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강의는 2003 KOSTA/USA ‘기독교 세계관’ 세미나에서 서강대 강영안 교수가 한 ‘피자와 짜장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입니다.


저는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강영안입니다.


오늘 제목이 ‘피자와 짜장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입니다.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죠. 형편대로 피자가 있으면 피자 먹고 짜장면있으면 짜장면 먹으면 되겠죠.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피자나 짜장면을 따질 수 있는 것은 선택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부부사이에 한 사람은 짜장면 먹고 다른 사람은 피자 먹자고 할 때 어떻게 설득하겠습니까? 맛있으니까, 피자가 맛있으니까 혹은 짜장면이 맛있으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맛있지만 나는 맛이 없다 이럴 수 있기 때문에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피자보다 짜장면이 맛있다고 할 때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음식 문제뿐만 아니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할 것인가, 혹은 주거 형태 – 아파트에서 살 거냐 주택에서 살거냐- 이런 문제까지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뿐아니고 결혼을 하면 어떻게 결혼할 거냐, 타인종과 결혼할 거냐, 결혼식을 하고 살거냐, 결혼식하지 않고 동거형태로 살 거냐, 유럽의 경우는 동거도 가능하고 동거자들도 결혼한 사람과 같은 법적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변호사를 통해서 재산 등록하죠, 헤어질 때 재산문제 생기지 않도록 하고 있고, 심지어는 동성애자들도 결혼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가서 네덜란드의 경우 입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자 여자 결혼 한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피자와 짜장면이라고 하면 지금 뭘 먹을까의 문제, 음식의 취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황상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까지도 선택할 문제가 된 거에요. 나아가서 종교에 관련된 문제에도 여러가지 종교들 간의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과거에 유럽에서 기독교는 주도하는 종교였습니다. 1052년 기독교가 분열된 적이 있죠. 동방교회와 분열되었고 서방교회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개신교가 생겼죠. 개신교 안에도 수없이 많은 종파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다원주의문제가 서양의 전통에서는 종교적 분열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었습니다. 1618년부터 1648년, 30년 전쟁이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서 종식되고 이때 각 지역에 각각의 종교를 인정한다는 원칙이 정해졌습니다. 이렇게 루터란도 인정되고 칼빈주의도 인정되었습니다. 하나의 카톨릭이 지배하던 보편교회, 코푸스 크리스찬이라는 보편교회가 없어졌습니다. 기독교가 더 이상 주도적 종교가 되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지금 무엇을 먹을거냐하는 것은 취향 taste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김치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쇠고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죠. 야채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먹을 갖다대며 폭력을 이용하여 고기를 먹게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각자의 취향을 인정해야겠죠. 취향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아라라는 금언이 생겼습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취향의 문제는 어떤 음식이라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어떤 옷을 입는다는 지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은 어떻게 살것이냐 하는 문제, 어떤 방식으로 살것이냐, 동거 상태로 살거냐 제도권 안에 들어가 결혼을 하고 살거냐 이런 것도 일종의 취향이 된 것입니다. 정치적인 취향도 공화당을 찍을거냐 민주당을 찍을거냐는 문제도 정치적 취향의 문제로, 요즘은 당보다 개인에 대한 선택, 종교도 하나의 취향의 문제로 인정되는 상황입니다. 왜 그런가에 대한 질문없이 취향의 문제다라는 풍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의 의도는 이런 다원주의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가를 고민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야할까에 대한 강의는 아닌 것이죠.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과거와 달리 참과 거짓,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이런 것에 대한 기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실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최근에 국내에서 문제가 된 사건 가운데, 김인규 교사라는 서천에 있는 중학교 미술교사가 자신의 아내와 찍은 누드 사진을 자기의 홈페이지에 걸어둔 것이 문제가 되었고 학부모들이 문제를 삼았는데 본인은 거부를 했고 사이버경찰수사대에 신고되어서 그 분을 구속하였습니다.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었고, 검찰이 기소하니까 교육청에서 직위해제를 하였습니다.
혹시 보신 분 계십니까? MBC에서 100분 토론에서 토론하자고 해서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대표로 나가면서 알아보게 되었는데요, 저는 사진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5년 전 사진인데, 제왕절개 수술한 표지까지 다 보이고 가슴도 다 드러나 보이고 전혀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고 성적 자극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교사는 예술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술가로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과 교육의 영역이 있는 것이고, 예술가로서 기대하는 방식이 있고 교육자로서 기대하는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의 충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검토하면서 한국 사회가 그 사이에 엄청나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이버 투표를 했거든요. 교사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투표가 더 많이 나왔습니다. 오프라인에서 대화를 해보았을 때는 반대의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교사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지 않겠다 이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미적 영역이고 옳고 그름은 윤리적 물음인데, 요즘 그런 구별이 많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옳고 그름이 없다고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성경말씀으로 이사야서 5장 20절을 보겠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을 흑암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으며 쓴 것을 단 것으로 삼은 자는 화가 있을진저’
이렇게 완전히 가치를 뒤집어 버린 사람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들에게 적용시켜보면, 그리스도인은 악은 악하다고 하고 선은 선하다고 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특별히 그리스도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0절을 보면 주께 합당하게 행하라, 빌립보서 1장 27절을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그리고 에베소서4장 2절을 보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라.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가치에 어울리도록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당하다는 말이 악시옴인데, 여기서 axiom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Axiom 그리스도인의 가치에 어울리도록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다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이런 위치에서는 이럴 수 있고 저런 상황에서는 저럴 수 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그리스도인이 상대주의자는 될 수 없습니다. 가치 상대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는 우리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라들도 있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있고 간혹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할까, 이 문제가 바로 다원주의의 문제입니다. 다른 생각, 다른 방식, 다른 세계관이 공존하는 상황이 될 때, 다른 세계관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다원주의가 문제가 됩니다.


먼저 다원주의가 뭔가를 생각해보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생각해보죠. 다원주의를 영어로 무어라고 합니까? Pluralism이라고 합니다.
어떤 한 개념을 알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개념과 반대되는 개념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Pluralism의 반대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형이상학적으로 Monism 또는Uniformism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plural이란 문법에서 복수를 얘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복수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조금 쉬운 말로는 many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onism은 희랍어로 Monus에서 나온 것인데 one이니까 형이상학적으로 단일주의, 유물주의에서는 오직 물질만 존재한다, 또는 Spiritualism 정신주의에서는 물질은 정신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정신만 존재한다 이렇게 주장하면 monism이 됩니다. 정치형태에서 정치형태는 하나만 존재한다고 할 때 monism 다양한 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할 때 pluralism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숫자를 생각해보면 무, 하나, 여럿, 또는 모두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정치제에서 Monarchy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고 몇 사람이 다스릴 때 aristocracy, 많은 사람이 다스릴 때 plural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스리는 것을 democrac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수주의는 여러가지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다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많다는 것이 나쁠 때가 있습니다. 양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종류가 많다는 것이죠. 음식이 많으면 좋겠죠. 색깔같은 것은 많을 수록 좋겠죠. 성도 남자만 있지 않고 남자와 여자가 있다는 것이 좋겠죠. 각각의 종류대로 여러가지를 지었다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세상에 많은 종류가 있는 것이 창조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신학자 중 God dislikes uniformity 하나님은 다양하게 사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잘못된 결론으로 흑백이 일부러 하나로 되어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정당화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하나님이 지은 세계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세계이고, 다양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미국에서 놀란 점이 반샌 노블에 가보면 영어책만 있습니다. 저는 유럽에서 공부했으니까 서점에 가면 영어책, 불어책, 독어책, 화란어책 등 다양하게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용하고요.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어렵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획일적인 것보다는 많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 이렇게 많아졌는가, 이것을 생각해보죠. 예를 들어보죠. 노량진에 100년 한 아가씨가 있었다고 생각해봅니다. 한 아가씨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아마 십중팔구 노량진에서 태어난 대로 부모 밑에서 살다가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고 그렇게 살았겠죠. 지금 노량진에 살고 있는 한 아가씨를 생각해보면, 그 아가씨가 선택할 여지가 아주 많습니다. 결혼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도 선택할 것이고, 결혼하면 어떤 사람과 할 것인가도 알 수없고, 공간적으로도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 무엇을 할 지도 모릅니다.
다원주의라는 것은 선택 가능성이, 옵션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아파트가 없었지만 지금은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것이죠. 수없이 많은 직업도 사라지고 생겨나고 있죠. 선택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15세기 한국에 살았던 사람이 선택할 종교는 무속 또는 불교나 유교가 될 거에요. 지금 와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불교신자가 될 수도 있고 기독교 신자도 될 수 있고, 한창 한국에서 전도 많이 하는 증산도 신자도 될 수 있고요. 선택의 가능성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촉진하고 기술적 발전으로 선택가능성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의 생각해봐야하겠습니다. 여기서 기본적인 말씀을 보면 몇 가지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 16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몇 가지를 다원주의와 관련된 몇 가지를 이야기 해보죠. 성에 관한 문제, 정치적인 성향의 문제, 종교적인 문제, 즉 신앙의 차이와 관련해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크게 세 가지를 알 수 있는데요, 첫번째로 ‘너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 바울 사도가 살던 시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비슷한 정도로 다원주의의 시대입니다. 우리시대만 다원주의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테네는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던 곳입니다.
아테네 이야기 데살로니가에 가기 위해서 잠시 머문 곳이에요.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왜 아테네에서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의문이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무른 것으로 나옵니다.
도시를 둘러보고 거기에 우상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 가서는 유대인들과 아고라에 가서 아테네 사람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스토아 학파 사람들과 에피큐리안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에피큐리안들은 쾌락을 즐기되 작은 자연적 쾌락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친구들과 담소하고 소박하게 삶을 즐기며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은둔주의자였습니다. Hidden Garden에서 조용히 은둔하는 삶을 이상으로 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면서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다양한 사상과 접촉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다는 것은 말했습니다. 여러분 주로 삼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또 어떤 것의 주인입니까. 어디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입니까? 가장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삶의 주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삶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추상적인 질문이 되겠지만 삶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하는 것은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일터로 나가거나 학교로 가거나 공부하거나 말하거나 일하고 물건 사고 팔고 결혼한 사람은 부부생활하겠죠.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기뻐하고, 이런 삶의 주인이 그리스도이다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라는 것이 어떤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성의 주인, 우리의 노동의 주인, 우리의 삶의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로 삼는다, 먹고 마시는 것이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 욕심대로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대로 바라시는대로 산다는 것이지요. 내가 생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대로 한다라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내가 아내와 성생활을 하는데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성을 감사히 누리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즐기는 것도 옳지 않고 너무 금기시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입니다. 잠자는 것, 음식을 먹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라는 것은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누리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첫번째로 삶의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감사하면서 그것을 누리는 것 그것이 Lordship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베드로서가 말하는 두번째의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어떤 태도로 하면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유라는 말은 원어로는 logos입니다. 영어로 logic의 어원입니다. 그 이유라는 뜻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도록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대답이라는 말이 apologetic, 변론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신자가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성에 대한 너의 태도가 왜 그런가 하고 물었을 때 그 것에 대해서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왜 기독교인이냐 라는 질문에 대답할 태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이번 주제인 다원주의와 관련된 것인데, 베드로서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영어 성경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시면 한번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RSV에서는 With Gentleness and Respect이라고 번역하고 있죠. 그러니까 아주 젠틀하게, 온유하게 그리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강연을 할 때 대학교 1학년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카톨릭, 불교 신자에게 어떻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단의 종교를 믿는 사람을 어떻게 존경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서강대에 있으니까 개강 미사가 있거든요. 지금은 개신자 신자들은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만 초창기에는 미사에 참석을 했어요. 사실 저는 유럽에서 공부할 때 미사에 참석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곧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미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같이 참여하는 것이 서로 이렇게 힘든 것 같습니다. 역사를 보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큰집과 같은 것인데요, 물론 오류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오류가 많이 있습니다. 교황무오설이니 무오수태설 이런 것은 사실 200년도 안 된 것입니다. 그렇더라고 사단의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도 불교가 사탄의 종교인가 이것 잘 모르겠어요.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견성성불이거든요. 내가 깨달아서 구원을 얻어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인간의 방법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방법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불교철학을 공부해보면 그 생각이 참 깊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파고들면 결국 파악이 되고 이해가 되요. 성경말씀은 그렇지 않거든요. 결국 불교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종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골똘하게 생각한 것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죠. 성경 말씀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때로는 논리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가 성육신인데, 요한복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보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고통을 당할 수 있냐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인데,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꺼리는 것이 된다고 했는데, 사람의 생각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죠.
헤겔이 그리스의 종교 사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 “고통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이런 뜻인데요, 그만큼 신앙을 갖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반증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 핵심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는 기본적은 논리적 구조로 되었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논리를 뛰어넘는 거에요.
그런데 불교 교인을 대할 때 힘으로 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입니다. 가서 주먹쥐고 대할 수 있는가, 아니거든요.
동국대에 있는 교정에 있는 불상을 훼손해서 소란이 난 일이 있었죠. 노량진에 장승을 베어버린 사건이 있었고, 단군상을 부셔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신소속 장로인데, 교단 소속 목사님, 관련된 목사님이 감옥에 간 경우가 있었습니다.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데, 논리적으로 따져서 그것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지적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것은 Gentle한 방식으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존경할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온유와 존경으로 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져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 영어 성경 한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SV에 따르면 Pursuit peace with everyone 하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라는 것이고, 두번째가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품이나 삶이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로서는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종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같은 생각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거룩함을 요구하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요즘 박진영이라는 가수가 얼마전에 6집을 냈는데, Sex is Game이라는 곡을 발표를 했습니다. 지난 2,3주 미디어에서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기윤실을 아예 지목을 했습니다. 결혼 전에 섹스를 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에 어디에 있냐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상물 등급위원회에 18세 이하 판매 금지를 주장했는데, 기각 당했습니다. 이 조직은 업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업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매운동을 인터넷을 통해서 하고 있거든요.
불신자들에게 그렇게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다만 문제는 대개 음반 소비자들이 중학생들이거든요,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고 즐길 수 있는 것이지만 박진영이라는 가수가 주장하는 것은 왜곡된 성입니다.
성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에 가장 친밀성을 주는 것이거든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성적 관계보다 더 친밀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없거든요. 다만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는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사들에게 얘기하는데, 세상과의 관계에서 꼭 이기겠다고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권유했습니다. 젠틀하게 그리고 왜곡된 인격이지만 그 인격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진영을 한번 불러다가 이야기를 해보자, 박진영을 위한 기도모임을 만들자, 그래서 좋은 음악, 좋은 글을 만들 수 있도록 하자,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른 생각,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되야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우리의 확신은 분명하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확신을 갖되, 다른 믿음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행동할 때는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젠틀한 방법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다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