모든 세간의 관심 속에서 그 청년은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고 있기에 행복하다고 했다.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꿈이 실현되면 행복할까? 과연 나에게는 그런 꿈이 있는가? 만약 없다면 나에게 행복이 어떻게 찾아올까? 꿈이 있다면, 그 꿈은 어떻게 생겼는가? 여러 가지 질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청년은 지금도 매 주 고전을 몇 권씩 읽으며, 고전 중의 고전, 성경은 어려서부터 이미 여러 번 완독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크리스천인지는 모른다. 그가 말하는 그의 꿈, “my dream”은 과연 무엇일까? 꿈을 단순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로 정의해도 좋은 것일까? 꿈을 살아내긴 하되 ‘어떤 꿈’을 살아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할 지 모른다. 또 ‘누구의 꿈’을 살아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본론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청소년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면 그들을 고민을 어느 정도 다 알 수 있다고 한다. “공부 잘해?”, “여자친구, 남자 친구는 있어?”, 그리고 “앞으로 뭐 할거니?” 가 그 질문들이다. 설명할 필요도 없는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 한창 이성에 대한 관심이 넘치는 시기이니만큼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고민, 그리고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진로에 대한 걱정이 이 세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 고스란히 담긴다. 돈이 곧 힘이 되는 미국 이민사회에서 또 한가지 질문을 추가해본다. “너희 집 잘 살아?” 자신의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외제차 몇 대 정도되는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투자하는 기러기 부모님도 계신 반면, local business를 하시며 어렵게 자녀들을 뒷바라지하시는 이민자 부모들도 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이 ‘부모님의 우상’이라는 것도 청소년들은 안다. 미국 땅에서 자식 농사 잘 지어 남 부럽지 않은 멋진 가문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보모님의 부담스러운 기대를 모르는 청소년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직도 한참 더 철이 들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부러워할 모든 것을 가진 청년 쇼군의 이야기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보다 어느 별나라 이야기로, 아니면 잘못하면 부모님이 인용할 ‘짜증나는’ 예화 소재거리로 인식되기 쉬울지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내가 공부를 잘하게 되고, 맘에 드는 이성친구가 생기고, 넉넉한 부모님의 후원 아래 보장된 미래가 있는 진로가 결정되면 나는 과연 행복해질까?

고민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먼저 위의 질문들에서 드러나는 현재 내 고민들의 근본 뿌리가 무엇인지 생각 보자. 계속되는 고민은 결국 우리를 우울의 숲으로 인도한다. 고민을 더 한다고 해결책이 보일 것 같지 않다. 단언하건대, 우리 고민의 원인은 ‘자기 사랑’에 있다. 내 자신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만큼 더 큰 상처가 생길 수 있다.  컷트라인이 있을 때 합격과 불합격이 있기 마련이다. 목표가 없다면 좌절도 없다.  그런데 목표, 기준치, 컷트라인이라는 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있기에 생긴다. 내 안에 내가 정해놓은 목표가 무엇인가? 내 성적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내 여자친구는, 내 남자친구는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내가 성공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 집안 배경은 있어야 하는데, 내가 좋은 대학 가려면, 이 정도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내가 나중에 성공하게 되면 적어도 이 정도 차를 사고, 이 정도 집에서 살아야 하는데, 등등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고생을 많이 하면, 내 손해이다. 누구나 고생을 최소화하여 가장 많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을 선망하게 된다. 꼭 내가 만든 목표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부모님이 우리에게 심어준 목표일 수도 있다. 우리 아들, 우리 딸은 적어도 미국에서 이 정도 대학은 들어가주어야 한다. 부모님의 기대치가 내 기대치로 나도 모르게 바뀌었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많은 경
우, 내가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나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내 꿈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이제 가만히 생각해보자. 내 꿈은 어디서 온 것인가? 내 꿈이 세상이 불어 넣은 것인지, 주님이 주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부지불식간에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또는 미디어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꿈이 있을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없는 것을 친구는 가졌을 수 있다. 내게 없는 미국 시민권이 친구에게 있다. 나보다 영어를 훨씬 잘 한다. 나보다 학교에서 인기가 있고, 나보다 학교 성적이 좋다.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부러워하면서, 우리의 꿈이 자라났었을 수 있다. 내가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형성된 방어기제적 꿈도 있다. 연예인이 되고 싶은가? 억대 연봉을 받고 싶은가? 이렇다 할 꿈이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자라서 막연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마음껏 세계 여행을 하고 싶은가? 좋은 옷을 입고 멋진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예쁜 핸드백을 유행에 맞게 구입해서 들고 다니고 싶은가?  좋은 독일차를 몰고 다니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품격 있는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싶은가? 그런데, 현실을 보니 부자들이 자기 하고 싶은 것들은 마음대로 다 하면서 편하게 사는 것 같은가? 그래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내 적성에 크게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어떤 직업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지금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생각해보자. 물론 이 답은 각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고 싶은 모든 일들 가운데,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지를 묻고 싶다.

꿈인가?  본성인가?

이제 ‘꿈’을 막연히 하고 싶은 일 정도로 정의해도 좋을지 생각해보자. 적어도 ‘꿈’이라고 한다면, 내 본성이 하고 싶은 대로 내 맡기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마음껏 먹고, 놀러 다니고 싶은 곳을 거침 없이 다는 것을 꿈이라고 하기엔 미안하지 않은가? 예쁜 사람, 잘 생긴 사람을 만나 사귀고 결혼하는 것을 꿈이라고 하지 않는다. 꿈이라면, 적어도 꿈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이제 꿈과 본성을 구별해보자. 꿈은 나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다. 공부가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로 느껴지는가? 너무 쉽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공부를 하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고, 계획을 짜고, 의지를 가지고, 늘 열심히 하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누가 나에게 불쾌한 일을 하면, 그 사람 험담을 하고 싶어지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기도하게 되는가? 크리스천인 우리들은 꿈을 이야기할 때, 적어도 우리의 본능에 우리의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걸, 그 이상의 가치를 말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꿈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정체성에서 꿈이 생긴다.

온전한 꿈은 내 정체성이 분명해질 때 생긴다. 정체성이 먼저이고 꿈은 나중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이 없으면 애국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대한민국에 대한 통렬한 역사의식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불과 50년 전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 허덕이던 변방 국가였던 한국이 이제는 G20 세계 정상 회의의 의장국이 되었다. 세계에 유래 없는 기적의 주인공 대한민국,  전 WHO 사무총장(Secretary General)도, 현 UN 사무총장도 한국인이다. 인터넷 인프라와 모바일 통신 기술에서 대한 민국을 따라올 국가가 없다.  한번도 본선 진출, 아니 1승을 올려본 적이 없는 한국 축구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의 신화를 이룩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울렁인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되고, 걱정하게 되고,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되어 있다.
모국을 떠나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내가 10살 때 델라웨어의 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때 한국을 아는 미국 친구들은 한국에서 입양된 친구 빼고 아무도 없었다. 한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는데도, 아무도 몰랐다. 그 때는 그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 쇼핑몰에 가면, 나를 보고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던 때였다. 내가 아는 친구는 벽에 큰 태극기를 걸어놓고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 친구들의 유창한 영어에 주눅이 들었을 때는 속으로 ‘너희들 한국말로 하면 다 죽었어.’라고 되뇌이며,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우며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혼자 고생하면서 공부할 때, 내가 잘 못하면 대한민국이 욕먹는다는 생각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나와 대한민국을 동일시 할 때, 대한민국이 나의 자랑이 될 때, 나 역시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길 원하게 되다. 적어도 미국 땅에서 대한민국의 망신이 되길 원치 않게 된다.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부모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다면, 부모님의 기대가 나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기 보다, ‘행복한 부담’이 될 수 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내 어버지의 아들, 내 어머니의 딸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면, 그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최선을 다하게 된다. 누가 내 욕을 하고 다니면 참을 수 있어도 아버지 욕을 하고 다닌다면, 그것만은 참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버지와 당신을 동일시 하고 있다. 아버지 아들, 딸이라는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 속에서 꿈이 태동한다. (다음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