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8, 2001 | 삶과 신앙/유학생의 삶
유학생의
경건의 연습과 약속 (1)
진리가 왜곡되는 시대
십여년 전 나는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몇 개월만에 내가 변화받아 섬기던 한인
이민교회가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았다. 그 후에도 수 많은 이민교회가 분쟁하고, 쪼개지는 아픔을 보았고, 또 겪었다. 그러고 보니
이민교회의 수 없는 분쟁과 아픔 속에서 내 믿음이 자란 셈이다. 지금도 도시 도시마다 한국 이민교회들은 서로의 문제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들 교회 속에서 섬기는 유학생들도 필연적으로 상처입을 수 밖에 없으며, 이런 현실 속에서 저들의 믿음은
넘어지며 또 성장하고 있다. 열악한 이민교회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어떻게 신앙을 훈련하고
단련할 것인가에 대하여 본 칼럼에서 몇 회에 걸쳐 쓰고자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시골에서 드물게 만났던 크리스천은 시골에서 참 형편없이
인기없는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의 신조를 믿는 우직함과 정직성과 신실성에서는 가장 신뢰받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크리스천은
말만 떠벌리는 허풍쟁이요, 기복주의에 탐닉하는 위선주의자로 사회에 비쳐지고 있다니 슬픈 소식이 아닌가? 또 이곳 한인 이민교회는
준비되고 훈련되지 못한 교회의 지도자들 때문에 얼마나 중병을 앓고 있는가? 모두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처럼 혹독하게 훈련받고,
교회의 지도자로 선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세상의 잘못되고 왜곡된 신학과 변질된 가치기준으로 훈련 안 된 교회의 지도자를
‘서로 협력하여’ 세웠으니, 이 시대에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고통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최근 한국교회의 이러한 문제점을 분석하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나는 본질적인
문제는 첫째로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혼동한 데 있고, 둘째로는 훈련 안 된 사람을 무분별하게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탓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준엄하신 공의는 동전의 양면같이 존재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이 두 속성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사랑의
주님께서 선포하신 공생애의 첫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였다. 결국 우리 죄의 회개함 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주님의 사랑이 크다고 하실지라도, 죄의 회개함 없이 죄의 용서는 없다는
준엄함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겠는가? 죄가 있는 곳에는 “회개”의 선포가 있어야지, “사랑”이 선포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많은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사랑으로 죄를 감싸라고 요구하고 강요하고 있다. 물론
사랑은 우리의 허다한 허물을 덮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회개함 없이 사랑으로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의 징조에 대해 이른 것 같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한 그런 시대가 되었다. 목회자들이 죄있는 곳에 회개를 선포하면 교인들을 억압한다고 반발한다고 하니,
교인들은 자기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목사들만 찾게 되고, 또 양식있는 목자들도 그 풍조를 따라가게 되었다. 주님의 사랑 만을
이야기하면 너무도 감미롭고 달콤하며 듣기에도 좋다. 그래서 현대의 교회들은 세상의 많은 죄와 크리스천의 잘못된 죄악을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다 덮고 말았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면 병들기 마련이다. “회개”를 선포해야 할 곳에서 사랑으로 죄를
덮었으니, 종래는 이것이 죄악으로 곪아서 냄새가 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어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우리는 “죄의
회개”의 선포없이 너무도 싼 값에 주어버리지 않았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죄의 회개를 말하면 모두 싫어하고,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병이 나고 있다.
내가 아는 많은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지금도 이 사랑과 공의를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지 못하여 분쟁에 휘말려 있다. 사랑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들이대면 구원받을 자가 누가 있겠으며, 용서받을 행위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공의”는 하나님의 의요, 사랑이다.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란 “죄의 회개함”이 있는 곳에 무조건적인
용서를 약속해 주신 것이다. 주님과 함께 골고다에 못박혔던 한 강도는 단순히 “죄를 회개함”으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갈 수 있다는
무한하며 무조건적인 사랑의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고서 회개함이 없이 목매어 죽어 버린 가룟 유다를 연민으로
긍휼히 여길 수는 있으나, 사랑으로 그의 죄를 덮어 줄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제일 큰 위기는 참된 진리와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을
우리 모두가 잃어가고 있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급히 변화하는 가치와 문화는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선명한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며, 시대에 따른 모호한 새로운 삶의 기준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크리스천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나님이 성경에 분명하게 말씀하신 진리도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우리에게 강요하는 변질된 신학과 거짓 선지자 및 크리스천
가치와 문화를 보면, 이 시대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기 원하는 크리스천들에게 위기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이미 미국에서는 한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부부가 거의 50%가 넘는다고 하니,
이혼이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막10:2-9) 이제 교양없는 소치로 받아들여지며, 또 이혼에 대해 공개적인
견해를 밝히는 것은 이 사회의 금기사항이 되었다. 동성연애자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금하신 동성연애(레20:13,롬1:24-27)를
합법화 해주고 있다. 미국에서 결혼하였느냐, 아이들이 몇이냐고 묻는 것은 큰 결례가 되는 질문이 되었다. 심지어 많은 크리스천
사이에서 조차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라는 베일 속에 준엄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묻어버리길 원하는 크리스천이 너무도 많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공의는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병행하며 조화를 이루는 진리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준엄하신 공의를 너무 쉽게 저버리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지 부시는 알 고어 전부통령과의 TV 공개토론회에서
동성연애의 합법성에 대하여 기자의 질문을 받자,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있다고 두번이나 확실하게 답변하였다.
미국의 혼탁한 현실을 고려할 때 대단히 용기있는 대답이었다. 최근에 접한 부시의 신앙고백을 읽으면서, 그가 신실한 크리스천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결코 여기서 이혼이나 동성연애문제 같은 뜨거운 감자를 갑론을박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혼한 사람이나 동성연애자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저들의 아픔을 나누며, 새로운 삶을 살도록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르지 않다고 하신 것을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옹호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
분명 이 시대는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왜곡되는 시대이며, 이것을 너그럽게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수용하는, 불의와 야합된 크리스천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주님은 말세에 믿음 보겠느냐고 물으셨던
것일까? 이 시대가 이처럼 혼탁해진 것은 이 시대를 주도하는 세대를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하고, 영적인 싸움을 위해 무장시키지
못한 탓이며, 다가올 세대의 혼탁함을 미리 예측하며 대비하지 못한 탓이다. 이래서 성도의 신앙의 바른 훈련과 경건의 연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크리스천 유학생은 유학생활동안 부지런히 신앙과 학문을
겸비하여 훈련하고 배워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크리스천 지도자가 될 유학생 크리스천의 신앙훈련은 너무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물론 크리스천 유학생이 전공의 학문을 공부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나, 지금은 도리어 신앙을
배우고, 훈련하고, 또 단련할 때라고 본다. 진정한 변화없이, 혹심한 훈련없이 진정한 섬김이 있을 수 없으며, 아직은 균형있고
충성스런 섬김을 이루기에는 좀 이르지 않나 생각해 본다. 졸업 후에 다가올 세대가 여러분의 능력있는 참 믿음을 요구하며 또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향방없는 섬김에 너무 열중하기 보다는 도리어 신앙을 갈고, 닦고, 훈련하고, 연단하기에 초점을 둠이 옳다고 본다.
신앙은 훈련이다. 주님은 훈련없이 사람을 들어 쓰신 적이 없다.
유학생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경건의 연습과 훈련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맡아서 목양하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딤전 4:7-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유학생들이 받을 만 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유학생의 학업과 전문성 계발에 도움이
되고, 구원에 이르는 약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건의 혹독한 연습과 훈련이 있어야만, 흔들리는 이 시대에 사랑을 공의와 함께
말할 수 있고, 공의를 사랑과 함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경건의 혹독한 연습없이 허탄한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처럼 무섭고 망령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된 나의 경건의 연습이 나로 하여금 유학생들에게 권면하는 글쓰기를 두렵게 한다. 다음
칼럼에서 만날 것을 다시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주님께 기도한다. 주님의 마음을 주십사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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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3월호
미국서부의 어느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는 B집사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국에 처음 이민 와서부터 줄곧 다니던 이 교회를 이제는 떠나야 할지 아니면 그저 묵묵히 남아있어야 할지 누가 좀 시원하게 이야기라도 해주었으면 싶은 게 요즘이다. 예배를 드려도 설교말씀은 들어오지도 않고 자꾸 시계만 쳐다보는 버릇이 언젠가부터 생겼다. 8년 이상 섬겨오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점점 ‘맛이 가고’ 계시다는 확신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교회선교부에서 총무로 일했던 그는 지난 여름의 단기선교 재정보고서를 훑어보던 중,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지원금에 대한 지출보고서가 어딘가 허술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 연말의 공동회의 때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은 전혀 없었음이 생각났고, 몇다리를 걸친 수소문의 결과, 교회 재정부장과 단기선교 인솔자였던 담임목사님과의 은밀한 공조행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사실 사라진 돈의 액수가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으나 문제의 장본인이 교회의 핵심인물인 담임목사님과 재정부장이라는데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정보를 제공해 준 교인 몇몇은 ‘큰 액수도 아닌데 기도하면서 은혜롭게 넘어가자’는 분위기였다. 자, 이제 그는 어찌 해야 하는가? 정보제공자들은 그저 ‘은혜로운’ 교회생활을 위해 물밑에 남아있기를 원하고, 진상규명을 시작해야 한다면 이제 서있는 사람은 B집사 혼자다. 그 역시 ‘비판하지 말라’는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되뇌이며 묵묵히 기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저, “내가 여깄소”(Here I stand)하고 나서야 하는가?
위의 내용이 충격이었다면 근심하시지 말기 바란다. 상상력을 동원한 픽션이었으니. 하지만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불행히도 우리가 섬기는 교회공동체에는 별로 아름답지 못한 일로 인해 다양한 송사와 분쟁, 쥐어잡는 멱살과 삿대질을 목격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세상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은 그저 고리타분한 설교처럼 들리기만 하는 요즘 세상이다. 우리의 고민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비판하고 바로잡아야 할 문제거리가 생겼을 때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와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예를 들자면 예배마치고 술집과 노래방으로 향하는 청년들에게 리더인 내가 해줄 말은 무엇인가? 혹은 같은 교회집사님들이 사업상의 이유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고 소송이 걸릴 판인데 담임목사는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처럼 산적한 문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때 우리는 어떻게 이를 성경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하는가. 이러한 내용을 잘 정리한 글이 있어 함께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아래의 내용은 송인규목사의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IVP, 1995)라는 책의 일부를 발췌해서 정리한 것이다.
송인규목사는 비판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 (1)비판자로서의 자격, (2)비판력의 발휘, (3)비판의 초점, (4)비판의 목적, (5)비판 내용의 표현 방식의 다섯가지로 요약한다. 그는 이들 요소를 살펴봄으로 “비판자의 행위가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나는 비판자로서의 자격을 구비하였는가, 아니면 미비한가? 저자는 ‘외식'(外飾)(마7:1-5)이나 ‘간섭권부재'(롬14:4; 약4:11-12)의 경우, 비판자의 자격미달로 인해 바람직한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즉, 비판자 자신도 할 수 없거나 스스로도 몰래 행하고 있는 행위에 대하여 공격하는 것은 외식에 해당되므로, 야고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이러한 비판이 아닌 ‘비방'(誹謗)의 문제는 이미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비방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자신의 행동이 남에 대한 간섭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돌이켜 보아야 한다.
둘째, 내가 발휘하는 비판력은 건전한가, 아니면 왜곡되었는가? 저자는 ‘판단력방해'(요7:24; 8:15; 약2:2-4)나 ‘판단근거 불가측'(不可測)(고전4:5)과 같은 경우에는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판단의 근거가 되는 자료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비판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내리는 판단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기가 쉬우며 이는 흔히 우리가 범하는 실수가 된다. 또 우리가 남을 평가할 때 비판자 본인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은밀한 내용에 대하여는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판결하실 때까지 유보해야 한다고 바울은 권면한다.
셋째, 비판의 초점이 행위에 있는가, 아니면 인격에 있는가? 저자는 비판의 초점이 그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그의 행위나 특질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우리는 사람의 행위를 비판해야지 그 사람 자신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비판자는 흔히 비판대상에 대한 그릇된 태도(롬14:1,3)를 갖기 쉬운데, 그 이유를 두고 로마서 14장은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사실상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비판자는 비판이 부당한 항목(롬14:1; 골 2:16)에 대해 비판하기가 십상인데, “사순절 기간인데 어떻게 보신탕을 먹을 수 있니?”라고 비판하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비판하고 있는 항목이 때론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요소가 아닌지 비판자는 확인해야만 한다.
넷째, 비판의 목적이 형제의 유익을 위함인가, 아니면 자기 만족을 위함인가? 저자는 비판의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비판의 동기와 목적이 그릇되면 부당한 비판이 된다고 말한다. 비판은 궁극적으로 상대의 유익을 위하여(히 12:10) 그를 바로잡고(갈 6:1) 세우는 것(고후 14:10)이지 결코 상대방을 파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저자는 John Alexander의 “건설적 비판”이라는 책을 인용하며 비판하고자 할 때는 먼저 스스로에게 다음 사항을 질문할 것을 강조한다. 즉, 나는 왜 부정적인 비판을 표명하고 있는가? 나의 자아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어느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함인가? 보복을 위해서인가, 나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함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사람들을 돕고 우리의 기독교 공동체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인가? 이상의 질문들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비판은 정당한 것이 되겠다.
다섯째, 비판내용을 표현할 때 이를 지혜롭게 전달하는가, 아니면 파괴적으로 임하는가? 저자는 비판에 있어서 또한 중요한 것이 우리가 비판할 때 올바른 표현방식을 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판은 당사자에게 직접(直接) 사적(私的)으로 전달되어야 하고(마18:15), 그의 감정 상태를 가장 덜 건드리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엡4:15). 따라서 당사자의 뒤에서 불만을 토로하고 다른 사람에게 소문을 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비열한 행위이다. 우리는 비판의 대상자에게 사적, 직접적, 동정적인 전달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아니면 공개적, 우회적, 파괴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저자는 건전한 비판력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숙과 발전에 꼭 필요한 것임을 강조하면서도 ‘비판가'(Critic)와 ‘예언자'(Prophet)을 대조하면서 온전한 사랑의 눈으로 형제를 긍휼히 여기며 그의 행복과 성숙에 대한 사랑의 관심 속에서 비판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저자는 아래의 표를 통해 명확하게 그 대조점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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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가 (눅18:9-14) |
예언자 (단9:3-19) |
타인에 대한 자세 |
남의 약점을 지적하고 자기는 남다르다는 것을 부각시키며 (11-12절), 남을 멸시함(9절) |
남보다 옳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며(11-12), 남과 자신을 ‘우리’라고 칭하여 함께 죄인됨을 고백함(15-16절) |
활동의 초점 |
남의 잘못을 지적함 (11절) |
상대방이 오류에서 벗어나 변화되고 회복되기를 하나님께 바람(17-19절) |
관심의 방향 |
자신의 번영에만 관심을 가짐 (9,11절) |
공동체의 유익과 발전에 관심을 가짐 (16-19절) |
마음의 상태 |
자기 의(義)에(9절) 흐뭇해 함 (11절) |
남의 과실을 슬퍼하고 안타까워 함 (3절) |
Mar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3월호
‘갈등’이라는 단어 앞의 수식어구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흔히 고부 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여야 간의 갈등, 혹은 얼마 전에 떠들썩했던 의·약분업시 의·약 갈등 등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의 종류를 그 ‘원인’에 따라서가 아니라 갈등구조를 보이는 ‘대상’에 따라 구분한다는 것으로 봐도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공통적으로 쌍방 간의 이권의 대립이라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각 대상에 따라 무엇을 이권이라 정의하는가는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를 대상으로 갈등을 정의한다면 과연 그 대상은 누구이며 문제되고 있는 ‘이권’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세상사 갈등의 주요소인 금전적 이해관계가 이권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없진 않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내의 이권은 뭐니뭐니해도 영적 권위, 곧 ‘영권’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갈등을 일으키는 대상은 초신자들이 아닌 영적관심사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중견급(?) 성도들, 혹은 목회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내에 목회자와 성도, 목회자와 부목회자, 그리고 성도와 성도 간의 갈등은 어느 교회나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하기 마련이고, 여기서 그러한 사례 만을 짚고 넘어가는 것으로 그친다면 또 하나의 가십거리를 제공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약함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갈등에 대해 갈등의 대립구조 선상에 있는 성도들이 기도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쁘게 역사하심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그 안에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제시되는 사례를 통해 서로 대립되는 갈등의 원인에 대해 살펴보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찾아보기로 하자.
미국 A주의 학원도시 B에 위치한 C교회는 한인교인 총 120명 남짓의, 교인의 40%가 유학생인 유학생교회이다. 교회성도의 평균연령이 40세로 비교적 젊은 성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B지역의 영어권 한국학생들 및 2세들의 기독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돕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할 것을 목적으로 영어예배를 한국어예배와 함께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영어예배 담당목회자의 잦은 전출로 장기적 비전수립에 난항을 거듭하던 중, 1995년 인근교회의 외국인 목사님을 영어예배를 담당하시도록 청빙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어예배를 드리던 성도의 자녀들 중 중·고등부에 등록된 아이들은 한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소수였기 때문에, 영어예배 목사님을 청빙하는데 있어서 지역 내의, 특별히 한국계 영어권 유학생과 교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비전에 합당한 청빙인가에 대한 철저한 검증문제가 성도들 간에 주된 관심사로 등장하지 못했고, 은혜 가운데 인사를 단행한다는 명목 아래 공식적인 절차들을 제대로 밟지도 않았다. 그러나 외국인 목사님을 모심으로 말미암아 영어예배의 구성원이 점점 특정 외국인종(人種) 중심으로 변해가고, 목사님이 한국어를 하실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한국어권 중·고등부 학생들이 드릴 수 있는 예배가 부재(不在)케 되었으며, 그 구성원과 사용언어 측면에 있어서 영어예배와 한국어예배가 융화하는데 어려움이 쌓여가는 등, 문제점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성도들의 중·고등부 자녀의 수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게 되었고 그들이 받고 있는 영적 양육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이 비례하면서, 자녀들에게 한인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영어예배가 한국계 영어권 학생들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향으로 영어예배의 기본 취지를 재정립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한국계 목사님의 청빙에 관한 안건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영어예배에서 목회하던 목사님과 성도들의 입지가 도전을 받게 되었고, 외국인 목사님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영어예배 구성원들 사이에서 인종을 초월한 복음 안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한 당위성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두 개의 대립구도 상에 있던 집단에서 각자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했던 하나님의 말씀 중의 하나가 사도행전 1장 8절, “…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이었다. 한국계 교포 중심의 목회비전을 제시하는 그룹은 먼저 ‘예루살렘과 유대’에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한국계 영어권 학생들과 2세들을 복음 안에서 먼저 양육하는 것이 현존하는 한인교회의 우선순위라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기존의 영어예배에서 양육받아 온 그룹들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는 말씀에 기초하여 다국적 성도들에 의한 예배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구조를 악화시킨 것은 두 그룹 모두 말씀과 기도에 근거하여 각기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과 메시지로 인해 인도받았다고 주장하며 모두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영적 분별력과 권위에 대해 서로 도전을 한 것인데, 이는 대립구도를 ‘상대방에 대한 감정’으로 몰고가는 계기가 되었다. 목회자의 목회·설교내용이 서로를 겨냥한 메시지로 해석되고 이로 인해 상처와 도전을 주고 받게 되면서, 영어예배를 시작할 때의 처음 목회비전을 두 그룹이 함께 되짚어 가며 상대방의 의견을 수렴하여 그 해결점을 모색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방어자적 입장이 너무 굳어지게 되었다. 이 사례의 경우 피상적으로는 서로가 공유하지 못한 비전에 대한 갈등의 구도를 보이고 있으나 정작 갈등을 가속화한 것은 기존 구도에서 만족을 얻고 있는 그룹과 변화를 모색하여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영적 이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룹 간의 ‘영권을 둔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하나님 안에서 너무 견고히 서 있음’으로 인해 상대방의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적이고 훈계자적인 태도를 고집했다는 점이다. “…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8:1)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다.
몇 개월 간에 걸친 대립구도 끝에 외국인 목사님께서 섬기시던 영어예배는 거처를 옮겨서 다국적 학생을 복음화한다는 비전으로 새로이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고, 기존의 한인교회는 목회비전에 합한 한인 1.5세 목회자를 1년 여에 걸친 기도 끝에 청빙하여 한국계 영어권 유학생들과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목회를 하고 있다. 이러한 아픔을 수반한 변화구도에서 다행스러웠던 점은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아름답지 못한 이 모든 모습을 합력시키심으로 선을 이루셨다는 것인데, 상황이 악화되어 갈수록 교회 내에 ‘꿇는 무릎’이 증가하고 교회의 위기에 대한 관심과 회개와 중보의 운동에 불을 붙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왔던 교회 내 부서에 대한 무관심을 회개하고,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다른 영혼들과 상처를 주고 받았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치유하심에 대한 간구, 교회의 목회비전에 합한 목회자를 찾는 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기도들, 자신의 신앙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열린 마음, 또 국적을 초월한 외국유학생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목회활동….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어려움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C교회에 이루신 선한 선물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약한 존재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말씀 안에 바로 서 있느냐에 상관없이 자신의 경험에 의해 하나님을 보게 되고 인식하게 된다. 특히나 자신이 하나님의 반석 위에 너무도 든든히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영적 입지를 자신이 서 있는것과 같은 수준의 반석 위에 놓는데 인색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고 성장을 거듭하는 성도로서 특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렇게 강한 영적자아가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된 자들과의 그것과 이견을 두고 대립할 때 “..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라는 말씀을 상고하면서 서로에게 덕이 되는 해결방안(方案)을 사랑 안에서 찾아가야 한다는, 너무도 원론적인, 그러나 행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해결책을 제시해 본다.
Mar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3월호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갈등이 있다. 거룩한 교회를 만들고 싶은 욕구와 화목한 교회를 만들고 싶은 두 욕구 간의 갈등이다. 거룩을 추구하기 위하여서는 비판을 하여야만 하는데 비판은 분열을 가져오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싸우는 인상을 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화목하기 위하여서는 서로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부정과 부조리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부패를 가져올 것은 같은 두려움이 있다. 이 두가지 갈등 안에서 타협점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이는 성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비판하지 말라”는 계명(마7:1)과 “형제가 잘못하거든 바로 잡아주라”는 계명(갈6:1)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된다. 나도 목회하는 목사로서, 또 주님 뜻대로 살아보려는 성도로서 이러한 갈등을 느끼고 있다.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발견한 몇개의 커다란 해결원칙을 (편집자의 부탁을 받아서) 나누어 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우리는 갈등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갈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성숙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유대인과부와 이방인과부 사이에 구호문제로 인한 갈등이 생겼을 때에 이것을 계기로 ‘기도하고 말씀사역에 전념하는’ 사도들의 역할이 정립되었고 훌륭한 집사들을 선출하게도 되었다. 구약의 규례를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과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 사이에 생긴 안디옥교회의 갈등은 예루살렘회의를 가져왔고 이 회의를 통하여 복음이 좀 더 분명하게 정의될 수 있었다. 이처럼 교회가 ‘건강’하기 위하여서는 갈등이 필요하다. 문제점을 발견하고 교정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등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문제를 쉬쉬하고 감추어서는 안된다. 갈등을 인정하고 노출하여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차원에서도 갈등은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원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닮게 되는가? 이는 ‘갈등을 통하여서’ 가능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위해 우리기 변화 받아야할 부분을 먼저 지적해 주신다. 그런데 이렇게 지적해 주시는 방법이 바로 갈등이다. 예를 들어서 교만한 사람에게는 교만한 사람을 붙여주신다. 갈등의 원인이 자신의 교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상대방의 모습을 통하여 교만이 얼마나 추한지를 보여주신다. 이 교만한 이웃과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 가운데에서 우리는 비로소 교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교만한 이웃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서는 아니 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갈등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서는 안된다.
둘째로 갈등의 대상이 믿음의 형제자매인 것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대부분의 갈등이 해결되기 보다 투쟁으로 확산되는 것은 믿음의 형제자매를 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들을 적으로 생각하면서 감정적인 요소가 개재(介在)되기 시작한다. 투지가 끓어오르기 시작하고 증오감으로 불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이 있는 한 갈등이 건설적으로 해결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자신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상대방이 비록 의견은 틀리더라도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이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무슨 이단시비가 붙을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 쟁점이란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고 신학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계에 잘 알려진 순복음교회의 C목사님이 이단시비에 몰릴 때에도 그랬다. 신앙적으로 그분과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내게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이단으로 공격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내 스스로가 보기에는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지엽적인 것이지 기독교 신앙 본질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혹하게 이단으로 몰아치는 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것만 인정했어도 아름다운 신학적 토론으로 이끌 수 있었을 텐데. 일단 이단으로 몰고보는 바람에 의미있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나의 형제요 자매이라는 것만 의식해도 노골적인 적대행위나 원색적인 비난을 삼갈 수가 있을 것이다. 갈등이 외부에까지 노출되어서 사단과 세상의 웃음거리는 되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갈등이 해소되지 못하고 투쟁과 분열로 극대화되는 것은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확실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공격하는 수가 많은데, 이럴 때 억울하게 공격을 받는다고 느끼는 상대방이 격렬하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며 결과적으로 갈등은 확대될 수 밖에 없다. 요즈음 큰 교회 목사님의 대물림이 문제가 되고 있다. 사실 ‘대물림’이라는 용어 자체가 상당히 감정적인 단어가 아닌가. 목사의 아들이 목회자로서 자질도 없고 목회능력을 검증받지도 않았는데 당회장의 아들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후임목사로 추대받았다면 이것은 대물림이다. 그러나 담임목사의 아들이 신학훈련도 받았고 목회능력도 검증 받았으며 많은 후보 중의 하나로 고려되었다면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된다.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상투적인 문구를 사용하거나 비난을 퍼붓기 때문에 갈등이 건설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투쟁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보게 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부부끼리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 않기 때문에 갈등이 확산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반찬이 왜 맨날 이 모양이야!” 저녁 늦게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이 저녁밥상을 내려다보며 불평을 한다. 자기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서 만든 반찬인데. 아내는 섭섭한 마음이 든다. “나는 가져다 주는 쥐꼬리만한 생활비로 최선을 다한 것이니까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말아요!” 아내는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꽝 닫는다. 이에 남편은 곧 수저를 내동댕이치고 서재로 들어가서 문을 꽝 닫는다. 정성들여 차린 음식은 외롭게 밥상 위에서 식어간다. 남편이 반찬을 갖고 투정을 했을 때에 아내가 이렇게만 물었어도 상황이 틀려졌을 지 모른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러면 남편은 과장에게 억울하게 당했던 일을 쏟아 놓았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남편 신경질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과장에게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을 좋은 말로 위로하여 식탁에 마주 앉은 시간이, 위로와 격려의 시간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넷째로 우리는 불완전한 해결 안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에서 겪는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다. 대개는 복잡하다. 갈등을 겪을 때에 한사람이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방이 절대적으로 그른 법은 없다. 둘 다 옳은 점이 있고 그른 점이 있다. 그러므로 양쪽이 다 만족할 만한 완전한 해결책은 없다고 보는 것이 낫다. 완전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은 갈등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 밖에 가져오지 않는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소속되어있는 남침례회는 현재 보수파와 중도파 사이에 갈등을 겪고 있다. 보수파는 성경을 절대적인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침례교회 신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중도파는 양심에 기초한 개인신앙의 자유가 침례교회신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수파인 보수진영에서 최근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여성목회자는 허락이 안된다’는 조항을 “침례교도의 믿음과 신조 (Baptist Faith and Message)”에 첨가하였다. 성경의 원칙에 벗어나 현실에 영합하는 사조를 막아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파인 중도진영은 이러한 총회의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 대한 특정해석일 뿐인데 이것을 신조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양심의 자유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두 주장이 다 일리가 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공존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다보니 골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 중도파들의 교단탈퇴는 이제 시간문제인 것 같아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불완전한 해결 안에서 산다는 것은 성숙했다는 의미이다. 어떤 분이 성숙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애매함 가운데 살 수 있는 능력”(the ability to live with ambiguity). 멋진 정의라고 생각한다. 교회와 개인이 성숙하기 위하여서 갈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갈등을 해소해가는 과정 가운데에서 애매한 상태를 수용하고 그 안에서 평안해 할 수 있는 능력을 또한 키워야만 한다. 흑백논리에 기초하여 ‘이것 아니면 저것’, ‘너 아니면 나’ 하는 식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갈등의 해소는 결국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방법을 몰라서 갈등을 해소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해결방법을 지속성있게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도 에너지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서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들은 음성에 절대 순종할 것을 결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가 주시는 힘과 사랑에 의지하여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 없이 진정한 갈등해소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