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혁] 유학생의 경건의 연습과 약속(4)

크리스천 유학생 풍속도


유학생의 경건의 연습과 약속(4)
경건의 연습과 실제적인 대안


지난 칼럼에서는 경건의 연습과 실제적인 대안으로, 주로 교회 안에서의 예배 생활, 말씀 훈련 및 기도를 통한 경건의 훈련에 관하여 나누었다. 이번 호에서는 어떻게 하면 훈련된 크리스천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서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균형있는 삶을 살며, 평안함을 유지할 것인가에 관하여 나누어 보고자 한다.


균형있는 삶 – 예배와 삶의 일치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와 한국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또 조롱을 당하는 것은 바로 교회 안에서의 뜨거운 예배 신앙을 그들의 세상의 삶 속에서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배와 삶이 불일치하는 위선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이 세상의 삶 속에서 참 소금의 기능을 잃어 버렸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는 쓸모 없는 소금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배 생활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받고 기도를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었으면, 이제 세상으로 나가서 구원 받은 자로서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참 경건의 훈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교회에서는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 드리며,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었지만, 세상에서는 말씀과 전혀 다르게 살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인 믿음의 모습은, 미국에 이민와서 살고 있는 이민 교회의 한인 크리스천들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전 시카고와 뉴욕에서, 미국에 이민 온 50여 개국의 미국 이민자에 대해 앙케이트를 조사했는데, 미국 사회의 기여도가 가장 낮고, 불친절하고 무례하며, 신뢰하기 힘든, 인기 없는 이민자의 몇번째로 한인 이민자가 뽑혔다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가는 곳마다 한국 이민 교회는 많고, 날마다 예배는 열심히 드리는데, 무엇 때문에 이 미국 사회에서 한국 사람은 정직하지 않은 사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 신실함과 정직성이 없는 사람으로 비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한인 이민자 중에 50%가 넘는 한인 크리스천들이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 이원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생애 동안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거하셨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죽어 가는 뭇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셨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은 세상에 거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도리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하기에 늘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의 삶이야말로 가장 실제적인 경건의 연습이라 할 수 있으며, 실제의 삶 속에서의 경건의 훈련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연약한 심성과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는 세상 속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오직 주님을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란 바로 경건의 능력을 인정하는 삶이다. 몇 십년 믿음 생활을 하고, 또 철저히 예배와 말씀과 기도로 무장이 되었다고 한들, 세상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빛을 발할 수 없다면 저들의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삶은 세상에 동화되는 삶이 아니다. 세상을 누리면서도, 소금처럼 썩지 않는 삶을 말한다. 세상 가운데 살면서도 구별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구별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사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세상을 피하며 사는 것은 더욱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되, 주님의 사명을 받고 세상에 파송된 하나님의 대사처럼 산다는 것이다. 신학자인 존 켈빈은 “현재의 삶은 유혹적인 것들이 많이 있어서, 유쾌하고, 우아하고, 감미로운 하나의 거대한 쇼와 같다. 우리는 그것들을 절대로 경멸하지 말아야 되는 하나님의 선하신 선물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고 애호해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에 거하는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기를 원하시며, 또 우리가 주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누리기를 원하신다(딤전 6:17).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주님이 주신 만물의 풍성함에 불편해 하거나 죄스러워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주신 것들을 즐거움으로 누리면서도, 그 즐거움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게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 하는 어리석음과 탐욕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아 거룩하게 된 후에, 다시 세상으로 파송된 하나님의 거룩한 대사인 셈이다. 이리하여 우리 크리스천은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과감히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에서 은혜 받고 세상으로 나가서는 주님을 증거하며, 능력 있는 삶을 살자. 유학 생활 중에 여러분이 강의실과 연구실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보여주고, 또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우상을 섬기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유학 온 50만 명의 국제 유학생은 여러분이 섬겨야 할 귀한 대상이 아니겠는가?


자족하는 마음


성경에서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된다고 말씀하셨다(딤전 6:6). 우리가 아무리 이 땅에서 잘 되고, 신앙적으로 성숙한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그만큼의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자족하는 마음은 경건의 연습에 큰 유익이 된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김집사 그릇은 저렇게 큰데, 내 그릇은 왜 이렇게 작습니까”라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내 그릇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경건의 훈련이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여 결국에는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허락된 섬김의 자리와 위치,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적인 위치에 자족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자족하는 마음은 곧 감사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인 것을 인정하자. 그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통하여 계획하신 모든 것이 온전하고, 아름답고, 최고 좋은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히 1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2)” 라고 하셨으니, 지금 당장 볼 수 있다면 그것을 믿지 못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느끼고, 갖지 못한 것을 가진 것처럼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믿음과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주님이 주신 것으로 자족하며 사는 크리스천들은 돈을 가지고도 유혹 못하고, 지위를 가지고도 협박 못한다. 이런 크리스찬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실 때도 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인가? 학위인가, 돈인가, 명예인가, 직장인가, 자존심인가? 주님 앞에 모두 내려 놓자. 순종함으로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렸던 여인처럼, 여러분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함을 누릴 때에 진정 자유함이 있을 것이다.


믿음은 있으되 자족할 줄 모르는 크리스천은 범사를 걱정하다가 밤을 새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으며,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가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진정한 복락은 평안함일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시사 하신 첫 말씀이 바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누려야 할 복락은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평안이다. 남보다 잘 되는 것도 아니요,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세상 지위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자족함을 가지고, 평안함을 누리는 것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크리스천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니겠는가?


경건의 연습을 통하여 주시는 금생의 약속은 평안함이다. 주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며 살 수 있다면, 이 세상 체제에서는 가장 낮고 보잘 것 없는 언덕을 점령하고 살아도, 사도 바울처럼 기쁨으로 높은 곳을 바라 보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안에서 평안함으로 살되 세상에 속하는 삶을 살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대사로 파송 받은 자로 살아 주님의 영광을 증거할 수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삶이 될 것인가? 오늘도 우리는 경건의 연습과 훈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유학 생활 동안에 열심히 예배 드리고, 주야로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며, 부르짖어 기도하고, 세상 가운데에서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자로 살수 있기를, 또 주님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바울같은 능력 있는 크리스천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하며, 유학생 경건의 연습과 약속의 칼럼을 끝맺고자 한다.



* “유학생의 경건의 연습과 약속” 칼럼은 본 회를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다음 달부터는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라는 칼럼 제목으로 IMF의 여파로 학위취득 후에 진로와 취업에 대하여 고민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공통된 관심을 몇 회에 걸쳐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이일형] 어떻게 하면 침체되어 있는 청년부를 활성화 시킬 수 있습니까?

캠퍼스 사역 Q&A


어떻게 하면 침체되어 있는 청년부를 활성화 시킬 수 있습니까?


청년부의 목적을 확실히 정립해야 합니다. 먼저 청년회가 왜 존재하는지 또 그 목적에 비추어 보아 “활성화” 시킨다는 뜻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물론 각 교단에 따라 혹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다 더 정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청년부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중에 하나로서 젊은 사람들이 모인 신앙의 공동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 땅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구체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 교회”를 포함한 para-church들, 즉 campus ministry과 또한 여러 선교 단체들의 종합체라고 개념지을 수 있습니다. 이런 종합적인 개념 안에서 청년부는 일반적으로 한 지 교회 안의 청년들의 신앙 공동체, 즉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년부의 목적을 정립하려면 신앙 생활이 무엇인지, 또 신앙 생활에 관련되어 왜 모여야 하는지, 그리고 그 모임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하나의 지체로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청년부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우선적으로 제자를 양육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은 그의 나라, 즉 제자들의 삶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키우는 일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부라는 지체로 조금 좁혀서 생각해 보면 제자를 키우는 일이란 청년들의 삶 가운데 깊이 파고 들어 그들을 온전히 주님께 순종시켜 평생을 주를 위하여 살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드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의 삶 가운데 깊이 파고들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과 호흡을 같이 맞추고 그들의 생각의 수준으로 눈 높이를 조절해야 합니다. 그런데 눈 높이의 조절이란 그들의 가치관을 받아 들인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그들의 가치관과 생각이 무엇인지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그들의 눈 높이로 전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은 말씀을 전하고 지키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은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청년부 모임에서 설교 말씀 듣는 것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한 지체가 독립적으로 성경을 대하며 하나님의 살아 계시는 생동력 있는 말씀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는 작업을 말합니다. 직접 말씀을 받아 들일 수 있는 단계에 이를 때 그 말씀을 또한 지킬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뛰어난 의지보다는 생동력 있는 말씀이 그 지체 안에서 움직이시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 입니다. 이런 작업은 한 인도자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보통 한 인도자가 5명 정도 이상을 동시에 제자 훈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명의 지체를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세우기 위해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데는 (경험으로 보아) 약 3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준비되어 있는 인도자 없이 숫자적 부흥을 구하는 것은 위험한 일 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지키게 하는 일은 완전한 헌신과 말씀의 붙들림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청년부를 인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완전히 헌신되어 있다는 뜻은 그것이 목회자이건 평신도이건 관계 없이 제자 삼는 것에 초점이 항상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점이 흐려지지 않는다는 뜻은 첫째로 자기의 계획하는 모든 바가 한 영혼 영혼에 대한 관심과 훈련에 의하여 결정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어느 프로그램이나 혹은 교회의 다른 일들을 위하여 일군이 필요하기 때문에 청년부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자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수성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자신의 삶 자체가 제자 삼는 일에 우선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자 훈련은 삶을 통하여 말씀이 생명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의 삶 자체가 제자로서의 삶에 미치지 못 하면서 가르치면 위선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에 온전히 붙들린 자라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먼저 말씀에 깊이 빠져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깊은 묵상과 이해가 없으면 말씀 대신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청년부를 활성화시킨다는 뜻은 제자 삼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제자 삼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청년부는 활성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몇 사람이 모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제자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헌신된 한 사람만 있으면 청년부가 활성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제자의 삶을 사는 한 인도자가 있으면 청년부는 활성화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인도자가 한 명이면 그 청년부는 5명만 모여도 활성화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3년의 공생애 동안에만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선포 하셨지만 그의 삶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던 것은 자신이 선택한 12제자들을 훈련하시는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자가 된다 함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가장 핵심적 표현은 다른 사람을 또한 제자 삼는 일 입니다. 제자 삼는 일은 전도, 양육, 돌봄과 사귐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 영접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일을 곧 시작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돌봄, 그 다음은 양육입니다. 사귐은 이 모든 과정 가운데 끝임 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귐이 없이는 다른 제자 훈련의 과정들을 자연스럽게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년부가 소속되어 있는 환경, 즉 소속되어 있는 지 교회 안의 특별한 사정이나 다른 para-church와 연관된 관계 등등에 의하여 조금 융통성 있게 운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소속되어 있는 지 교회 안에서 한 지체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일들에 동참하는 것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차세대를 양육하는 교사, 예배를 인도할 찬양 등을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것들이 일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잘 분배함으로 직접적으로 제자 삼는 일에 “해”를 입히는 일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김중안] 한국 유학생 사역의 컨텍스트(Context)

유학생 사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컨텍스트(Context)


1. 들어가는 말


2001년 코스타 수련회 이후로, 캠퍼스 현장과 지역 교회 내에서의 유학생 사역의 현황을 파악하고 지원하는 사역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호부터 시리즈로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유학생 사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글은 한국 유학생 사역의 컨텍스트(context, 배경)가 되는 미국 내의 ‘외국인 학생 사역'(international student ministry)의 중요성에 대해 고찰해 보자 한다. 우리 사역의 장(場)인 미국 캠퍼스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 이를 선교학적, 전략적 관점에서 재조명해 봄으로써, 한국 유학생 사역을 자리 매김하고 이 사역의 중요성을 되새김해 보고자 한다.


코스타 사역이나 지역 교회 내에서의 유학생 사역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 ‘외국인 학생 사역’의 일부이다. 현재 미국 내에 있는 50만 명이 넘는 유학생들을 위해 ISI (International Student Inc.)와 IVF(Inter Varsity Christian Fellowship), CCC(Christian Campus Crusade), Navigators 등에서 수 백 명의 간사들이 전적으로 유학생 선교를 위해 전임(full-time)으로 캠퍼스(campus)와 지역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고 중국 학생들과 교수들 선교를 위한 전문 연구 기관이 있는데, 중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은 (코스타와 비슷한 형태의) 자국 학생들을 위한 수련회를 매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시대적 조류와 필요에 맞게 이 사역들이 효과적으로 되어지고 서로 협력하기 위해서 전문적으로 네트워킹(networking)을 하는 ACMI(Association of Christian Ministry among Internationals)라는 사역도 있다.


2. 미국의 캠퍼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1) 증가하는 유학생들


지난 44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56년의 약 30,000명에서 1999-2000년도 학기에는 190개 나라의 514,723명으로 증가했다. 한국 유학생은 중국 (54,000명), 일본(46,000명), 인도(42,000명)이어 4번째인, 41,191명으로 파악되어 있다(자료: 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환 교수들, 정부 관료들, 해외 파견 근무자(지상사), 전문인들(J, H비자 소지자)이 미국에서 수 개월에서 수 년까지 머무르고 있다.


IMF 이후 한국 유학생 숫자가 줄다가 최근에 와서 다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던 전형적인 유학의 패턴에서 벗어나 단기 언어 연수와, 조기 유학, 만학 유학이 붐을 이루고 있고, 학부 유학생도 꾸준히 늘고 있다. 이 외에도 박사후 과정(Post-Doc)과 교환 교수, 그리고 정부와 기업에서 파견된 유학생과 연수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 유학생의 경우 졸업 이후 미국에서 직장(job)을 잡고 정착하는 비율이 증가하고 있으며, 교환 교수나 연수로 왔다가 자녀 교육 문제로 엄마와 애들은 미국에 남고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돈을 벌어 송금하는 일명 ‘펭귄족'(다른 말로는 ‘기러기족’, ‘한총련'(한시적 총각들의 연합))들도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2) 외면 당하고 있는 선교의 장


미국 내 외국인 학생 사역(international student ministry)은 세계 선교에 있어서 가장 외면 당하고 있는 영역중의 하나이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0.5%만이 유학생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학생들의 0.5% 정도에게만 효과적으로 복음이 전하여지고 있다. 외국에 나가서 선교 사역을 하는 것만 선교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미국 교회 내에 편만해 있는 것이다. 이는 90년 초반에 한국에 밀려 들었던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외면하고 외국으로만 선교사를 보내려고 했던 한국 교회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 교회에가 복음을 전도한 외국인 유학생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외국인 유학생에게 지속적인 접근하는 그리스도인의 숫자도 극소수이다. 평범한 미국 가정에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못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유학생도 허다하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민 교회에서 유학생들을 위한 사역은 항상 우선 순위에서 밀린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 담임 목사님은 주로 1세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교회의 역량이 될 때 1세 이민자의 자녀들을 위한 2세 영어권 사역을 시작한다. 유학생을 위한 전문 사역자나 전임 사역자는 아주 드물고, 유학생의 삶의 장인 캠퍼스를 무시하고 지역 교회 안으로만 학생들을 끌어 들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학생 사역이나 선교의 개념이 부재하고 유학생들은 한국어권 청년부나 청장년부로 편성되어 자체로 운영되거나, 주변에 신학교가 있으면 파트타임(part-time) 사역자를 배치하는 정도이다. 유학생은 있다가 떠날 사람이라는 심리가 팽배하여 투자할 가치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을 위한 전도와 양육의 사역은 부재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운영을 위한 봉사나 열심히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민 교회에서 한국 유학생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적 대상이 아니라 개 교회를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많은 유학생들이 감히 내뱉는 한탄이다.


3. 유학생 사역의 중요성


1) 선교학적 고찰



  • 잘못된 선교의 개념 –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선교를 지정학적 개념으로 생각하여 외국으로 나가는 선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 선교 개념은 지정학적 개념이 아닌 ‘사람'(people) 중심의, 사람을 향한 개념이다. 오늘 날의 미개척지 선교(Frontier Mission)는 티벳, 몽고, 사우디 아라비아, 파푸아 뉴기니에 제한되지 않는다. 세계 각국에서 유학생들이 몰려 있는 미국의 캠퍼스와 도시들도 미개척 선교지역이다.


  • 선교 메카니즘(Mechanism) – 선교학자들은 선교의 메카니즘을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로 구분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로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참 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구심적 선교이고 포로기에 이방인 가운데 흩어져서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증거한 것은 원심적 선교에 해당된다. 이 메카니즘은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병행하여 이어져 왔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모으기도 하시고 흩으시기도 하신다. 구심적 선교에 의해 약 190개국에서 50만 명이 넘는 유학생들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 내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타문화 선교에 직접 동참하게 되었다.


  • 선교 유형(Type) – 선교학자 Ralph Winter는 선교의 유형을 HM(home mission)과 FM(foreign mission)으로 나눈다. 그리고 각 유형을 다음과 같이 3개의 그룹으로 나눈다.

    Home Mission
    (1) HM1 – 본국에서 동일한 문화와 언어 집단 전도 (미국 학생→미국 학생)
    (2) HM2 – 본국에서 유사한 문화와 언어 집단 (미국 학생→아일랜드 학생)
    (3) HM3 – 본국에서 완전히 다른 문화 언어 집단 (미국학생→중국 학생)


    Foreign Mission
    (1) FM1 – 외국에서 동일한 문화 언어 집단 (미국에서 한국 학생→한국 학생)
    (2) FM2 – 외국에서 유사한 문화 언어 집단 (미국에서 대만·홍콩 학생→중국 학생)
    (3) FM3 – 외국에서 전혀 문화와 언어가 다른 집단(미국에서 한국 학생→중국 학생)


이를 통해 보면 미국 내 한인 교회에서의 유학생 사역과 코스타 사역은 FM1 유형에 해당되고, ISI 사역은 HM3 유형에 해당되며, 한국 유학생 중 중국 유학생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은 FM3 유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2) 미국 내 복음 전도의 장점들


미국 내에서 유학생 사역은 복음 전도상 여러 면에서 장점들을 갖고 있다. 첫째로, 유학생들은 본국에서보다 훨씬 더 복음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다. 그들은 언어적·문화적 장벽과 경제적 압박, 학업의 스트레스로 인해 정서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들이 필요하고, 영적으로 갈급한 상태에 있다. 둘째로, 미국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유학생들과 학생이라는 공통된 신분과 관심사가 있고 많은 시간을 강의실과 기숙사, 도서관과 식당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기 때문에,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전인격적으로 ‘특유의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복음주의 사역'(Lifestyle Evangelism)에 동참할 수 있다. 셋째로, 구심적 선교지에서는 언어나 비자나 음식과 기후에 적응할 필요가 없다. 넷째로, 유학생들은 2-5년 정도의 기간 동안 미국에 머무르기 때문에, 복음 전도와 양육을 위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다.


한국 유학생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유학생 중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학생들이 전체 유학생 출석자의 25% 이상이 된다. 실제적으로 믿지 않는 한국 유학생들의 상당수가 실제적, 정서적, 영적인 필요로 갈급해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보다 복음에 대해 열려 있다. 많은 수의 한국 유학생 구도자(seeker)들이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 한국 교회 문을 넘나 들고 있다.


3) 전략적 중요성


미국에서의 유학생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 유학생들이 갖고 있는 영향력 – 유학생들은 본국이나 미국, 혹은 다른 나라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미래의 지도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3세계에서 온 유학생의 경우에 더 확실하다. 전통적으로 선교사들은 제3세계로 파송되어, 그곳에서 의료나 기술, 또는 교육의 도움이 필요한 중하층을 상대로 많은 사역을 하였다. 그러므로 제3세계의 유학생들은 본국에서는 복음에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집단 출신인 셈인 반면, 가까운 미래에 정치 경제와 교육과 문화 등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칠 인물들이다. 매년 12월 콜로라도에서 미국 IVF가 주최하는 외국인 학생 수양회(International Students Conference)에 참여한 한 아프리카 학생은 유학 후 본국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이어 차기 대통령이 될 학생이었다. 내가 지금 교제하고 있는 이디오피아 유학생 아저씨는 그 나라에서 도시 개발을 책임지고 있던 장관급 인물이다. 내가 대학 3학년이었을 때 나에게 학생 사역과 유학생 선교에 헌신하도록 도전을 준 IFES의 Eli Lau 간사의 말이 떠오른다. “등소평이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였다면 중국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 평생의 유일한 기회 – 수많은 유학생들이 복음에 문을 닫고 있는 10/40 Window 나라들에서 왔다. 실제로 많은 유학생들에게 있어서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평생 의 유일한 기회가 된다. 미국의 전체 유학생 중 14%가 회교권에서 온 학생이다. 이들이 본국에서 복음에 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학교 아파트 왼쪽 옆집은 이란에서 온 유학생 부부인데, 출석하는 미국 교회에서 작년에 세례를 받았다. 몇 달 전에 이사 온 위층 오른쪽 집은 이라크에서 유학 온 부부이다. 말 그대로 “The world is at your door step”인 것이다. 10/40 Window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들을 본다는 것,은 수십 년에 걸친 그들의 사역 동안 정말 드문 일이다. 이것에 비하면 미국에서의 유학생 사역은 바로 선교의 ‘노다지’라 말할 수 있다. 일례로, 아이오와 대학교(University of Iowa) 중국 학생들의 캠퍼스 성경 공부 모임에는 매주 100명 이상의 본토 중국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매년 20명 정도가 세례를 받고 있다.

많은 수의 한국 학생들이 유학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복음을 듣고 있다. 주일 학교나 중고등부에 다녔던 경험이 있거나, 성탄절에 친구 따라 교회 갔던 일이 있거나, 군대에서 의무 종교 행사의 일부로 세례를 받은 적이 있는 유학생들은, 유학 시절에야 비로소 진지한 마음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거나 유학생 성경 공부 모임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이들에게도 이러한 기회가 복음을 듣고 말씀으로 양육될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이들은 가까운 장래에 한국 사회와 미국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지역 교회에서 평신도 지도자로서, 제3세계에서 선교사로 섬기게 될 잠재된 일군들이다. 또한 정부 관료로서, 대학 교수로서, 대기업 간부로서, 의사로서,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오던 사람들도 있다. 고지론이든, 저지론이든, 미답지론이든, 그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들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대단한 것이다.


4. 나가는 말


현장과 컨텍스트를 무시하는 사역이자 성경적 전략이 없는 사역은 실제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제 한국 유학생 사역을 지역 교회나 코스타 수련회의 좁은 관점에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미국 전역과 더 나아가 전세계에서 열방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유학생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적 안목을 가지고 전략을 짜고 구조를 만들고 내용을 담아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절실히 요구되는 바는 지역 교회와 코스타가 동역자의 관계로서 현장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 내 외국 학생을 위한 목회(International Students Ministry)를 하는 기관들과 Jama, Urbana 선교 대회, 해외 선교 기관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학원복음화 협의회나 선교 한국과 같은 단체들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효과적인 사역 방안들을 모색하고 협력 사역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코스타 사역도 일회성 부흥회의 성격에서 벗어나 지역 교회와 현장의 유학생 사역을 지원하고 실제적으로 섬기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헌신과 순종을 통해 이 일을 이루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정진호] 타임머신을 타고

코스탄 현장 이야기


타임머신을 타고


1994년 8월 4일 오후 5시, 우리 가족은 마침내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시 공항에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황혼이 깔리기 시작한 활주로의 눈부심 속에서 트렁크를 잔뜩 실은 시퍼런 트럭이 좁다란 공항 출구를 빠져나와 시골 역사를 방불케하는 공항 청사 앞에 꾸물거리며 멈추어 서자 저마다 짐표를 흔들어 대며 짐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아우성 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고, 나는 그 모습을 꿈꾸듯 아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의 풍경은 석양에 젖어 초콜릿 색깔로 빛나는 가운데 옛 기억을 더듬어 희미하게 되살아 나는 60년대 한국 거리의 모습이었다. 누추하고 생경한 붉은 간판들로 뒤덮인 거리, 먼지와 쓰레기 더미 사이를 오가는 새까만 얼굴들의 찌든 모습들이 가슴을 파고들며 잔잔한 설렘으로 젖어 왔다. 잔뜩 긴장하여 겁먹은 표정으로 낯선 거리를 내려다보는 아내와 볼에 홍조를 띤 여덟 살 짜리 아들의 옆모습을 틈틈이 훔쳐보았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추스르며 생각했다. 그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신, 이 모든 역사를 일으키신 그 분만을 의뢰하리라 하는 강한 기도가 저절로 입 속을 맴돌았다.


우리를 실은 버스가 시가지를 벗어나 길 양편에 오물 쓰레기가 잔뜩 버려져 있는 언덕받이로 한참 올라가다 보니, 세로로 길게 붙은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이라는 흰색 나무팻말이 나타났다. 그러자 교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맞닿아 우뚝 세워진 연둣빛 건물이 와락 눈앞에 다가왔다. 건물 앞으로 연길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지평선에는 황홀하게 타오르는 눈부신 저녁 노을이 붉게 펼쳐져 있었다. 버스에 내려서 건물 뒤편의 확 터진 벌판을 한 번 둘러보던 나는 지금 내가 내딛고 있는 이 곳이 우리 선조들이 세월의 모진 풍상을 뚫고 건너와 살던 만주 벌판의 바로 그 중국 땅이라는 사실이 채 실감이 나지 않아 어리둥절한 느낌에 싸인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학생 기숙사에 임시로 짐을 풀고 중국에서의 첫 밤을 맞이한 우리 부부는 감개와 두려움과 설렘에 젖어 엎드려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한 여름인데도 오싹하는 한기가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왔다. 이국에서의 첫날밤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을 때, 기숙사 어디선가 은은한 하모니카의 선율을 타고 찬송가가 고즈넉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로소 깊은 한숨을 내쉬며 꿈결로 빠져들었다.


숙사(宿舍)에서의 첫 2주일 간은 마치 우리 가족이 꿈 속에서 어느 이상한 나라로 별안간 날아온 듯한 기분으로 보내야 했다. 수업 준비를 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여러 가지 여름 행사로 분주한 학교 안팎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숙사 안으로 들어오면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내와 아이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기숙사 식당의 정해진 식사시간만 기다리며 세 식구가 서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아내와 아이의 감추어진 표정 속에서 행여 어떤 절망이라도 나타날까봐 노심 초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학교 안은 온통 진흙 창이 되어서 꼼짝달싹 할 수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만다. 으슬으슬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숙사 안에서 창 밖을 달리는 빗줄기를 헤아리며 축축이 젖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해가 났다. 맥이 없어 나가기 싫다고 하는 아내를 두고서 아들 다니엘의 손을 잡고 산보라도 할 심산으로 기숙사 현관 앞에 나가 보았다.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려운 질퍽거리는 진흙땅을 어이없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아빠, 저것 좀 봐. 참 아름답다. 그지?” 라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이가 가리키는 곳에는 얼기설기 보기 싫게 헝클어진 전깃줄이 전봇대를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색깔의 전깃줄 사이로 맺혀진 이슬이 환한 햇살을 받아 영롱한 무지갯빛을 비추이며 아름답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한 줄기 부끄러운 생각이 샘솟듯 스며 나와 아이를 향해 흘러 내렸다. “그렇다. 아들아!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참 복되다.”


한국서 부친 콘테이너가 도착하자 우리는 뻬이따라는 동네에 셋집을 얻어 학생 숙사에서 내려왔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우리의 그 많던 이삿짐이 하나도 빠짐 없이 전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안성맞춤의 층집(아파트)을 얻게 되었다. 내 아내(이곳서는 애인 동무로 불린다)는 도시 전체를 맴돌고 있는 먼지와 악취를 가장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 동안 우리가 무심코 살아왔던 깨끗하고 안락한 환경에 대해 얼마나 감사치 못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 함께 회개하며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적응하셨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 비밀된 방법들을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맑은 날, 5층 내 사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야산의 전원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끝없이 펼쳐진 구릉과 지평선을 너머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그 벌판 가운데 내가 홀로 서 있는 기분은 복잡한 한국에서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묘한 느낌을 자아내곤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내려선 거리에는 텅 빈 심령들의 찌들은 모습들과 쓰레기 먼지 냄새가 가득하다. 한국의 50년대에서 80년대까지를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소가 끄는 달구지와 인력거, 자전거의 홍수, 매연을 뿜어 대는 구 소련제 라다 택시, 더러는 값비싼 그랜저나 벤츠에 이르기까지 눈에 뜨인다.


하루는 학교에 있는데 밤톨만한 우박이 쏟아지는 폭우가 내려 삽시간에 온 도시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걱정이 되어 집으로 전화를 하니, 아내는 발코니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빗줄기를 물동이로 퍼서 밖으로 퍼내느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돌아오는 길에서 새까만 구정물로 잠긴 도시에 긴 장화를 신고 더러는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쥐고 물살을 헤치며 걸어가는 아낙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되돌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내 나이 서른 살 되었을 때, 미국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후 어느 날 새벽에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다. “하나님! 헛되이 보낸 지난 세월들이 억울합니다. 과거로 되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어린아이와 같았던 그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90년 KOSTA에 참가한 이후, 중국에 대한 부르심을 받고 간절히 매달려 기도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타임머신은 마침내 작동하고 말았다. (1994. 9. 9)


[은지영] (羅生門, Rashomon) 승려와 나무꾼

영화 속의 숨은 그림 찾기


<라쇼몽>(羅生門, Rashomon)
승려와 나무꾼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독 쿠로사와 아키라(黑澤 明, Akira Kurosawa)

개봉연도 1950년(일본)/1951년(미국)
등급 등급무(無) – 폭력, 성인용 주제
원작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각본 쿠로사와 아키라, 하시모토 시노부
촬영 미야카와 카주오

주요 등장 인물

산적 타조마루
무사 남편 타케히로
아내 마사고
나무꾼
승려
행인
무당




미후네 토시로
모시 마사유키
마치코 교
타카시 시무라
미노루 치아키
키치지로 우에다
후미코 혼마


사용자 삽입 이미지지난 1998년, 88세의 나이로 타계한 쿠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Rashomon)은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서구에 일본의 영화을 알리는 전기를 마련한 작품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일본의 국가대표 감독, 쿠로사와의 절제된 영상과 언어는 관객으로 하여금 한 폭의 수묵화나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쓸데 없는 대사나 군더더기 장면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른한 오후, 나무 아래 산적 하나가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 위로 흔들리는 그림자 몇 조각. 한 줄기 바람이 나뭇잎을 흔듭니다. 산적의 얼굴 위에 살랑댑니다. 그 바람은, 지나가는 말 위의 신부가 쓰고 있던 베일 한 끝을 살짝 제칩니다. 순간 스쳐 지나는 신부의 얼굴. 아까까지 늘쩡거리던 사내의 눈에 반짝 기운이 돕니다. 그후, 남편이 산적과 사라진 후, 물가를 찾아 살포시 내려서는 여인의 발. 물과 희롱하는 여인의 조용한 흰 손. 서로 주고 받는 대사 몇 마디 없이, 이렇게 이야기는 그림을 따라 흐릅니다.

이처럼 아련한 여백의 미와 시적인 언어로 옷을 입힌 쿠로사와의 이야기가 서양 세계의 찬사를 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독특하게 아름다운 영상도 영상이지만, 당대의 서양 지성들에게 “진리는 없다”며 진리의 상대성을 제기하는 동양의 ‘신선한'(?) 철학이 효과를 본 것입니다. 참고로 <라쇼몽>은 일본 내의 흥행에서 실패했을 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비평가들은 이 영화의 베니스 그랑프리 수상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국내 흥행에 실패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작년 칸느 영화제 경쟁 부분에 초청된 임권택 감독의 <춘향>의 기록과 어쩐지 비슷합니다. 서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면, 하나는 수상을 했고, 다른 하나는 못 했다는 점. 상을 받은 후에도 <라쇼몽>은 자국 비평가들에게 여전히 찬밥 신세였지만, 초청을 받은 후 <춘향>은 국내 비평가들의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는 명작으로 갑자기 승격됐다는 점. 일본의 정서에 거의 무지하기 때문에 두 번째의 이유를 논한다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이지만, 쿠로사와가 수상한 이유는 알 것도 같습니다.

(지난 5월호 ‘사족’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국(異國)만의 전통성을 내세워 국제 무대에 선 영화는 일단 ‘독창적’이라는 점에서 유리할 수는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 ‘보편성’을 결여한 주제를 강요한다면 그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모으는 것으로 그치기가 쉽습니다. ‘빈틈 없고 계산 빠른’ 쿠로사와는 시각적으로 일본의 전통을 수용한 그림에다 보편성을 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선천적인 죄성, 자기 중심적 본성, 이기심 등, 인간 본연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한편으로, 동양 (불교)의 ‘자비’를 통해 휴머니티의 문제에 접근하는 시도를 했을 뿐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등 크고 작은 전쟁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변모한 여성의 위상을 재조명하였던 것입니다. 즉, 일본 중세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로사와가 그리고 있는 여성상은 전후 20세기의 여성입니다. 영화의 처음, 나약하고 순종적이던 ‘안개꽃’ 신부는 산적에게 육체를 유린 당한 후, (은장도를 꺼내 할복자살을 시도하리라는 관객의 예상을 뒤엎고) 결국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산적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까지 복수를 할 만큼 당돌하고 능동적인 ‘억새풀’ 여성으로 변모합니다. 영화의 주제가 1950년대 당시의 시대 흐름과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1980년대 베니스 영화제에서 강수연씨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적으로 ‘대리모’ 논쟁이 한창이던 당시의 상황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 배경 음악에 있어서도 국제적인 감각에 일본의 고유한 맛을 곁들일 것을 이미 계산에 넣은 쿠로사와는, 라벨(Ravel)의 (그 유명한) <볼레로>(Bolero)를 일본풍으로 변주하여 중세 일본을 담은 그림을 따라 리듬감 있게 흐르게 함으로써, ‘친숙’하면서도 왠지 ‘낯선’듯한, 독특한 느낌의 스타일로 세계의 관객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요절한 일본의 대표적 근대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1915년 문단 데뷔작 <라쇼몽>에서 영화의 제목과 소재, 그리고 배경을 따오고 그의 1921년작 <숲속>의 내용을 함께 엮어 쿠로사와 아키라와 하시모토 시노부가 각색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나무꾼은 원래 류노스케의 <숲속>에는 없던 인물인데, 극적 효과를 위해 쿠로사와가 새로 만들어 넣었다고 합니다. 비록 나중에 첨가된 인물이긴 하지만 영화의 나무꾼은 ‘목격자’ 및 ‘문제 제기자’, 그리고 ‘제4의 진술자’로 ‘맹활약’을 하며, ‘자비’,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영화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비 내리는 라쇼몽에 쭈그리고 앉아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를 되뇌는 나무꾼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의 곁에는 똑같이 심각하고 혼란스런 표정의 승려가 앉아있고 지나가던 행인이 여기에 가세하는데, 나무꾼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느 화창한 오후, 한 무사와 그의 신부가 숲을 지나다 산적을 만나게 되고, 나무꾼이 무사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얼마 후 말에서 팽개쳐져 바닷가에 기절해 있던 산적이 잡혀 오게 되고, 절에 숨어 있던 신부가 끌려 나오고, 이어서 무당을 통해 죽은 무사 남편의 영혼까지 불려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산적이 무사의 아내를 강간했다는 것과 무사가 죽었다는 두 가지 명백한 사실만 빼놓고는, 이들 세 사람의 진술이 모두 엇갈립니다. 게다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는 것입니다. 산적과 신부는 자기가 무사를 죽였다고 하고, 무사는 자살이라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부분 예상되는 살인 사건 용의자들의 증언이란 것이 “난 안 죽였다”일텐데, 서로 자기가 죽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잡힌 이상, 어쨌든 곧 죽게 될 산적의 몸인데 사나이 기개나 세우고 죽자….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지켜야지. 게다가 저 가증스런 남편을 한껏 욕되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내가 명색이 무사인데 명예롭지 못한, 비굴한 내 죽음이 밝혀지면 이 무슨 망신인가…. 이 모든 진술들이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감추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안 죽였다’고 하며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보다 더 수준 높은, 아니 아주 무서운 거짓말입니다. 그런 수준 있는 엇갈린 증언들을 놓고, 승려는 “더 이상 인간을 믿을 수 없단 말인가!”하며 또한 수준 있는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꾼의 증언은 이와는 또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이미 시체가 된 무사를 발견한 것 뿐이라고 진술했지만, 사실은 신부가 강간을 당한 직후부터의 사건을 전부 목격했다는 것입니다.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자를 ‘서로 안 갖겠다고’ 미루는 남편과 산적의 비굴함에 기가 막혀 하던 아내는, 남자의 허세를 교묘히 이용해 둘이 칼로 승부를 겨루도록 몰아 갑니다. 결국 산적의 칼에 남편이 죽고, 여자는 도망가고, 여자를 놓친 산적은 무사의 말을 타고 가다 말등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미스테리의 진상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그다지 별 볼일이 없어 보입니다. 법정에서는 왜 그렇게 진술하지 않았느냐는 행인의 추궁에 나무꾼은 “괜히 사건에 말려들기 싫어서” 라며 말끝을 흐립니다. 그리고 처음 시작처럼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를 다시 되뇌는 나무꾼. 인간성의 상실을 한탄하며 고뇌하는 승려. 둘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비가 그칠 때만 기다리고 있는 행인. 이 셋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비 내리는 라쇼몽에 갑자기 버려진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낼름 아이의 입은 것을 벗겨내고 지닌 것을 취하려는 행인의 파렴치한 행동에 나무꾼은 분노하지만, 행인은 ‘아이를 버린 부모나 또 나무꾼 너나, 다 나와 마찬가지로 파렴치한이 아닌가’라며 나무꾼을 조롱합니다. 약삭빠른 행인은 여인이 떨어뜨린 값진 은장도를 슬쩍한 것이 나무꾼이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입니다. 괜히 사건에 말려들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무꾼은 그 은장도 때문에 시치미를 떼었던 것입니다. 이기주의는 인간의 타고난 죄성이라고 믿고 있던 쿠로사와는, 이처럼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4명의 인물들의 입으로 4번 반복해서 듣게 된 ‘서로 엇갈리는 강간과 살인의 진술’을 통해 진실의 상대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진실이란 인간들 각각의 이기적인 시각이나 소욕에 의해 왜곡될 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낭패감과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무꾼을 한껏 조롱하고 행인이 유유히 사라진 후,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어느새 빗줄기는 잦아 들고 나무꾼이 아이를 안으려고 하는데, 이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승려는 화들짝 놀라 그를 책망합니다. 애를 들어다 버리려는 줄로 안 것입니다. 하지만 승려는 아이를 데려다 자식처럼 키우겠다는 나무꾼의 말에 감격을 금치 못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맙소. 당신 덕분에 인간에 대한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됐소.” 이미 폐허가 된 라쇼몽이 상징하듯, 타고난 이기심에 의해 무너져 버린 인간의 도덕성이 아이에게 자비를 베푼 나무꾼을 통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흔히들 말하기를 영화 <라쇼몽>의 이야기는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라고 합니다. 세상에 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해자인 산적의 말도, 피해자인 신부의 말도, 그 남편인 죽은 무사의 말도, 심지어는 나무꾼의 말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이기심과 욕심에 의해 왜곡된 거짓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거짓 뿐인 세상에서도 각 개인의 의지(意志)만 꿋꿋하다면 인간의 존재는 가치있다고, 믿을 만하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명성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바로 그 <라쇼몽>을 미국에 유학 와서 드디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영화를 보면서 내내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꽤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터라, 그때까지만 해도 Humanism과 Christianity의 차이가 뭔지 분간 못할 만큼 제대로 알지도 못했었고, 그저 무조건 예수 믿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면 다 되는 줄 알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 개과천선을 했다는 생각에 내심 흐뭇하던 그때, 제가 감정이입을 했던 대상은 바로 한탄하던 ‘승려’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무꾼’의 심정이 되어 이 영화를 봅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지킬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승려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이를 받아 안고 서 있던.

적어도 나무꾼은 자기의 죄성을 절절히 깨달은 자입니다. 그랬기에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성에 대한 신뢰나 휴머니즘을 운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도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스로는 의로운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를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을 봅니다. 나도 이 정도로 쓸 만한데 설마 나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더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더 나아가 ‘자기 의’라는 것까지 갖추고 있다면 영화의 승려처럼 세상을 한탄하겠지요. “(나만 빼고) 이 세상은 왜 이런가?” 의아해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교만한 죄성이나 이기적인 소욕에 따라 왜곡된다는 이 영화의 주제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해서 달라 보이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구나!” 라는 절절한 깨달음으로 바라보는 세상. 각 개인의 의지(意志)가 아무리 꿋꿋하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존재는 무가치하다는, 인간이란 존재는 스스로는 믿을 수 없는 악한 존재라는 깨달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라보는 세상. 그것은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므로 진리는 없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진리는 있으며 진리는 오직 하나”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우리는 다 양(羊)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1-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며칠 전 한겨레 신문에 실린 어떤 가수의 인터뷰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고 웃음이 난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노래 잘하는 줄 알던 아마추어였는데, 지금은 노래 못하는 프로이다.” 나의 죄인됨을 철저히 회개하지 못하고 꽤나 괜찮은 사람으로 스스로를 착각하던, 그리고 여전히 (너무 자주) 그렇게 착각하는, 저를 가리키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 가수도 크리스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승려보다는 나무꾼이 좋습니다. 어설픈 아마추어보다는 성실한 프로가 되고 싶습니다. 죄인된 내 모습에 날마다 절망하지만,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